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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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의 동정을 살 만한 한 소년이 있다. 온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고 술에 절어 살아가는 친아빠, 마약 중독자인 엄마, 허공에다 글을 써서 세상과 대화를 나누는 형, 그리고 마약 거래로 돈을 버리는 새아빠. 여기에다가 전설의 탈옥수를 베이비시터로 두었다고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엘리 벨'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은 언제나 애매모호하다. 둘을 구분 짓는 기준은 자신이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소수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답잖은 편견을 버리고 '엘리 벨'의 시선에서 그의 가족들을 다시 우리 앞에 불러들여야만 한다. 그저 외로울 뿐인 친아빠 '로버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통 속에서도 미소 짓는 엄마 '프랜시스', 말만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형 '오거스트', '벨' 형제를 누구보다도 아낀 새아빠 '라일', 그리고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 베이비시터 '아서 슬림 할리데이'. 그들은 올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세상에 의해 종종 가려지고 묻혀버린다. 하지만 『우주를 삼킨 소년』을 읽은 독자라면 '엘리 벨'과 그 가족들은 우리가 깊게 파고들어야만 하는 분명한 진실이고 거기에 진짜 사랑이 있었음을 알 것이다.


'우주를 삼킨 소년' '엘리 벨'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슬림 할아버지'다. 작가 '트렌트 돌턴'은 그에 대한 명확한 판결을 유보한 채로 '아서 슬림 할리데이'가 '엘리 벨'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에만 집중한다. '슬림 할아버지'는 '엘리 벨'의 폭풍 같은 삶 속에서 그를 끝까지 다독여준 유일한 어른이었다. 작품을 읽어나갈수록 양육자로서 그의 자격조건을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진다. 다만 그가 작품 안의 '엘리 벨'에게뿐만이 아니라 작품 밖의 다 커버린 '엘리 벨'들에게도 진정으로 위안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세세한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 시간을 원하는 만큼 늘릴 수 있다고 알려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 얘기는 그만 떠들고, 이번 한 번만은 네 얘기를 시작해 봐.(354쪽)"라고 말해서 시간에 쫓기며 살아오던 우리를 울려 버리는 인물이었다. 우리의 성장에 깊이 관여했던 과거의 인물들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그들은 '슬림 할아버지'처럼 어떻게 하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세부적인 사항들보다는 더 멀리 있는 미래를 내다보라고 가르쳤고, 우리 자신을 잊어버릴 만큼 다른 사람들 얘기에 집중하도록 종용했다. 적어도 내 삶을 반추해 보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어떤 연령대에 있건 상관없이 '아서 슬림 할리데이'를 만난 지금에서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을 겪는다.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단계마다 거듭된 성장 이후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이 아까울 정도로 어른이 된 이후에는 자주 '쉬운 일'들에 몸을 내맡겨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우주를 삼킨 소년』은 이전의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성장소설이다. 과정이 아닌 결과에서도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을 몇 번이고 일깨우기 때문이다.


"난 좋은 사람이 하는 일을 할 거예요, 슬림 할아버지. 좋은 사람은 무모하고, 용감하고, 본능적인 선택으로 움직이죠. 이게 내 선택이에요, 할아버지. 쉬운 일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는 거죠. (627쪽)"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여기‘와 ‘거기‘에서의 의미. - P12

네가 지금 살고 있는 브래큰 리지의 그 거지 같은 집에서 벗어날 방법이나 생각해. 다른 사람들 얘기는 그만 떠들고, 이번 한 번만은 네 얘기를 시작해 봐.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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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그러니까 프랑스혁명 전후의 ‘영국‘과 ‘프랑스‘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얼굴이 있다. 텔슨 은행의 직원 ‘로리‘, 그는 직업인으로서 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종의 노동으로 받아들인다. 근면함과 성실함의 대표적인 인물인 ‘로리‘는 ‘두 도시 이야기‘의 시작점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중심점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야 한다. 그의 이름은 ‘마네뜨 박사‘로 18년 동안 바스띠유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의사이다. 그의 증언으로 인해 낱낱이 폭로되는 프랑스의 민낯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귀족과 일반 시민의 격차는 너무 벌어져 있고, 한 쪽은 ˝우리 이 불쌍한 종족이 멸종(490쪽)˝하기를 바라고 있다. 더 이상의 차별과 배제를 견디지 못하고 혁명을 통해 국왕 부부를 처단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시민들의 부재가 우리와의 유일한 차별점이다.

˝자유, 평등, 우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412쪽)˝는 시민들의 구호는 퍽 감동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한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던 프랑스의 혁명은 점진적으로 비이성적인 형태로 변화한다. 그들은 ‘기요띤‘을 성녀로 추대하고, 사람들을 데려와 온갖 이유로 사형을 집행한다. 애초에 그들이 추구하던 자유나 평등, 우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오래다. 마지막에 죽어가던 소녀의 말처럼 ˝만약 이 공화국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그래서 그들이 덜 배고프게 된다면, 그리고 모든 면에서 고생을 덜하게 된다면(564쪽)˝ 좋겠지만, 이제 시민들의 공화국은 저속한 앙갚음을 하는 데에 급급하다. 그리고 그들의 불타는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고한 생명들이 활용된다. 혁명이 하나의 놀이처럼 전락한 가운데 그들의 모습은 ‘마네뜨 박사‘를 납치한 귀족들과 다를 바 없었다. 상대 집단을 무심하게 짓밟았고 그로 인해 집단 사이의 갈등을 오히려 더 심화시켰다. 심지어는 동일한 집단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도록 부추긴 것이다.

길을 잃은 혁명으로 인해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한 순간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건 타인을 향한 누군가의 ‘사랑‘이자 ‘연민‘, ‘희생‘이다. 귀족에게 착취당하고 유린당한 채 죽어간 가족들을 외면하지 않으려던 ‘마네뜨 박사‘에게서, 혹은 사랑하는 여인 ‘루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던 ‘씨드니 카턴‘에게서 우리는 몇몇 감정들이 혼돈에 대항하는 무기이자 대안처럼 간주됨을 목격한다. 낭만적인 감상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거대한 사회 앞에서 무력한 개인을 떠올린다면 그것만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개개인의 노력이 광기 어린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란 추측이 도리어 비이성적인 지도 모른다. 격변하는 사회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또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 전부를,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오늘도 그런 물음이 남는다.


˝다시 살아나고 싶겠지요?˝
그리고 오래된 대답.
˝잘 모르겠소.˝

82쪽

이 대화가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마네뜨 박사‘에게 하는 질문처럼 들렸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자 했던 선의로 18년 동안 감금되어야 했던 ‘마네뜨 박사‘는 ‘로리‘와 ‘드파르주‘의 도움으로 자신의 딸 ‘루시‘와 만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다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의사는 절대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8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었다. 나는 ‘마네뜨 박사‘가 시민들의 공화국이 태초에 가지고 있던 선의를 일깨우기 위해 다시 살아난 것만 같다. 길을 잃은 혁명이 실제로 사회를 올바르게 개혁하고 무고한 생명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마네뜨 박사‘는 되살아나고 싶었을까. 잘 모르겠다, 이 오래된 대답 속에서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 미래에 대한 회의가 느껴진다. 아니, 때로는 우리 사회에게 묻는 질문처럼도 들린다. 사회는 이대로 죽어있고 싶은지도 모른다. 퇴락한 사회에서 자신의 안위만 위협받지 않는다면 자유, 평등, 우애의 행방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두 도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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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p. 9

심보선 시인은 서문에서 ‘동시대인들의 삶‘과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 글쓰기의 원천이라고 밝혔다. 그건 자신의 글쓰기가 어떻다 하는 주장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게 세상과 하는 약속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와의 다짐을 지키려는 듯이 그의 글 안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추상적인 개념어˝가 아니 보통의 ˝입에서 터져 나온 육성이요, 일상의 고통으로부터 터져 나온 파열음(p18)˝을 기록한 이 작품은 망각의 동물이었던 나를 일깨우고, 영혼을 낭비하지 않도록 돕는다. 다른 독자에게도 나와 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심보선 시인은 시를 쓴다. 그리고 장르로서의 ‘시‘는 종종 타인의 질투를 야기한다. 다른 글쓰기에 비해서 길이가 짧아서 그 정도라면 ˝나도 사실은 저렇게 할 수 있는데, 딱 한 발짝만 내디디면 되는데.(p181)˝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짧은 글 안에는 사소하면서도 결코 사소해질 수 없는 어떤 삶들이 담겨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원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존재 자체로서 불법˝ 취급을 받는다. 심보선 시인의 글쓰기는 그런 사람들을 인지하고, 또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시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통의 말이 되기를 소망˝한다. 문학을 읽고 쓰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향상시키려는 그의 문학적 소명은 헛된 꿈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인 자신이 말했듯이 지금 여기의 전쟁터 같은 삶을 떠올린다면, 문학을 논하고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좌절되기 쉬워 보인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짐, 움직임이다. 익명의 바통이다. 그리고 그 바통 위에는 ‘끝나지 않았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p37

우리는 더 나은 세상과 이를 향유하는 행복에 대한 질투심을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건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쥘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살짝이라도 발을 담글 수 있을까 싶은 신기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으로서 희망에 관해서는 지독한 집착을 품고 있다. ‘헬조선‘과 같은 단어들로 세상을 비관하면서도 ˝끝나지 않았어˝라고 적힌 바통들을 발견하고는 꿈에 부풀고야 만다. 특히 한 세대 내에서 우리의 근본적인 고질병들이 해소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니 이것은 동시대인들을 넘어서서 세대 간에 이어지는 이어달리기다. 세대와 성별, 지위, 모든 것들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는 하나의 조짐으로서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문학적인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급박하고 위태롭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하나하나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그러니 ˝익명의 바통˝을 이어받은 당신, ˝미래를 향해, 미래 너머를 향해 달려라.(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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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듯이 드나들던 민음사 홈페이지에서 올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아직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작품을 애정 하기 시작했다. 그건 알 수 없는 직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시집을 구매하게 된 건 박연준 시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시인은 세상에 져 오기만 한 사람을 왠지 모르게 변호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를 주문했다. 왜일까, 스스로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어째서 나도 ‘변호‘라는 일에 동참해야겠다고 느꼈던 걸까. 우울에 잠식될수록 내 앞에 선 사람의 행복을 바라게 된다. 어디에서부터 그런 마음들이 오는지 나는 시집을 다 읽고도 알아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가운데 ‘이기리‘ 시인의 첫 시집은 무척 좋았다. 생각보다 더 비참했으므로 ‘좋았다‘라는 말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시집을 읽은 오늘은, 누군가를 꽉 껴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는 하찮은 돌이 가진 반짝거림도 알아볼 줄 안다. 하지만 순수하고 연약한 마음은 너무 쉽게 도드라지고, 세상에는 그걸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들로 처참하게 짓밟힌 아이는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명당을 찾아라」)˝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택한다. 나는 아이에게서, 또 ‘장난‘이라는 이유를 대며 아이를 괴롭히는 얼굴들에서 때로는 나를, 아니 내 친구들의 얼굴을 본다. 과거에 내가 살던 곳으로부터 거리도, 시간도 멀어졌지만 몇몇의 기억들은 사라질 줄을 모른다.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독자로서 살아남지 못하고, 어느새 일인칭 단수의 시점에서 아이의 모습을 훑는다. ˝목이 돌아간 줄도 모르고(「어린이날」)˝, 그러니까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채로 아이는 자라난다. ˝타인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맹목적 태도를 바꾸지 못(「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한 아이는 이제 ˝원반을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충분한 안녕」)˝ 되었다. 그가 이만큼이나 삶을 버텨낼 수 있던 건 아들, 하고 부르면서 손을 내밀었던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고, ‘나의 외투‘를 껴안아 주던 ‘너의 외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웃음은 ˝네가 듣고 싶은 말을˝ 여전히 어렵사리 골라내는 중이고, 영영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네가 듣고 싶은 말을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정물화를 그리는 동안」)˝ 살아가는 것이 아이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울음이 늘어나면서
사방에서 수많은 새들이 울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새는 없었다˝

「긴긴」

아이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장 옆 사람의 얼굴에서도 보이는 것 같다. 울고 있는 아이는 여기저기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아이를 보듬으려고 손을 내밀면 어느새 아이는 또 해사하게 웃는다. 이렇게 울고 불며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멀어지는 기억과 흔적 나도 나를 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남은 뼈는 곱게 갈릴 것이고 저 강물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겠지만(「강물에 남은 발자국마저 떠내려가고」)˝. 함께 죽음을 나아가는 우리는 언젠가 또 한 번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른이 된 아이는 우울하면서도 불쌍하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배반당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가진 뿌리 깊은 외로움은 또 나의 것이기도 하므로 나는 ‘누나‘의 마음이 된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아들 같은 아이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다. ˝그래도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그냥 놓아주자/ 그곳에선 안전하기를/ 뒤에서 바라봐 주자(「일시 정지」)˝. 이건 누구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에 붙들려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래, 이제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냥 놓아주자/ 그곳에선 안전하기를/ 뒤에서 바라봐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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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이고 강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 나는 그녀의 연기를 퍽 좋아한다. 영화 <콜레트>도 순전히 그런 이유에서 관람을 한 것이다. 영화를 본 이후로 나는 ‘콜레트‘의 작품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존경하고 애정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내가 영화 속에서 마주한 건 ‘콜레트‘가 아니라 결국 ‘키이라 나이틀리‘였는지도, 혹은 그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가려지지 않은 욕망과 단단한 냉철함은 매력적이었다. 작가를 좋아하면서 그 작가의 작품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딘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녀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늘 나를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집에 꽂혀 있는 『파리의 클로딘』에는 손이 가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압박을 느끼던 시점에 『여명』을 읽게 되었다. 『여명』을 읽는 동안 나는 종종 도로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만큼 더운 한여름을 떠올렸다. 어느 계절보다도 활발하고 열정적인 그때에 나는 조금은 몽롱한 기분으로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서 있다.

창에서 뛰어내린, 아직 정체불명의 이 새벽이라는 친구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변화하는 형태를 완성할 시간이 부족해는 지, 그것은 땅에 닿은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하지만 내가 그 과정에 참여하자 모든 것이 변했다.

176쪽

소설 『여명』에는 작가 ‘콜레트‘의 실제 삶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자전적 소설‘로 분류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작가 ‘콜레트‘의 어머니 ‘시도‘이다. 모든 것은 어머니 ‘시도‘에게서 시작되어 끝이 난다. ‘시도‘는 소설의 처음에서 자신의 딸인 ‘콜레트‘를 보러 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4년에 한 번만 꽃을 피우는 붉은 선인장 꽃이 곧 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학과 현실에서 어머니들에게 강요되어 온 희생과 그로 인한 억울함을 떠올려 본다면, ‘시도‘의 행보는 독보적이다. 사랑이란 감정이 명예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결국 그것으로부터 끝끝내 분리되지 못한 ‘시도‘는 사랑에 헌신적이되 의존적이지 않다. ‘시도‘와 ‘콜레트‘의 관계 또한 상대와의 유사성으로 얽혀있으면서도 서로에게 너무 들러붙어 있지 않다. ‘콜레트‘는 어머니에게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머니의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글을 쓴다. 자신과 그토록 닮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어둠에서 깨어나 여명을 맞이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새롭게 맞이한 새벽에서 우리는 더욱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콜레트‘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머니의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그 모습 그대로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세상 속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살아가려는 ‘콜레트‘의 삶은 생생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에 대해 아는 것들, 감추고자 애썼던 것들, 생각해낸 것들, 짐작했던 것들을 정리해온 이 종이 위로 달리는 내 손을 새삼 왜 멈춘단 말인가? 사랑이라는 재앙, 그 과정들, 그 이후의 일들, 이런 것들이 한 여자의 진정한 속마음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

78쪽

『여명』은 우리에게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어머니 ‘시도‘에게서 딸 ‘콜레트‘로 이어진 사랑의 서사로부터 작가는 이제 거리를 두려고 한다. 여기에서 ‘콜레트‘가 떨쳐내려고 하는 사랑의 대상이 나는 어쩐지 ‘콜레트‘의 연인 전부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지칭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콜레트‘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집요한 감정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려는 다짐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감정들과의 지긋지긋한 전쟁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콜레트‘는 새로운 새벽을 맞이하려고 한다. 그 새벽으로부터 시작된 삶 속에서 ‘콜레트‘는 어머니와 자신의 연인들이 주었던 사랑을 기반 삼아 나아갈 것이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모든 일을 중단한 채로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선인장 꽃의 개화를 기다리던 자신의 어머니 ‘시도‘처럼 자신의 삶과 또 결코 포기하지 못할 사랑이라는 감정을 열정적으로 감각하면서, 그녀는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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