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날다 - 우리가 몰랐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혹한 실상
은미희 지음 / 집사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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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규명을 통해 세상에 의를 묻고 선을 구현하다

아프지만 우리가 마주해야 할 그날의 이야기




나를 위로하지도 말며, 슬퍼하지도 말라. 다만 우리가, 내가, 너와 나를 지키지 못했음을 아파하라. 그리고 분노하라.(13쪽)


전쟁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여성은 종종 배제된다. 『나비, 날다』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지위를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작업이다.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전쟁은 더없이 참혹하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 징용된 한국인 군인, 그리고 일본인 군인까지 전쟁은 모든 이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세운다. 하지만 전쟁의 비참함 가운데서도 계급은 존재하는 것이어서 식민지의 여성으로 태어나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징집된 이들의 삶은 문장 위를 구를 때마다 독자의 몸과 마음 곳곳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나비, 날다』에서는 '김순분'을 중심으로 '금옥이', '봉녀' 등의 삶을 끌어들이면서 위안부 여성으로서의 삶을 증언한다. 꽃다운 나이에 무참하게 꺾여 버린 그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숙연해졌다. 강제징집되던 당시,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아이들은 그 모든 시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으려고, 자꾸만 살아남으려고 서로를 위로했고, 어차피 질 것을 알면서도 일본군의 야만에 대항했다. 피해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전쟁의 악몽을 견뎌내는 일본군의 눈물을 닦아줄 줄 알았던 '김순분'을 비롯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300여 페이지에 담아낸 이 책을 시작으로, 나는 기억하고 또 기억하면서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을 덜어내려고 한다.


갑작스럽게 징집당하기 이전 '김순분'은 아주 작고 평범한 꿈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남자의 그늘 아래로 제한되는 삶이지만, 언니와 어머니가 겪었던 '여자 팔자'만이 '순분'이 삶에 대해 기대하는 유일한 낙이었다. 얼마 못 가 군인들의 눈에 띄어 트럭에 실려 고향으로부터 저 멀리로 끌려가면서 '순분'은 사소한 즐거움을 누릴 기회마저 세상에 빼앗겨 버린다.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삶을 기대하면서도, '나비'처럼 더 자유롭고 낭만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삶을 꿈꿀 줄 알던 어린 소녀의 삶은 삽시간에 전락해 생존만을 바라게 되고, 끝내는 차라리 죽음만을 바라는 지경에 이른다. 일본군에게 짓밟히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순분'과 아이들에게 그건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기회이기도 했다. 좁디좁은 일상적인 바운더리를 넘어서자 고작 그토록 처참한 광경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서라면 그들이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무수한 가능성들이 뇌리를 스친다. 여성으로서, 또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난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순분'은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의 존재 덕분에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었다. 스스로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체념하지 않도록 서로를 부추겼고, 자신이 아니어도 좋으니 누군가는 살아서 위안소를 떠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선하고 순진한 아이들은 믿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동안 번번이 죽고자 하는 결심을 세웠고, 더 나아가 이 땅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한낱 물건처럼 다루어진 자신의 몸뚱이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떤 애욕도 품지 않고,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도록 숨을 수 있기를 바랐으며, 할 수만 있다면 영영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순분'은 자신의 삶에 어떤 슬픔도 느끼지 말고, 위로도 건넬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불쌍한 인생. 어쩌다 식민지 딸로 태어나 그렇듯 삶을 허망하게 마감했을까.(235쪽)" 역사책 속에서 수도 없이 나라를 잃었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식민지 국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는 종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손을 뻗어도 10대의 어린 '순분'을 나는 구해낼 수 없지만,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더 이상 '순분'과 같은 인물이 탄생하지 않도록 막아서는 데에는 사소한 몫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오롯이 그날의 기억을 떠안고 살아가는 현재의 '순분'을 위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는 일만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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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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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비난을 받는 것으로 모자라 프랑스 문단에 길이 남을 문학 소송의 원인이 된 작품인만큼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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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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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외면받던 '헬리오스'의 딸 '키르케'

'마녀'로서의 자아와 함께 깨어나다!


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이 책의 첫 문장)

"그들은 우리를 무서워하듯 너를 무서워하지는 않을 거야.(122쪽)"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키르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물의 정령 '페르세'의 장녀로 태어난 '키르케'는 티탄 신족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확실히 기존의 신들과는 다르다. 강력한 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딸은 부모에게 실망을 안기고, 수많은 가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다. 무시와 경멸을 복수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 어린 '키르케'는 너무 순진했다. 그렇게 '키르케'는 태초부터 신의 지위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인간과 신 사이 "공포의 연쇄 관계"를 깨부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키르케'는 욕망과 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질투심에 의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 여성과 질투, 그건 신화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뻔한 클리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다시피 '키르케'는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하는 신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81쪽)" 먼 친척인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어릴 때 들었던 이 한 마디는 평생 동안 '키르케'의 내면 안에서 공명하며, 그녀 삶의 주축이 되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키르케'는 신들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처참한 결과와 잘못된 행동이 불러온 수치심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방식을 택한다. 후회와 반성 등은 '키르케'가 신보다는 인간과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무너뜨려, 나는 생각했다. 무너뜨리고 다시 지어.(248쪽)

욕망과 질투가 '키르케'에게 아픔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 안에 갇혀 있던 '마녀'로서의 자아를 획득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그녀의 유일한 능력마저도 신의 능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획득된다. 신적인 능력에 비하면 마법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시도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번번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키르케'는 끈질기게 마법에 매달린다. 마법은 그녀의 생애 동안 그녀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그녀는 비로소 신에게 대적할 만한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었고, 돌아갈 만한 곳이 못 되었던 가족들을 대신해 자신의 평안을 지켜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배지 '아이아이에'에서 얻던 평안은 그러나,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반자인 고독과 또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고독한 삶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 보였던 '키르케'의 삶에 '오디세우스'와 '텔레고노스', 끝으로 '텔레마코스'가 나타나면서 전혀 다른 길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녀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 동안 갇혀 있던 땅에서 벗어나 세상과 다시 한번 연결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숱한 위협과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지만, 결론적으로 봤을 때 그건 분명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들이었다. '오디세우스'부터 '텔레마코스'를 거치면서 '키르케'는 신의 발아래 있던 시간들에 마침내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그건 남들이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춘 틀에 불과했다. 이제 그 안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다.(485쪽)" 완벽한 신이 아닌 데서 오는 괴로움, 인간들로부터 대접받는 데 느끼던 불편함, 뒤틀린 과거가 만들어낸 수치심 등은 이제 그녀를 옭아맬 수 없다. 작가 '매들린 밀러'가 '키르케'의 마지막에 관해 암시만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키르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수만 가지의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녀가 인간과 신 둘 중에 어떤 존재로서의 미래를 택하게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제 그녀는 "죽은 존재"로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키르케』가 가진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위안이다.

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다보면 별들이 일 년에 하루 땅을 스치고 지나가듯 아주 간혹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옆으로 지는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별자리와 같은 존재였다. - P198

그래도 아무 소용 없었다. 나는 혼자 사는 여자였고 중요한 건 그뿐이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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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생물 콘서트 - 바다 깊은 곳에서 펄떡이는 생명의 노래를 듣다
프라우케 바구쉐 지음, 배진아 옮김, 김종성 감수 / 흐름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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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삶이 바다에 달려 있다는 마음으로 바다를 존중하고 성심성의껏 보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바다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350쪽)


내 안의 바다, 일상에 치일 때마다 내 안에 숨겨진 바다가 나를 부른다. 사이렌 여신 같은 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손짓을 느끼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하루하루에 친구들과 습관처럼 여행에 대한 갈망을 부르짖다 보면, 이야기의 목적지는 언제나 바다였다. 반도의 어느 쪽에 붙어있든 관계없이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푸르고 탁 트인 풍경, 그리고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였다. 이처럼 사는 동안 힘이 들 때마다 바다를 도피처로 삼아왔던 점을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우리 안에는 바다가 흐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야외 활동이 어려워진 지금에도 우리는 우리 안의 바다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우리 밖의 바다가 만나는 순간을 고대한다. 바다 애호가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면서도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바다 생물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름방학이면 항상 찾아가던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충족시킬 수 없는 지금, 이참에 나는 바다 생물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저자 '프라우케 바구쉐'의 바다 탐사는 플랑크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TV 만화 <스펀지밥>에서의 적색 눈과 작은 몸뚱이로 기억되는 플랑크톤 말이다. <스펀지밥>을 비롯해 각종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보고 배운 바다 생물은 초현실적인 모습을 띠고 내게 다가와 귀여운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흰동가리, 펭귄 등 익숙하게 접해 온 생물부터 심해 생물까지 어딘가 기분 좋은 각성이 이어진다. 『바다 생물 콘서트』가 단순히 대중들을 위한 교양서적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시작점부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된다. '프라우케 바구쉐'는 각종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들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해 놓아 그야말로 바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1968년 세계자연보전연맹의 총회 연설에서 환경운동가 '바바 디오움'은 "우리 인간들은 오직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을 보호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것만을 사랑하며, 우리가 배운 것만을 이해합니다.(15쪽)"라고 말했다. '프라우케 바구쉐'의 바다 탐사에 동행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바다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는 상태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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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인간이 오롯이 쉴 수 있는 공간과 풍부한 해양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의존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들의 도 넘은 호기심과 욕심에 대한 경계는 『바다 생물 콘서트』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저자는 독자들의 해양 생태계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현재의 폭력적인 행위를 저지하고, 적극적인 해양 보호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남획, 과다한 플라스틱 사용, 기후변화, 양식업 등으로 인해 망가져 가는 해양 생태계의 현실은 지치지도 않고 인간의 죄책감을 들쑤신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쓴 '마이클 셸런버거'가 지적하듯이 생태계에 대한 죄책감과 그에 따른 반성이 '생태계 종말'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져서는 안되겠지만, 우리에게 분명한 책임이 있고 따라서 능동적인 환경 보호 실천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바다에 대한 배움을 통한 이해, 또 그로부터 비롯된 애정과 함께 바닷속을 자유롭게 누비는 날이 하루빨리 올 수 있기를, 더 나아가 내가 누린 것들을 미래 세대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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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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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전 세계 SF상을 휩쓸며 가장 주목받은 소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생태학적인 조직 '가든'과 적대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계적인 조직 '에이전시'가 벌이는 시간 전쟁의 최전선에 두 집단의 최정예 요원인 '블루'와 '레드'가 있다. '시간 가닥'을 통해 자유롭게 시간대를 넘나드는 '레드'와 '블루'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들이 주고받는 편지에 있다. 시간 여행이나 시간 전쟁이라는 SF적인 요소와 편지라는 아날로그적인 요소가 섞이고, 그 위에 문학작품이나 팝송 가사 등의 문화적인 요소가 셰프의 킥처럼 얹어진다. 게다가 '레드'와 '블루'의 편지는 우리가 아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쓰이고 읽힌다.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폭발하는 용암 위나 벌의 춤추는 몸짓 등에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새겨 넣는다. 어렵사리 상대에게 도착해 비밀스럽게 전달되는 서로의 마음은 '시간'이라는 관념을 더 애틋하고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광활한 우주로 뒤바꾸어 놓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을 통해 기꺼이 뛰어들고자 하는 시간 전쟁은 지금까지 우리가 흔하게 봐왔던 영화나 드라마 속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 안에 흐르는 바다를 느끼는 것처럼 더 거대한 무언가와 연결되려는 몸짓에 가깝다.


나는 너에게 하나의 맥락이 되고 싶어. 너도 나한테 그런 존재가 돼 주면 좋겠어.(181쪽)


SF라는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손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목을 쌓던 '아말 엘모흐타르'와 '맥스 글래드스턴'은 이를 소설에 활용하여 '레드'와 '블루'라는 두 명의 최정예 요원을 탄생시켰다. 두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탄생한 '레드'와 '블루'는 서로 다른 독립된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 '레드'가 날카롭게 잘 벼려진 칼날 같다면, '블루'는 그런 '레드'를 품을 수 있는 어머니 대지의 느낌을 풍긴다. 한편으로 그들은 허기, 혹은 욕망, 그리고 갈망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무언가를 공유한다. '가든'과 '에이전시'라는 조직의 방식에 따라 하나의 부품처럼 행동하는 개체들과는 다른 가능성을 '블루'와 '레드'는 마음속에 품고 있다. 분리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단일화된 개체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그들은 조작되어 태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나다움'에 대한 갈구는 '블루'와 '레드'가 사는 생태계에서만큼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리를 벗어나 독립된 개인으로서 '나다움'을 갈구하고, 서로를 통해 이런 허기를 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블루'와 '레드'에게 있어 서로는 허기라는 생소한 감각을 느끼도록 만들면서 이와 동시에 이를 채워줄 유일한 존재이다.



'레드'와 '블루'는 시간 가닥을 오고 가며 다양한 배역을 연기해 내고, 몇몇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그들의 임무는 작은 실수에도 미래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함을 요한다. '레드'와 '블루'가 상대 집단과의, 혹은 시간 자체와의 전쟁을 벌이는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시간'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그 연약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드넓은 시간이라는 우주 속에서 '블루'와 '레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 작지 않은 기적처럼 여겨진다. 이처럼 광활한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나다움을 표방할 수 있는 작은 우주를 만난 '레드'와 '블루'가 숙명 같은 시간 전쟁을 어떻게 마무리하게 될지에 관해서는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를 통해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외따로 존재하는 시간의 실은 단 한 가닥도 없어. (...) 가닥마다 갖가지 면모와 매력과 자극이 있고, 연결하는 방식에 따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쓸모가 있다고 말이야.(86쪽)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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