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사랑한다’(あいする)라고 내가 히라가나로 쓰는 것은 ‘make love’를 가리키는 것으로, 말하자면 내 몸으로 파파를 사로잡아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자로 ‘사랑한다’(愛)는 마음의 자유를 바친다는 것이니 이런 뜻이라면 내가 한 말은 거짓이에요.
_“내 이야기는 지저분해. 나 같은 인간의 출생, 성장, 가정교육, 인척, 가족 같은 것들을 들여다보면, 이건 뭐, 스사노오노미꼬또가 내던져졌다는 뱀투성이 구멍 같은 거야. 이런 냄새 나고 더러운 뱀에게 휘감겨 자란 인간은 가까스로 구멍에서 기어나와봤자 평생 그 냄새가 빠지질 않는 것 같아요. 가난이란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질이 나쁜 악이어서 이건 결핍이라든가 부족이라든가, 혹은 불평등이라는 것과는 다른, 다시 말해, 뭔가 모자라는 것을 더하기만 하면 회복될 수 있는 그런 결함이 아니지. 존재 그 자체의 비열함이라는 거죠. 난 한때 코뮤니스트였지만 가난뱅이의 원한 때문에 코뮤니스트가 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비열한 원한 같은 건 꿀꺽 삼켜버린 근사한 괴물이 바로 나이고, 나는 무엇보다도 지적인 충동에서 혁명의 이미지를, 그리고 파괴 후의 폐허 너머로 망령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보는 것만을 바라며 닥치는 대로 벽 허무는 일을 시작한 것이라는 식으로 믿었던 듯해.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인간의 원한과 증오에는 역시 가난뱅이의 비열함이 스며들어 있는 거야. 이건 존재론적인 원한인가, 존재적인 원한인가? 유감스럽게도 내 경우는 아마 존재적이지. 난 자신의 존재적인 비열함 속에서 몸부림치던 것에 불과했던 거겠지.”
_소설에 나오는 선의는, 땅 위 인간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고, 그것이 해풍과 태양에 그을려 굳어지면서 마침내 거칠거칠한 껍질 같은 정신을 획득한다는 식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만일 그런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무수하게 긁힌 자국이 있는 딱딱한 피부 같은 감수성이라든가, 원해는 지적인 인간 특유의 비겁함이나 연약함이 일종의 부드러움으로 변모해 남아 있는 정신이라든가, 세월의 흐름이 거친 로프처럼 온몸을 감고 있는 듯이 보이는 나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더 없이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어딘가 범죄자 같은 구석을 지니는 법이다. 거리 안의 생활이나 가정의 불빛, 요컨대 지상의 규정들을 믿지 않을 듯한 느낌을 지니고 있고, 그것만으로 이미 범죄자의 소질을 갖췄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인간에게 물려 지독한 상처를 입은 듯 보이지만 실은 인생을 배신한 것은 그들 쪽이고, 그들로서야 이 상처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추방의 낙인으로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_그보다 이것이 통상적인 남자들의 행동 원리, 혹은 차라리 행동하지 않는 원리인 것이다. 여자는 이것을 비겁의 원리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남자는 여자를 위해 만용을 발휘해야 마땅하다고 하는 뻔뻔스러운 가치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하고 여자는 말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택했을 거야. 그리고 이 원리를 의심하는 남자를 여자는 비겁하다고 정의한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했다면, 이라는 조건 그 자체가 실은 이제부터 결정되어야 할 일에 속하는 것이다. 몸속에 심장이 있는 것 같은 존재 방식으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를 택한다고 하는 행동이 있을 뿐이고, 더구나 그것은 사랑을 증명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여자는 적어도 그것을 사랑의 증거라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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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처음으로 읽은 소설은 『성소녀』였다.
책소개를 제대로 안 보고 제목과 앞부분의 야릇한 부분만 여러번 읽다말다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1장을 넘기고 2장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 소설의 진가가 나왔다. 몰입도는 장난 아니었고, 울 엄마와 같은 해에 태어난 작가의 개성넘치는 섬세한 문장들은 사소설에 빠져 있는, 일본 소설은 근대에서 멈춘 거야, 라며 다소 황당한 상상에 빠진 나를 흔들었다. 그 당시에 이런 소설을 쓰다니. 내가 진작에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도 집어던지지 않고 잘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책을 읽던 스무살 시절에 이 소설을 만났다면 여전히 못 읽어냈을 지도 몰라. 내 정신연령은 이 나이에 겨우 스무살을 이해할 정도인 듯.
하! 난 왜 그 나이에 세상을 보지 못했을까? 왜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았을까? 왜 나는 원하는 것도 없었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다시 태어난다면, 그냥 막, 살아보고 싶다. 그냥 막.
덧, 위의 문장들로 이 소설을 짐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읽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일독을 권함! 단! 소설리스트 준의 말처럼 도덕적인 사람은 읽을 수 없을 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