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첫날이었다. 친구의 생일 턱으로 맛있는 고기를 사준다는 또 다른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백만년만에 강남이라는 곳엘 갔다. 우리 집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장장 한 시간하고도 삼십 분은 더 가야 하는 거리. 필히 책 한 권은 읽어야하는 거리였다. 하여 챙겨간 책, 『눈먼 자들의 국가』이미 계간지를 통해 읽었으나 차분하게(!) 다시 읽어보겠노라, 챙겼던 책. 그러나 읽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란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세월호 참사는 상像으로 맺혔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콘택트렌즈마냥 그대로 두 눈에 들러붙어 세상을 보는 시각, 눈目 자체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 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지금으로서는 감도 오지 않는다.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충분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의연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다. 아닌 게 당연했다. 어찌 이런 글을 읽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의연해질 수 있겠느냐 말이다. 기사 아저씨 뒤에 앉아 연신 훌쩍거리며 눈물 뚝뚝 흘리다가 안 우는 척 차창밖을 쳐다보기를 몇 번. 다행이라면 옆 자리에 아무도 앉질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건너 자리의 여자가 날 쳐다보는 바람에 책을 덮고 말았다. 그들은 잊으라, 잊으라 하겠지만 아무도 잊지 않았다. 아무것도 결론난 게 없는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집에 돌아와 맘껏 훌쩍거리며 읽었다. 『눈먼 자들의 국가』가 출간하자마자 2쇄에 들어갔단 소식을 들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던 약속', 많은 이들이 지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출퇴근길에 팟캐스트를 자주 듣는 편인데 요즘 듣고 있는 것은 신형철의 팟캐스트이다. (아, 그의 방송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니 OTL 슬프다. 난 졸음을 유발하는 그의 방송이 좋았는데) 출퇴근길이 길지 않아 '신형철의 알파벳' 을 하나, 둘씩밖에 못 듣는데 오늘 아침에 들었던 것은 'F'였다. 물론 이전에 나왔던 'E' 에 관한 그의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궁금하시면 들어보시라.ㅎ) 이미 수차례 이야기한 것 같아서 이젠 말하기도 죄송한데, 단편집 좋아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단편을 요즘 선호하고 읽고 있는데 신형철 평론가의 'F'에 관한 이야기의 주인공 '플래너리 오코너'를 듣자마자 이 책을 안 살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동안 플래너리 오코너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그의 이름으로 정한 상이 있다는 정도. 그래서 이름을 말했을 때, 내가 아는 작가일세, 하다가 그의 작품은 생각나지 않아서 추리스릴러 작가인 줄 알았더랬다. 한데 알고 보니 헤밍웨이 이래 가장 독창적인 작가이며 내가 그의 이름이 익숙했던 것은 그의 이름으로 지정된 문학상이 있어서였던 것. 아무튼 신형철 평론가의 강추에 의해 읽어보기로 했다. 기대중.

 

 

아침에 출근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문자가 띠로리~왔다. 아침부터 누군가, 궁금하여 열어보았다. "오늘 구매하시면 2,000원 신간적립금 응모권 증정" 헉! 이 책은 어제 친구가 1,000원 준다고 했던 책이었는데! 오늘 사면 2,000원 준다고? 오예! 친구에게 염장을 질러야겠다. 하며 룰루랄라 출근했다. (얼마 전에 신간 나오자마자 사고 적립금 못 받았는데 이 친구는 기다렸다가 다 챙기고선 내게 염장을 질렀더랬다. 하여 복수!)

 

바쁜 일을 하는 와중에 날아온 친구의 메시지는 건성으로 보고 염장 메시지부터 날렸다. "『마담 뺑덕』, 적립금 2,000원 준대. 메~롱" 돌아온 답, "나도 받았다. 2,000원!" "뭐? 1,000원이라고 했지 않아?" "2,000원이라 했다." "우~씨, 이것들은(죄송합니다. 알라딘) 그냥 주는 걸 왜 문자를 주고 어쩌고~ 염장 질러야지, 하는 못된 생각을 하게 만들고 저쩌고~" 했더니 친구 왈, "나 염장 질러 죽여서 뭐할라구? 젓가락으로 까만콩 집는 거나 해라. 치매 예방에 좋다드라. 글고 일주일동안 준다니까, 절대 잊어버리지 마라." 아아, 이런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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