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책은 안 사야지(맨날 하는 다짐) 하고선 신간소개를 본다. 이 책은 페북에서 먼저 봐버렸다.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라는 제목이 낯설지 않았고 내 마음을 툭, 건들었기 때문인데 알고 보니 류근 시인의 시에 나온 거였다. 어쩐지 감성 살아있더라! 이 가을에 이렇게 잘 어울리는 제목을 가진 책이라니! 편집자의 짧은 책 소개와 사진을 보니 시인들이 첫사랑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태의 에세이라고 한다. 표지도 편지 봉투처럼 디자인하여 예뻤다. 친필로 쓴 글도 실렸다고 한다. 안 살 수 없게 만들었으니 나는 오늘 또 책을 사고 만다.
만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만나고 사랑하는 것. 그것만큼 절실한 풍경이 어디 있을까. 그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는 심장은 타인의 기억에서 박동하지 않는단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전 생애를 비밀에 걸었을 때에만 이루어지지. 우리는 살아갈수록 비밀이 되어야 해.(윤성택)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나 때문이야, 난 너무 멍청하구나. 속으로 몇십 몇백 번이나 되뇌었던 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자책이라는 단어를 하나 배우게 되었던 거군요.(유희경)
지금 생각하니 꿈속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분명 현실로 존재했었던 날들조차도요. 하지만 그 벽이 누렇게 변색되고 그 속의 나도 퇴색되어가리라는 것을 우린 알지요. 그리고 마침내 떼어내 버려진다는 것을요.(조윤희)
사랑의 뿌리는 아주 약하고 흔들리고 움직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잘 포개지면 그 뿌리를 공중에서도 오래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일다고 믿을래요. 그게 더 진짜 같아요.(박연준)
가을은 역시 시를 읽어야 하는 계절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병률 시인의 새 시집이 나왔다. 『눈사람 여관』, 책을 어제 받아놓고선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날씨 좋은 날, 공원의 벤치에 앉아 읽고 싶은데 시간이 안 난다. 결국엔 주말 늦은 오후 컴컴한 집, 어느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이 시집을 펼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고개 주억거리고 감상에 젖을 것이다.
(…)
달의 저편에는 누군가 존재한다고 한다
아무도 그것을 알 수는 없고
대면한 적 없다고 한다
사람이라고 글자를 치면
자꾸 삶이라는 오타가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삶의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_「면면」 중에서
나는 책 뒤편에 있는 '해설'보다는 친한 동료가 써주는 '발문'을 더 좋아하는 편인데 『눈사람 여관』의 발문을 애정하는 유희경 시인이 썼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단 한 명의 시인만 남겨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일이 다른 누군가와 조금도 관계되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다. 그저 하얀 눈밭에 세워놓은 눈사람처럼, 한 사람의 시인이 녹고 있다. 무채색의 사람이다. 존재로 세계로 스스로의 몸을 만든 그런 사람이다. _발문에서
몇 년 전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트위터를 통해 『결괴』에 관한 얘길 들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셈이다. 올해 1월 신문 인터뷰에서 “살인사건이 나면, 동네 사람들이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나 한 사람 안에도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많고 어느 쪽이 적은지, 어떤 퍼센트로 나뉘는지가 중요하죠. 내 안에 여러 모습이 있지만 내가 편안하고 안식할 수 있는 부분을 늘려가는 삶이 평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라고 한 기사를 읽었다. '나 스스로가 나를 포기하지 않게 할 거라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문학적 처방',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흥미롭다. 안 읽어볼 수 없다. 더구나 김연수 작가의 추천!
(…)
소설의 앞부분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는 평범한 인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심연에 이를 때까지. 거기서 뭔가 끔찍한 것이 툭 튀어나올 때까지.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우리 모두에게는 마음의 짐처럼 '왜일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결괴』는 이 의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을 통해 이 시대 악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놀라운 통찰에 이른다. _김연수
성석제 작가의 새 소설집이 나왔다. 제목은 『이 인간이 정말』이다. 새 소설집은 『지금 행복해』이후 5년 만이다. 8편의 단편에는 작가의 기억으로 포장된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의 문체를 알기에, 인생을 흔들만한 사건은 없어도 읽고나면 그래,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야, 느끼게 해줄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립밤을 가리키며 "그거 자꾸 칠하는 거 중독이라던데. 거기다 중독성 물질을 넣었대. 그 성분 중에서는 입술 조직을 괴사시키는 것도 있다더라고."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남자가 가고 난 뒤 여자는 길게 한숨을 내뿜은 뒤 언제부터인가 되플이해서 말해온 듯한 문장을 발음했다.
"됐다 새끼야, 제발 그만 좀 해라."
_「이 인간이 정말」 중에서
어쩌다 나는 당신들이 좋아서 이렇게 또 책을 샀다. 9월이 지날 때까진 절대로 안 사려고 했건만, 좋으면 어쩔 수가 없는가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