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조금 쌀쌀했다. 어, 이제 가을이 왔나보다 생각하며 가을에 관한 시를 하나 찾아 읽어야지, 했다. 책꽂이에 꽂힌 시집을 하나씩 펼쳐보다가 '가을'은 못 찾고, '시인의 말'에 꽂혔다. 하나하나 맘에 들어오는 '시인의 말', 다 적고 보니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선천적' 시인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우리는 상처를 만드는 사람이면서
치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처를 받은 사람이면서
자신을 힐난하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을 바친다.
징후와 예후만으로 이루어진
위독의 자리마다
모든 과장과 생략과 시치미.
진짜 같은, 의 핵심은 같은인데
진짜 같은 공포와 피로가
살갗에 제 발자국을 마구 찍는데
진짜는 없고 발자국만 있다.
위독의 자리,
훌륭한 칼잡이가 된다는 것.
훌륭한 칼놀림이란
죽이면서 또한 구하는 것.
그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_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_류근, 『상처적 체질』
봄날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꽃다발 한목숨 바치는 것으로 될까!
훗날 훗사람을 위해
우리들 다 바치는 것으로 될까!
그래도, 그러는 사이에도
한세상 또 한세상
말없이 누구나 단풍 들고 낙엽 지고
말없이 봄볕 들고 새순 돋는다는 다정한 말,
나는 믿는다!
첫 울음소리 다시 들리는 날이다.
_이사라, 『훗날 훗사람』
(……)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였다.
_이정록, 『정말』
내 슬픔에게 접붙인다.
감히 나는 이 가을이 너무 좋구나
감히 나는 살아 있구나
감히 나는 너를 사랑하는구나
감히 나는 눈물을 떨구는구나
감히 나는 목숨이 저 봄 같기를 소원하는구나
감히 나는 시시하구나
감히 나는 안녕하구나
감히 나는 시를 쓰는구나
부러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존재로 인해 고통받았던 여인들
무덤 속에 있는 엄마와 태백에 있는 엄마
내 삶과 죽음의 공양주 보살들에게
‘감히’이 시집을 바친다.
_안현미, 『이별의 재구성』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은 아름답다
그런 추억일수록
현실을 누추하게 관통해야 한다
모든 기억은 추억으로 죽어가면서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_윤성택, 『감(感)에 관한 사담들』
결국 영원으로부터도
또한 순간으로부터도
우리는 소외되었다.
언제부터 너였는지 모르고
언제까지 나일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새가 나는 법을 버리고
다만 나는 것처럼
어떤 약속도 바람도 없이
다만 시작되기를.
_신용목, 『아무 날의 도시』
가을, 나직하게 옷 속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여전하구나
이곳에 온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
절름발이가 되었고
허리도 굽었지만
(……)
언덕 끝까지 이어지는 길
돌 하나
모든 곳에 함께 있었던 하늘
그래서 지금, 여기 모두들
있어줘서
고마워
_곽은영, 『불한당들의 모험』
수십 개의 단어와 한 사람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
나는 아직도 이런 일을 생각한다.
_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_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어떤 밤에 우리는
연필의 검은 심을 모질게 깎고
이 고독한 밤을 바꿀 수만 있다면
이 고독한 밤을 바꿀 수만 있다면
서로의 얼굴을 백지 위에 갉작 갉작 그려 넣으며
납득이 가지 않는 페이지는 찢었다
_황병승, 『육체쇼와 전집』
(……)
간신히, 희망!
정말 희망은 우리에게 마지막 여권, 뿌리칠 수 없는 종신형인가 보다.
_김승희, 『희망이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