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시인선 30
이승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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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시집을 보여줍니다. 페이지마다 접힌 시집,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비슷한 듯 아닌 듯한 취향이지만 시집에 있어서만은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편이라 귀를 쫑긋하고선 아 그래? 그렇다면 읽어보겠다며 그날 저녁 바로 시집을 펼쳤습니다. 목차에 나온 시 제목부터 남다른… 역시 이번에도 그 친구와 나는, 통했더군요.

 

시에 관해 얘기를 할 때면 늘 이렇게 말합니다. 시를 잘 몰라요. 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이 시가 왜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읽는 시마다 제 마음 한 구석을 콕콕 찌르더군요. 시인의 말부터 그랬어요.

 

정직하게 울었고

맨드라미가 피었다.

그랬단다, 아가야

솔아

 

사실은 이 문장 때문에(물론 ‘승희’라는 이름도 한 몫 했습니다) 시인이 당연히 여성이라고 단정을 하고 읽기 시작했어요.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였고 난 아이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시인의 저 말에 괜히 마음이 차분해졌어요. 이후 모든 시에서 ‘내’가 되어 감정이입이 되더군요.

 

시집을 펼쳐 1부에 들어가면서부터 저의 밑줄은 시작됩니다. 친구의 빼곡하게 접혔던 시집이 떠오른 것은 당연하고요. 놀랄 일도 아니었어요. 시를 읽을 때면 항상 현실의 상황과 비슷하거나 경험들이 떠올라 공감을 하게 되는데 요즘의 나를 생각하면 굳이 슬퍼할 일도, 쓸쓸해할 일 틈도 없었기에 내가 왜 이 시집에 이토록 빠지는 걸까, 어색할 뿐이었죠.

 

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_맨드라미는 지금도

내 몸 어딘가에 산기슭처럼 무너진 집 한 채 있다면 그 옆에 죽은 듯 늙어가는 나무 한 그루 있겠다.(…)당신이 나를 절반만 안아주어도 그 절반의 그늘로 나 늙어가면 되는 거라고./그러면 나 살 수 있을까?/내 몸 어딘가에 나 살고 있기나 한 걸까?_제목을 입력하세요

(…)고개를 돌린 채 늙는 일에 열중이신 늙은 토마토는 오늘도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읽는다. 늙는 일도 아직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_늙은 토마토는 고요하기도 하지

(…)날 버린 마음들 환하게 불빛으로 켜지고, 마음 없는 몸은 창백하게 앉아 뼈를 깎는다._봄비는 그렇게 내린다.

 

하, 여기까지 읽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사랑하는 누군가와 독한 이별을 한 걸까? 왜 시들이 이렇게 쓸쓸하고 슬픈 걸까. 그래서 시 감상을 뒤로 하고 순서가 바뀌었지만 해설부터 읽고 말았죠. 알아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일단 시를 감상한 후에 읽어야 하는 거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가끔은 해설을 읽은 다음에야 시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니까요.

 

“쓸쓸함은 낡아서 쓸모없어지거나 버려진 존재로부터 비어져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려 바닥난 존재의 상실감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마치 거울을 보다 문득 마주하게 된 눈가의 주름이나 기미처럼, 책갈피에서 우연히 발견한 번진 글씨 자국처럼 낯설고 우울하고 쓸쓸하다.(…)‘늙음’과 ‘죽음’에 대한 사유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무언가를 상실한 ’나‘는 시집 전체를 지배하는 시적 주체이다.”_이경수(해설중에서)

 

아, ‘늙음’과 ‘죽음’

 

그제야 조금 시를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더군요. 시 전체를 아우르는 쓸쓸함은 죽음의 그림자와 늙음의 사유들이었어요. 다시 앞으로.

 

(…)나의 절망은 비루하였고, 꽃이 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네가 떠나간 흔적처럼 남았다.(…)_다시 봄비는 내리고

(…)어제 꽃피지 못한 하루는 버려진 채 빛날 것이다. 무릎을 모으고 나를 기다리는 저 그림자의 검은 입 속으로 난 무엇을 앞세울 수 있을까.(…)_그림자들

외로운 것들이 갈수록 착해지는 게 싫어서/비명이 말랑해지도록 내버려두는 건 죽기보다 싫어서/버려진 것들은/낡아지지 않고 죽어버리라고/종일 휘파람을 불었다.(…)_110-33

(…)내가 꿈꾸는 것은 매일 조금씩 지워지는 것.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를 덜어내는 일(…)_부치지 못한 편지

 

정말이지 어느 시 하나 그냥 넘길 수가 없더군요. 내가 이토록 공감하는 이유가 뭘까, 왜 그러는 걸까. 물론 감수성이 짙은 시나 문장들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 한 편도 빠짐없이 밑줄을 그어대는 경우는 없는데 이 시집에선 그랬습니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너무 멀리 왔다는 말/쓰러질 곳을 찾지 못해/비가 되지 못한 바람 같은 거라고/우체국 소인처럼 찍힌다_어느 여름날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거지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밤. 난 내 우울을 펼쳐놓고 놀고 있다. 아주 나쁘지만 오직 나쁜 것만 세상에 없다고 편지를 쓴다._여름의 우울

수시로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잃어버리곤 해. 가만히 내 몸을 내려다볼 때 참 쓸쓸해. 골목 어디쯤을 휘청이며 걸어가는 내 마음을 만나는 저녁. 내가 울지 못하는 이유는 내 몸에 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불안하기 때문이야._여름의 대화

(…)사는 게 처음부터 상처 나는 일이었다고 맨드라미가 빨갛게 피었다._맨드라미가 피는 까닭은

(…)내가 버려진 상자가 되는 것은/정말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입니다_맨드라미 정원

 

곰곰 시들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왜?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죠. ‘(…)빈방처럼 나이 드는 일은, 마음의 한끝이 자꾸만 투명해지는 거라고(…)’ 와 같은 시구에 밑줄을 긋는 나를 보면서 ‘늙음’, 나를 공감케 한 것 것은 ‘죽음’보다는 ‘늙음’이라는 것을. 늙는다는 것에 대한 그의 사유들에 아, 그래!

 

나이와 상관없이 이제 내가 늙는구나, 늙었구나, 아니 늙어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싶습니다. 연말이 되어 한 달 후면 찾아올 또 다른 숫자에 대해 겁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말입니다. ‘늙는 일도 아직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이며 ‘지금은 늙어가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할 때’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어두워지는 저녁 오늘의 죽음이 내일을 열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 즐거운 불안에 대하여’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늙음’도, 그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 올 ‘죽음’에 대해서도 좀 관대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 행복하여라

_이승희

 

외로움은 나의 밥, 찬 없이도 먹을 나의 끼니. 내 소망은 세끼 밥과 야식까지 골고루 야무지게 잘 챙겨 먹는 것. 외로움으로 살찌는 일. 그리하여 외로움 하나만으로 나 풍성해지는 거짓말 같은 생. 나 이제 외로움의 식구를 얻었으니 함께 먹고 또 먹어 배 터져 죽고 싶다. 버석거리던 날들이 외로움의 독을 입어 이리 촉촉하니 축복받음 아닌가. 날마다 독이 퍼져 이 저녁의 숨소리 그윽하구나. 외로움이 서 있는 그 자리. 거긴 원래 미루나무가 오래 서 있던 자리. 딸 아이 날마다 학교 가던 길. 지치고 아플 때 하염없이 집을 바라보던 길. 오늘도 집 나간 마음은 기별 없으니 기다림으로 접혀진 마음자리는 쉽게 찢어지고, 마음 없이도 몸은 자주 아프고, 마음 없이 병든 몸은 가난한 세간 옆에서 쓰러져 잠들고, 그리운 것도 없이 살 수 있다니, 오 놀라워라 거짓말 같은 나의 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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