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많은데 이번에 제대로 실천에 옮겼다. 내가 가지고 간 책은 시집이다.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시집 속에 나오는 시들은 그냥도 너무 좋았지만 미황사와 관련된 시들은 고즈넉한 그곳에 가서 읽었더니 더욱 감동이입이 되어 좋았다. 앞으로는 여행을 떠날 때 꼭 그곳과 관련한 책을 찾아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나?! 그래서 책 대 책을 구상하며 떠오른 주제, 책을 읽고 떠나다, 훗! 좀 웃기지만 어쨌든 책을 읽었는데 그곳을 궁금하게 만들었던 책들을 골라봤다. 

 

따끈따끈한 이 책『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유배객의 자취를 찾아 섬을 탐방,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묶은 책이다. 14개 유배의 섬에서 살았던 유배객들의 삶을 좇았다고 하는데, 처음 이 책을 실물로 보기 전에는 솔직히 그냥 그런 역사 이야기인가보다 했다. 한데 직접 책을 보니, 오홋! 역사도 역사이거니와, 그곳을 직접 다니며 찍은 멋진 사진과 짧게는 20여일부터 길게는 27년이라는 긴 시간을 섬에 머문, 유배객들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괜찮았다. 유배객들 중엔 유배지에서 편안하게 대접받은 객이 있는가 하면, 먹을 것을 구걸하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야 했던 객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절해고도에 유배당한 처지는 같았으나, 그곳에서의 삶의 모습은 달랐던 것. 
유배는 기본적으로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무기형이란다. 권력의 변화가 없는 한 대부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자청해서라도 유배를 떠나기도 싶겠지만(도시에서의 혹독한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은 자들!) 그 시대 유배의 섬은 절망의 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 유배객들은 절망의 섬에서 살아내야만 했으므로 고독과 단절 속에서 자신을 단련시키고, 분노를 학문으로 승화시킨 경우가 많았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위대한 박물학 저서인『현산어보』와 소나무 벌목을 비판하는 『송정사의』를 남겼고, 노수신은 19년의 세월 동안 진도에 살면서 그 분노를 학문으로 삭여 훗날 화려하게 조정으로 복귀해 남은 생을 대학자로 행세하였단다.
이러한 각기 다른 섬, 다른 사연, 다른 기간이었지만 이 책의 공통점은 바로 궁벽한 땅, 섬을 알린 것. 위도를 알린 이규보, 거제도의 고절치라는 지명을 남긴 이행, 나로도를 아름다운 글로 빛낸 조관빈, 백령도를 기록한 이대기 등등 그들 유배객들이 없었다면 그 섬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풍요로운 이야기를 전해줄 수 없었을 것.
그나저나 휴가 다녀온 첫날인데, 이런 책을 만나고 말았으니 그 섬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또 생기고 말겠다. 

 

섬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14개의 섬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생계형 낚시꾼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한창훈 작가이다. 그가 십여 년 동안 펴낸 책엔 섬과 바다 이야기가 늘 들어가 있다. 그렇더래도 막상 떠나고 싶은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작년에 읽고 나면 그곳으로 떠나고 싶게 만들었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에세이이다. 이 책은 유배를 떠났던 정약전의 『자산어보』(『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에서는 『현산어보』로 나온다.)를 기본으로 거문도에서 나는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작가 특유의 위트로 재미있게 다룬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 거문도라는 곳에 가고 싶어했을 것이다(그러나 대부분 횟집으로 달려가고 말았겠지만;).     

 

김태정의 시집을 들고 미황사를 다녀온 나는 이번엔 매창이라는 기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곱게 늙은 절집』을 읽으면서 만났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부안에 있는 개암사가 궁금해졌다. 매창은 허난설헌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시집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허난설헌이 규수 시인이라면 매창은 황진이와 같이 기녀 시인으로 뽑히는데 황진이의 경우 시가 많지 않아 시집으로 묶을 수 없지만 매창은 묶을 만큼의 분량이 된단다. 그래서 알게 된 『매창 시집
여기저기 이 시집은 절판이거나 품절이어서 구할 수 없는가, 했는데 마침 올 5월에 개정증보판을 낸 시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시집을 받아들고 보니 부안에 있는 개암사가 다녀오고 싶어졌다. 김태정의 시집과 다르게 개암사에 관한 시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개암사와 관련된 것은 매창이 세상을 떠나고 58년 뒤에 부안현 아전들이 58수의 시를 편집해 개암사라는 절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목판본 글자가 뭉개질 정도고 찍어도 공급이 딸려 매창의 시를 사랑하던 부안 선비들이 필사까지 해서 읽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주말엔 『매창 시집』을 들고(어쨌든 섬들보다는 훨씬 가기가 편하니까) 개암사를 갈 생각이다.  

 

그동안 책을 읽고 나면 떠나고 싶었던 곳이 외국 소설 속에 나오는 다른 나라이거나 도시였다. 아마도 문학의 고향을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위의 책들처럼 우리나라에도 읽고 나면 가고 싶은 곳이 의외로 많다. 문학적 의미로서 혹은 역사적 의미로서, 아니면 문화적 의미로서 찾아가고 싶은 곳. 그런 곳들을 찾아 다니는 것은 맛집을 가기 위해 그곳(!)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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