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인지 피곤이 누적된 것인지, 우울의 연속. 자꾸만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멍 때리기만 하고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날아온 메일 속 시집 한 권, 마음을 확, 사로잡네. 구매 버튼 눌러버리고 시집 오기만 기다린다. 언젠가 친구가 이 시인의 시집이 좋다고 추천해주었던 것 같은데 그냥 지나쳐버렸더랬다. 우연히 시인의 낭독도 들어본 것 같은데 역시 시에 대해선 무지한지라 어느 순간 내 맘에 들어오지 않으면 관심이 없는 듯. 아무튼 메일 속에서 본 시집에 눈길이 갔다. 우울할 때는 시집을 읽어주는 센스. 그게 젤 좋은 방법 같다. 긴 글을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소설 속 내용을 이해하려 해도 안 될 때는 역시 시집이 장땡.  

눈앞에 없는 사람》을 사면서 친구가 추천해준 《슬픔이 없는 십오 초》도 같이 샀다. 그러고 보니 둘다 '없는' 이 들어가는 제목. '슬픔' 도 없고 눈 앞에 '사람'도 없는... 움, 좀 쓸쓸한 것 같은데... 젠장, 이 시집 읽고 더 우울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우울을 없애기 위해 사서 읽고 더 우울해지면 곤란한데 말이다. 시집 소개를 보다가 누군가 밑줄 그은 눈에 들어온 시, 

(…) 그날 큰 눈이 그치고/쌓인 눈은 조금씩 얼음의 두께를 더했네/다음 번 내릴 눈에 대해/호수는 걱정을 덜었으나/그때 우리의 심약한 마음은/미래를 자주 떠올리며 쩡쩡 금이 갔네/그때 참 짦은 연애였는네/우리는 너무 많은 산책을 했네/그날 큰 눈이 내리다 그쳤네/그날 큰 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네/우리의 마지막 산책이었네/그때는 알지 못했네 (_그날, 그때, 산책)

그리고 언젠가 계간지에서 봤던 그 시, 

(…)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  (_인중을 긁적거리며)

이 정도로도 시집은 좋다고 혼자 생각함. 

음악 없이 종일 지내 보니 마음이 불안해진다. 할 수 없이 주변 분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한쪽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귓속으로 노래가 들어오니 마음이 평안해진다. 점심 때 입맛이 없다며 밥을 남겼다. 아무래도 내 몸무게가 몇 킬로인지 재봐야겠다. 거의 대학 때 몸무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꺄~오!(그러나 슬픈 사실, 나이 땜에 오는 뱃살... 밥만 먹으면 다시-.-;)  

뒤표지 시인의 산문도 눈에 들어옴 

오늘 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건너온, 물방울 속에 뭉쳐 있는 당신의 전언을 펼쳐 읽습니다. 안타깝게도 법과 규칙의 말들은 죄의 무릎과 무릎 사이에 놓인 순수함을 보지 못하는군요. 세계의 단단한 철판 위에 이성의 흔적을 새기는 사람들. 물의 말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죄악의 틈새에서 잠들고 자라나는 어린 영혼을 보고는, 아이, 불결해, 눈살을 찌푸리기만 하네요. 하지만 물방울로 이루어진 당신의 말은 그 영혼을 투명하게 비춰주는군요. 물방울로 오로지 물방울로 싸우는 당신. 물방울의 정의를 행사하는 당신. 판결과 집행이 아니라 고투와 행복을 증언하는 당신. 당신은 말하죠. 인간은 세상의 모든 단어를 발명했어요. 사랑을 제외하고요.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예요. 그러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죠.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럼, 잘 자요, 당신, 내 사랑.
 

아아 시인들은 정말 말도 잘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오래오래 전에 시를 배울 것을 그랬나보다. 아니 지금도 늦지 않았겠지. 울 외숙모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하시고 시집도 내셨는데... 못할 게 뭐람. 아, 근데 내 최대의 단점, 감수성만 너무 풍부하여 쓰다 보면 찌질해지고 만다는 사실. 에잇,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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