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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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외국에 있는 친구의 언니 집에서 보름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한국보다 물가가 싼 덕분에 가족 수에 비해 집이 큰 편이었고 더운 나라인지라 방마다 욕실이 하나씩 딸려 있었다. 한국하고는 다른 구조의 집을 구경하며 마치 호텔에라도 묵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면에는 집 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던 가정부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이 가정부는 근처 다른 나라에서 온 어린 여자였다. 마치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식모'의 개념인 셈이다.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려고 온 소녀 가장. 그녀가 하는 일은 <헬프>에 나오는 미니의 일과 비슷하다. 나름대로 스케쥴을 짜서 월요일엔 집 안 모든 창문을 닦고, 화요일에는 침대 시트를 세탁하고 풀을 먹인다. 또 '매일 아침 씻기는 하지만 욕조를 반들반들 닦'기도 한다.  

호텔에라도 투숙 했더라면 그런 모든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한국의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살며 내가 밥차려 먹고 설겆이하면서 살다가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가정부의 대접을 받으니 솔직히 좌불안석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언니는 도와주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건 가정부의 일이라는 거다. 나름대로 규칙인 셈이다. 캐스린 스토킷의 <헬프>는 그런 가정부의 이야기다. 내가 가정부를 보는 입장이 아니라 가정부의 입장에서 겪은 이야기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가정부하고는 좀 다르다.  

<헬프>에는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 차별이라는 주제가 들어 있다. 놀란 것은 1960년대의 미국에서 그토록 심한 인종차별이 있었다는 거다. 내가 생각한 인종차별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잡아와 짐슴만도 못한 취급을 하며 일을 시킨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근데 불과 몇 십 년 전에,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와 차별을 규정한 법(남부 짐 크로 법)이 존재했다는 사실. 1965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는, 이 놀라운! 아니, 어쩌면 나만 몰랐을까? 어느 나라에나 인종차별만한 계급 사회도 있었는데 그런 법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었을까? 그렇더라도 미개한 나라도 아니고 미국이라는 곳에서?! 

<헬프>는 그때의 이야기다. 남부 미시시피 주, 세계가 비틀즈에게 빠져 있을 때, 케네디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지내던 그 무렵. 머릿속으론 그런 시대적 상황과 도무지 매치가 안 되는 일들이 미시시피 주, 잭슨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를 갈라놓은 법이 얼마나 많은지 아연해져서 나는 총 스물다섯 쪽 중 네 쪽을 내리 읽는다. 흑인과 백인은 분수도, 영화관도, 공중 화장실도, 야구장도, 전화박스도, 서커스도 공유할 수 없다. 흑인은 나와 같은 약국에 가지 못하고 같은 창구에서 우표를 사지 못한다. 예전에 우리 가족이 콘스탄틴을 데리고 멤피스트로 놀러 가는 길에 고속도로가 거의 빗물에 잠겼는데도 호텔에서 콘스탄틴을 들이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우리는 쉬지 않고 곧장 차를 몰아야 했다. 아무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모두 이런 법의 존재를 알면서 이곳에서 살아가지만, 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을 활자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미시시피 주 어느 곳이나 그랬겠지만 잭슨도 인종차별이 심했다. 아니, 인종차별을 했다기보다는 그들 백인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이었을테니. 선을 그어놓고 이곳은 백인, 저곳은 흑인. 이 선을 넘으면 절대로 안 돼!  

이야기의 시작은 유색인 가정부 아이빌린의 목소리다. 아이빌린이 일하는 미스 리폴트의 집에서 매달 넷째 수요일 브리지 게임이 있다. 모이는 사람은 초등학교부터 친했던 힐리(그녀의 엄마와), 엘리자베스, 스키터. 그날 손님 욕실을 사용하게 된 힐리가 유색인들이 쓰는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가정부 위생 발의안'이라나 뭐라나. 즉, 유색인들에게 질병이 옮으면 큰일난다는 취지다. 물론 타운의 대부분의 백인 집엔 화장실이 따로 있단다. 하지만 집 밖에 화장실을 만들어 그곳만 사용하게 한다는 발상이라니. 그렇게 결정해버린 힐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화장실을 짓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갈 무렵 다른 두 친구와 다르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스키터가 아이빌린에게 예전에 스키터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던 콘스탄틴에 대해 물으면서 슬쩍 말한다.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 해본적 있어요?"

그리고 발단은 스키터가 '하퍼 & 로'출판사의 편집자인 일레인이 아이디어를 써서 보내면 원고를 검토해보겠다고 하자 자신감을 가진 스키터가 '잭슨저널'의 한 칼럼을 맡게 되고 그 일에 아이빌린의 도움을 받으면서부터다. 일레인에게 뭔가 멋진 아이디어를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스키터는 경계를 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 일레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유색인 가정부의 경험담을 써서 보내겠다고. 관심을 보이는 일레인. 스키터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일을 저질러고 만다. 그리고 그녀를 도와줄 유색인 가정부를 찾게 된다. 바로 아이빌린. 

<헬프>의 화자는 세 명의 여자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목표로 고향에 오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진 백인 미스 스키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후 가정부를 천직으로 살고 있는 아이빌린, 그리고 입바른 소릴 잘하고 욱하는 성격을 지닌 미니. 두 여자는 유색인 가정부이고 미스 스키터는 백인 가정의 잘 자란 여자다. 자신의 열망 때문에 원고를 써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어느 유색인이 남부에서, 그것도 인종차별이 제일 심하다는 미시시피 주 잭슨에서 자기가 일하고 있는 백인 가정에 대해 왈가왈부 할 것인가. 그랬을 때 일어나는 일은 교도소에 가지 않으면 죽음 뿐이었다. 한데 처음엔 거절했던 아이빌린과 미니는 결국 승낙하고야 만다. 그건 하나의 작은 복수에서 시작한 셈이다. 힐리라는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를 향한. 

작가의 말에 캐스린 스토킷은 퓰리처상을 받은 하웰 레인스의 기사를 인용한다.

남부 출신의 작가에게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에서 사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애정보다 더 아슬아슬한 주체는 없다. 정직이 기반이 아닌 사회에서는 모든 감정이 의심스럽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정직한 것인지, 동정인지, 실용주의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어쩌면 미시시피 주 잭슨에 관한, 이 책 <헬프>에 관한 그녀의 생각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든 어쨌든 그녀가 태어난 곳은 남부이고 그곳에서의 일상은 하웰 레인스의 기사처럼 정직인지, 동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실용주의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캐스린은 확신한 것은, 1960년대에 특히 그곳 미시시피에서, 흑인 여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히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흑인 여자에게 급료를 주는 백인 여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이것이 책의 핵심이 아니었나? 여자들이 우리는 그저 두 사람이야, 우리를 가르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어, 하고 깨닫는 것.

오래 전에 공지영 작가의 <봉순이 언니>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책이 느낌표에 선정되기 전이니까, 아마도 책이 출간되자마자 읽었을 것이다. 스토리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도 짱아처럼 어릴 때 일을 도와주던 언니가 있었기에 짱아의 시선으로 책을 읽으며 매우 공감을 했었던 것 같다. 공지영 작가는 <봉순이 언니> 개정판을 내면서 처음으로 짱아가 아닌 봉순이 언니의 시선으로 책을 읽었는데 부끄럽지만 큰 슬픔으로 목이 메었다고 했다. 

<헬프>의 캐스린 스토킷 역시 작가의 말에서 어릴 때 그녀를 돌보아주던 가정부 디메트리에 관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미시시피에서 흑인으로 살면서 백인 가정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물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웠고, 그 아쉬움이 <헬프>를 쓰게 한 이유였다고 토로한다. 그건 아마도 인종을 떠나 '차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공지영 작가가 '봉순이 언니'의 시선으로 글을 읽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 자라고 보니 그들에게 가정부라는 존재는 핏줄도 친구도 그 무엇도 아니지만 자신을 사랑해주고 돌봐준 사람으로 기억되며, 이유없이 부끄러워지고 감사하게 되니 말이다. 

자칫, 고루한 1960년대의 미국 남부, 그것도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에 책을 들었다 놓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흑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마당에 웬 인종차별. 하지만 이 책은 그 너머가 있다. 저 무지개 너머 마음으로 꿈꾸면 정말로 이루어지는 곳이 있듯이. 인종차별의 벽을 너머 이제 막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아이빌린과 스키터, 그리고 미니, 그들이 이루어낸 놀라운 이야기. 그걸 놓친다면 분명 후회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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