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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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를 이끌어갈 젊은 작가, 그녀를 모른다면 한국 소설을 모른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동안 나온 소설집을 모두 읽었고 최근에 젊은작가상을 받은 단편도 읽었다. 한데 내 맘에 들어오진 않았다. 김애란의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난 좀 우울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소설 속에 내보이는 쓸쓸함에 공감을 했을테고 왜 그녀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아무리 희망와 이상을 은근슬쩍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왜, 우리나라 이십대들은 다들 이렇게 비루하고 우울한 거야. 세상 다 산 사람들 같잖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관심은 있으나 관심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런 내게 김애란은 이번에 제대로 뒤통수를 쳐주면서 이제 좀 관심을 가져보시지? 했다.  

책도 나오기 전에 가제본을 받았다. 작가의 첫 장편이라고 하니 궁금하기도 했거니와(단편만 쓰던 작가들의 첫 장편은 누구든 궁금하기 마련), 제목에서 뭔가 두근거림이 있었다고나 할까, 책소개를 봐서는 어쩐지 내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난 눈물나게 하는 내용들 싫어 한다. 그러면서도 읽어대는 내가 더 싫지만) 내용이 담겼을 것 같았는데 그냥 끌렸다. 읽어봐야할 것 같았다. 그냥 그랬다. 가제본을 받은 날, 배가 고파 퇴근을 하자마자 가장 빨리 되는 저녁으로 라면을 먹을려고 물을 올려두고 프롤로그를 읽고(그것만으로도 콕콕)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근데 어랏,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어릴 적 처음으로 발음한 사물의 이름을 그려본다이것은 눈(雪), 저것은 밤(夜), 저쪽엔 나무, 발밑엔 땅, 당신은 당신…… 소리로 먼저 익히고 철자로 자꾸 베껴쓴 내 주위의 모든 것. 지금도 가끔, 내가 그런 것들의 이름을 안다는 게 놀랍다. "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때부터였다. 저녁을 먹을려고 올려놓은 물을 내려놓았고, 사다 둔 떡을 입에 문 채 정신 없이 읽기 시작했다.  

아이의 독백과도 같은 이야기. 아이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제 부모가 어찌하여 자신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팔삭둥이로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마치 그 아이가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듯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뭐랄까, 마치 두번 다시 말하지 못할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그런 아이의 독백과는 다르게 은근 유쾌하기까지 한 스토리를 읽으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 쿵, 쿵. 이것, 너무 두근거리잖아. 왜 이래. 하는 생각?!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소설들은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야. 아마도 내 맘 한구석을 콕콕 쑤실 그런 것.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있잖아, 자꾸 슬픈 노래가 좋아진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슬픈 노래는 술 먹고 듣는 노래야. 그러니까 너도 어른이 되면 발라드는 무조건 술 마시고 들어라, 알았지?" 
"네, 아빠."
나는 얼마 안 남은 이를 드러내며 상긋 웃었다.
"아빠."
"엉?"
"지금 슬퍼요?"
"응."
"나 때문에 그래요?"
"응."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답했다.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아빠?"
"응?"
"전 이미 아이인걸요."
"그래, 그렇지……"   

젠장, 이럴 줄 알았다. 시작부터 왠지 가슴이 아려온다, 했다. 하나도 슬프지 않은 척 위장하고 있었지만 읽는 문장마다 촉촉함이 배어있다. 결국 눈물 뚝뚝 흘려주었는데 이 씩씩한 소년, 오히려 날 위로해준다. 이 만한 일로 무슨 눈물을. 그리고 찾아온 소년의 사랑.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뭔지 잘 모르지만, 뭔가 시작되려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도망치려 했던 '시작'이 다시 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설렘과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지켜야겠다는 마음도 강하게 들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하느님께서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시는 이유는 내게서 뭔가 빼앗아 가실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선물인지 시험인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내 쪽에서 한전 더 신호를 보내야 했다. 며칠 뒤, 나는 결국 그애에게 두번째 답신을 보냈다. 편지 한 통쯤 더 쓴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을 뿐더러, 나 역시도 끄덕하지 않으리란 자신을 갖고서였다.  

아빠가 아빠가 되었던 그 나이가 된 소년은 열일곱, 사랑이 찾아올 만했다. 두근거리며 시작된 사랑. 내 마음도 덩달아 두근거렸다. 주고받는 메일,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진심이 통하는 '소통'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겼을 것을, 말 그대로 내가 뭔가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손이나 발이 아니라 '마음'을 사용해서 한 일…… 그게 또 '마음'이라, 처방할 약으로는 상대의 '마음'만한 것이 없는……" 그런 사랑.  

어느새 밤이 깊어버렸다. 다 읽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았지만 깜빡 졸다가 새벽에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 새벽부터 눈물 뚝뚝 흘리고, 출근길 버스 안에서 고인 눈물 어찌하지 못하여 차창만 바라보고. 우씨, 뭐 이런 소설이 다 있어. 욕을 해대며 읽었다. 결국, 끝까지.  

왜 이렇게 이 책에 홀릭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취향이거나 내 감정이 이 책과 잘 맞았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어리지만 가장 늙은 자식이 된 씩씩한 소년(아프면 어른스러워진다더니 마치, 그런 것처럼)과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바로 늙어버린(!) 가장 어린 부모, 엄마와 아빠, 나이가 들었으나 아이 같은 장씨 할아버지와 어쩌면 소년에게 행복을 주었을지도 모를 빌어먹을(!) 소녀까지 날 웃기고 울렸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 부록으로 실린 <두근두근 그 여름>을 읽으면서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맘 먹었다.  

열일곱, 한창 들뜨고 행복할 나이,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었)을 상처 혹은 사랑이 찾아올 나이, 세상 모든 것에 '두근두근'거릴 그 아름다운 나이의 소년을 만난 것은, 내게도 두근거릴 하나의 추억이었다.《두근두근 내 인생》, 멋지다!   

약하고 희미했지만 분명 거기 있는 소리였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파동 안에 머물렀다. 그 자장 끝, 맨 나중에 그려지는 동심원이 토성 주위의 고리처럼 우릴 오목하게 감싸주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말한 방법이란 누군가를 힘껏 안아 서로의 박동을 느낄 만큼 심장을 가까이 포개는 거였다. 순간 나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아버지를 두 팔로 감싸안았다.
"누구하고라도요?"
"그럼, 누구라고라도."
그런 뒤 마치 아픈 아이를 다독이듯 아버지의 등을 두드리며, 아버지의 말을 똑같이 따라했다.
"이렇게, 이렇게."
그러자 아버지는, 누군가의 메아리를 들려주기 위해 처음부터 거기에 있던 산(山)인 양, 내 앞을 커다랗게 가로막은 채, 내 앞을 든든하게 둘러싼 채, 조금 전, 당신이 하고, 내가 한 말을, 나지막이 중얼댔다.
"이렇게." 

그리하여 한 번 더, 그리하여 여전히, 먼 곳에서 ----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에게로. 아버지에게로. 어머니에게로. 나는 그 바람이 좋아, 얼굴 위에 주름을 한껏 드러낸 채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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