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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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포일러!!!

아무런 이유없이, 제목이 주는 매력 때문이었다. 매년 11월이 지날 무렵 "앗! 또 못 읽었네." 하기를 두어 번. 올해는 왠지 11월이 되기도 전에 이 책이 생각났다. 그리고 11월이 되자마자 알 수 없는 의무감에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연애소설이거니 하고 책을 펼쳤다. 

분명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순간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한 말 같았다. 내 목소리가 그대로 메아리쳐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다른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편의 회사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은 베르톨트를 처음 본 것은 시상식 파티에서였다.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어떤 운명에 이끌린 사람처럼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날 밤 마리안네는 베르톨트를 따라 집을 나선다. 남편도 자식도 모두 남겨둔 채. 

이건 뭘까? 마리안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베르톨트가 한 저 말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말 한마디에 처음 본 남자를 따라갈 수 있는 거지? 아니 그럴 수도 있는 걸까?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그 운명적인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결국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시아버지의 편지를 받고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전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러려니, 막연히 모든 일이 잘 풀리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잘못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할 시간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생각할수록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간단했다. 사람들은 말하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갔는데, 그렇게밖에 더 되겠어? 그건 범죄나 다름없다구. 인간의 도리에도, 이치에도 어긋나는 거쟎아. 벌을 받아 마땅하지.
나는 사람들의 편견을 알고 있었고 항상 그런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 역시 내가 결코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때때로 한없이 슬퍼지리라는 것, 그 슬픔의 끝까지 가리라는 것을. 슬픔은 어느 정도 견딜만 하다. 하지만… …

마리안네는 후회를 한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행복할 수 없어. 둘은. 하지만 베르톨트와 마리안네, 그들은 행복했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에게 최선을 다했으며 마리안네 역시 베르톨트와의 생활이 좋았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마리안네는 시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름다운 얘기면 돼요. 다른 생각을 좀 하게요. 가을이라고 했죠?"
"무슨 말이야?"
"당신이 일을 끝내는 때 말예요."
"날 못 믿는 거야?"
"내가 왜 안 믿어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늦어도 11월에는……"
"그 다음엔?"
"11월에 개막 공연을 할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건가요?"
"그래.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냐. 나로서는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그 다음엔?"
"글쎄…… 공연에 참석해야겠지."
"저도 같이 가나요?"
"무슨 소리야! 당신이 주인공인데. 당신은 로얄석에 앉아 있을 거야. 모두들 당신을 쳐다보겠지. 연극이 끝나고 나면 무대 뒤로 올라가 함께 인사도 할 거야. 그때 입을 당신 새 옷을 마련 할 거야."
(…)
"그리고 그 다음엔요?"
"그 다음? 그 다음에 우린 다시 자유로워질 거야."
"그리고 나서는요?"
"우린 여행을 떠날 거야. 오늘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해? 아직 시간은 많아. 연극이 성공을 하면 우린 폭스바겐도 하나 살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어."
"그리고 그 다음엔요?" 

늦어도 11월에는 베르톨트가 자길 데리러 올 것이라 마리안네는 믿는다. 오직 그 믿음만이 그녀를 살아게게 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 느끼는 그녀의 감정들. 그 아무도 그녀에게 '그 일'에 대해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도대체 그녀에게 뭘 원하는지 불안하기만 하다. 집으로 돌아간 후 마리안네는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들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보이며 하지만 결국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나는 베르톨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내 무릎을 꼭 잡고 있었다.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린 어딘가로 날아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연애소설도 이쯤 되면 이건 예술이구나" 옮긴이의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지극히 통속적이다. 그럼에도 옮긴이의 말처럼 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안네의 감정을 표현한 부분들이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마리안네가 느끼는 심리적인 감정들을 작가는 너무나 리얼하게 표현해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던 마리안네의 행동과 남편인 막스의 태도, 그리고 시아버지의 마음까지 뒤로 갈수록 서서히 이해가 되어간다. 그럴 수 있다. 맞아, 그럴 수 있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며 다가온다면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 남자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까? 조금은 쓸쓸한 11월, 가슴 아픈 두 사람의 사랑. 늦어도 11월에는 꼭 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한번 빠져보길 권함. 

그 일은 어쩌면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시작된 일인지도 몰라. 어쩌면 어느 순간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운명적으로 마련되어 있던 것인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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