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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평점 :
줌파 라히리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것은 김연수 작가의 블로그에서였다. 런던에 재이디 스미스가 있다면 뉴욕엔 줌파 라히리가 있다는 식의 글을 읽으며 처음 들어보는 그 두 작가의 작품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즈음에 재이디 스미스는 이미 『하얀 이빨』이라는 책으로 신작이 나온 상태라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하지만 읽어보지 못했다. 책이 있다고 그 즉시 바로 읽는 법은 없으니;;) 줌파 라히리는 그저 이름만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의 소설이 나왔고 언젠가 들었던 그 작가라는 걸 알았지만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아무리 김연수 작가의 추천이라 하더라도 내가 끌리지 않으면 못 읽는 것 아니겠는가! 한데 이 책이 내게 굴러(!)들어왔다. 또 단편집이란다. 요즘 장편보다는 단편을 많이 읽는다. 그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짧은 글을 짧은 시간에 하나씩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너무 짧은 이야기에 작가의 의도조차 파악하기 힘들다며 단편 읽기를 거부했었지만 이젠 내 머리도 이해 능력이 발달했는지 아무리 짧은 단편을 읽어도 작가의 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작가의 생각 정도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나. 즉, 단편이 주는 재미에 빠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읽게 되었다. 한데 어이쿠! 이걸 읽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이토록 멋진 문체를 가진 작가를 몰랐다면 소설 좋아한다는 독자라고 말도 못 꺼낼 뻔(!) 했다.
여덟 편의 단편을 수록한 『그저 좋은 사람』에는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인도인의 정체성 문제를 바탕으로 소통과 불안을 풀어냈다. 한국인도 아니고 인도인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매 단편마다 공감이 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데에는 줌파 라히리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의 가족들이나 친구, 연인들과의 관계가 우리네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표제작인 「그저 좋은 사람」에서 보여주는 이민자 가족의 삶은 우리가 여태껏 보아온 우리 이민자들의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고, 손자는 좋으면서 딸과의 관계를 버거워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머니를 보내고 다른 여자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지만 결국엔 이해를 하고 마는 딸의 이야기를 다룬 「길들지 않은 땅」이나 평생 가족을 위해 살며 자기만의 비밀을 하나 간직하고 사는 우리네 엄마와 다를 바 없는 인도 엄마의 모습을 다룬 「지옥-천국」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들이다. 또 한때 좋아했던 친구의 결혼식에 초대받았지만 그걸 기회로 부부만의 즐거운 여행을 꿈꾼 부부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결혼 생활의 회의였던 「숙박시설의 선택」, 그리고 독특한 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아무도 모르는 일」과 연작으로 풀어낸 「헤마와 코쉭」의 인생은 어린 시절에 잠시 함께 보냈던 남녀가 오랜 시간이 지나 해후를 하지만 결국엔 삶을 같이 하지 못하는 과정을 그려내면서 삶과 죽음, 결혼, 연애와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에 자연스럽게 접근을 하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사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줌파 라히리의 글이란 결국 우리 삶과 비슷하기 때문에 공감이 간다는 뜻으로 보일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단편적으로 보이는 내용의 뼈대만을 보자면 너무나 흔한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줌파 라히리의 장점이자 매력은 그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그녀만의 문체라는 점이다. 짧은 단편에서 보여주는 한 사람의 삶이나, 그 짧은 단편에서 독자들이 이해하고 감동하거나 공감하게 하는 문장들의 담백함은 읽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장장 이 주 동안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책 읽기가 아깝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갖게 한 책이었다. 그만큼 좋았다. <피플>은 별 네 개 주어도 모자란 작품이랬는데 나는 별 다섯 개를 주어도 모자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도 줌파 라히리를 모른다면 이번 기회에 꼭 한번 만나보라고 하고 싶다. 간만에 전작의 꿈을 가지게 한 작가이며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 그런 작가다. 줌파 라히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