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창비시선 305
박후기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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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많이 읽지 않지만 간혹 맘에 드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요.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죠.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사랑의 물리학(상대성이론)」 중
 

그렇다면 나는 이 시집을 휘리릭이나마 훑어 보게 됩니다.  

성격이 난폭한지 나이를 먹어도 서정적이고 다분히 감상적이며 사랑 운운하는 글들에겐 맥을 못춰요. 더구나 이 시집을 두어 장 넘겨보니 이 가을에 내 맘을 후벼파듯 들어오는 문장들이 많더라구요. 

(…)
너를 생각하면
얼어붙은 뺨보다 가슴이 더 시리지만,
사랑을 잃고 산길을 헤매는 사람끼리
체온을 나누어갖는 밤도 슬프진 않다
어차피 네게로 가는 길도 지워졌으리라
     -「비박」 중 

(…)
어째서
모든 뒷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제석봉에서 이별하다」 중
 

다 적어보고 싶지만 그건 어렵고, 이 시집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표제작의 문장이 들어 있는 「사랑-글렌 굴드」입니다. 글렌 굴드라면 '고독과 광기를 예술로 승화'했다는 그 피아니스트죠. 영화로도, 몇 년 전에 책으로도 나왔던 게 기억납니다. 그를 위한 시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제가 -글렌 굴드 인걸 보면 어쨌든 그를 생각하며 지은 시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건 시인의 마음이고 나에겐 그저 서정적인 시로 다가왔어요. 신경림 선생이 말씀하셨죠. 시는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침묵은
말 없는 거짓말,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살아야 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여자가 다른 것은
연주와 감상의
차이 같은 것
건반 위의흑백처럼
운명은 반음이
엇갈릴 뿐이고,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은
다시 듣고 싶은
당신의 거짓말이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정말 마음에 와 닿지 않나요? 

어제 한참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집에 가는 내내 시집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모퉁이를 접고, 한참이나 마음이 센티해졌습니다. 그러고선 마지막에 있는 해설을 읽었죠. 

근데 어라? 

'혈육을 통해 확인되는 존재의 실존적 국면은…', '바닥은 존재가 발붙이는 하방의 마지막 지점이다' 등등 전혀 알 수 없는 해설들이 나오지 뭡니까.  

생각해보니 어제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봤던 박용환 아나운서도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혈육이 어떻고, 바닥이 저떻고. 근데 왜 나는 온통 '사랑'에 관한 글들만 눈에 들어왔을까요? =.= 다행이라면 해설 뒷부분에 엄경희 문학평론가가 이런 글을 적어두었더군요. 

"사랑은 인간존재가 경험하는 것 가운데 가장 불가해한 사건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타자를 향해 스스로를 완전히 개방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들뜬다. 이 무장해제된 존재는 오로지 타자와 일체화되기 위해 전존재를 투사한다. 도취와 충만으로 내적 결핍은 치유괴고 위안받는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며 환상이다. 박후기의 시에서도 이같은 사랑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아, 어려운 단어들 들어가면 머리 아프지만 시인의 시엔 어쨌거나 사랑에 관한 시들이 있다는 의미겠죠. 안심(!)을 하며 시인의 말을 읽었습니다. 

"그을음, 그것은 이 시집을 펼칠 때 누구나 보게 될 덧없는 내 자상(自傷)의 흔적이다."  

누군가의 상처를 더듬어본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아픈 사랑을 훔쳐보는 일은 가끔 위로(!)가 됩니다. 박후기 시인의 시집으로 인해 저에게 오늘은 유난히 가을스러운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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