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음>
한 권의 책을 읽다가 또 다른 책을 생각하는 일은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한두 번은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일이 많은 편인데 오늘 이주은의 『당신도, 그림처럼』을 읽다가 두 권의 책이 생각났다. 그냥 휘리릭 넘길 때는 그 그림을 보고 영화 <어톤먼트>에서의 그 아름다운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것과 비슷한 그림이 존재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자세히 보니 영화의 한 장면을 캡쳐한 것이다. 즉, 세실리아로 열연했던 키이라 나이틀리의 모습이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그 짙은 초록색의 드레스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같이 영화를 본 친구랑 한참을 그 드레스에 대해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대체로 그림책을 보면 그림과 관련한 책이나 그림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사적인 생각들이 나게 마련이다. 한데 키이라 나이틀리의 모습을 보면서 그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해피엔딩과 그렇지 않은 두 가지의 결말을 가진 책이 생각났다. 그건 아마도 이주은이 그 사진과『속죄』에 대한 이야길 들려주어 이번에 읽었던 박민규의 책이 생각이 난게 아닌가 싶다. 이 두 권의 책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이란 읽는 사람의 마음이니 내가 그 책을 떠올렸다면 뭔가 공통점이 있었기에 그렇지 않을까?(아, 소심) 어쨌든 내 맘이다.ㅎㅎ
이언 매큐언의 『속죄』. 이 책은 상상력 풍부하고 감수성 예민한 열세 살 어린 소녀의 잘못된 판단과 상상력이 불러일으킨 비극적인 일을 풀어낸 소설이다. 언니인 세실리아가 사랑하는 남자 로비를 강간범으로 몰아 둘을 갈라놓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소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노력을 한다. 마침내 소녀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도 그 둘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한편으론 안도, 다른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다. 해피엔딩이다. 오해는 풀렸고 세실리아와 로비는 그 많은 고난에서도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충격적인 결말이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들은 대체로 결말이 충격적이다. 별 것도 아닌 일처럼 진행되다가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한번 읽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빠져들고 만다. 그의 문체와 스토리에. 나 역시 그랬다. 가능하면 전작주의를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음에도 이언 매큐언의 책은 일부러라도 찾아 읽게 만든다. 특히 그의 책 중에서 부모가 갑자기 죽고 무방비 상태가 된 사남매의 이야기를 다룬 『시멘트 가든』은 다시 생각해도 그 충격적인 상황이 이해불능이지만 이언 매큐언 만의 ‘평범한 일상생활의 모습’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나는 ‘일상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여주는 이언 매큐언 작품들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어떨까? 스무 살 무렵, 모든 사람들이 거부할 정도로 못생긴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나’,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 둘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그’가 사고를 당하고 뇌사에 빠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기적처럼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그녀는 어디론가 떠나고 없다. 소설가가 되어 이름이 알려진 그는 그녀가 독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만나러 독일로 떠난다. 그리고 재회. 이번에도 그렇게 헤어질 줄 알았는데 그는 그녀를 불러 세우고 둘은 돌고 돌아 마침내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역시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정말 해피엔딩일까? 모든 소설들은 그렇게 해피엔딩만 있는 걸까? 그래야 하는 걸까? 이 역시 충격적일 것까진 없지만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박민규는 이 결말에 대해 독자에게 선택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해피엔딩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독자들 좋을 대로 읽으라는 거다. 박민규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속죄』역시 그렇게 읽어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속죄』의 경우는 그 충격적인 결말로 인해 이언 매큐언의 존재가 살아나는 것인데 박민규 식은 좀 곤란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이렇게 얘길 하고 보니 스포일러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아까도 앞에 앉은 분과 문학의 스포일러에 대해 이야길 나누었는데 장르나 추리 소설도 아닌데 스포일러라는 게 있는 걸까? 뭐 어쨌든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겐 결말이 두 개니 한 개니 말하여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문학은 스포일러보다는 작가의 문체와 문장과 진행되는 스토리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그런 점에서 박민규와 이언 매큐언의 문체와 문장은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