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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 거짓기억과 성추행 의혹의 진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캐서린 케첨 지음, 정준형 옮김 / 도솔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는 ‘근친상간’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주제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사실은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극적인 주제를 사용하다보니 나 역시 한쪽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이 책은 ‘고발을 한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고발을 당한 피의자’의 입장에서 쓰인 책이다. 대부분의 글과 사례가 그들, ‘고발당한’ 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니 읽는 독자인 나 역시 피의자의 입장에서 읽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치료사들의 행태에 화가 날 지경이지만 혹시라도 진짜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피해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구심을 가진 이 책의 저자 혹은 리뷰를 쓰는 나로 인해 더 많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철저히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읽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치료사들이 건네준 『치유할 용기』를 먼저 읽었다면 어쩌면 그들을 먼저 이해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을 떠나서 나의 좁은 견해로는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그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20여 년이나 지나도록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서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번쩍! 하고 그 기억이 떠오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과학적 근거를 떠나서 정신적으로도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억 회복운동은 반 성폭력 운동도 페미니즘 운동도 아니다.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거나 자기 성찰이 없는 운동은 오히려 그들이 보호하려는 대상에게 해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기억 회복운동이 남긴 또 하나의 교훈일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처음 이 책의 제목과 보도 자료의 글을 보고 호기심이 당겼다. 기억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말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가짜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아무리 좋고 나빴던 기억이라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진실‘이 아닌가? 하지만 ’거짓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 기억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도 한다. 어리둥절해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곤 너무나 놀라워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20세기 말 미국에서 ‘성추행 기억 회복’의 붐이 일어났다. 삶의 여러 문제에 부딪혀 힘들어 하는 여성들이 심리 치료사를 찾아가 상담한 결과, 많은 여성들이 어린 시절 끔찍한 성추행을 부모, 형제, 혹은 주변 인물들에게 당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 여성들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 기억들을 자신도 모르게 ‘억압’당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 ‘억압’이 살아오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 라는 거다. 이런 사실은 유명인들이 상담을 받은 후 치료사들에 의해 잊었던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책이나 방송에 공개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 기억 회복의 ‘붐’은 ‘거짓 기억’으로 자기 가족을 매도하고 급기야는 부모를 고발하고 가정을 산산조각 나게 한 여성들이 진짜로 성추행을 당하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온 많은 여성들 중에 다수 포함되어 그들에게마저도 혹시 ‘거짓 기억’의 주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들의 통계에 따르면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18세가 되기 전 성추행을 당했으며 1988년 이후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성추행 기억 회복’ 덕분에 ‘잊었던’ 혹은 ‘억압된’ 기억을 되찾았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내 친구들 중에 한 명은 성추행을 당한 어린 시절이 있고, 만약 ‘기억 회복’ 프로그램을 실시해본다면 그들 역시 기억을 회복할지도 모른다는 놀랄만한 충격적인 통계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딸들은 정신적으로 치유하기 힘든 삶의 문제를 의논하러 상담 치료사를 찾는다. 그리고 그들을 찾은 딸들에게 치료사들은 따뜻한 말과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해준다. 또한 딸들에게 혹시 어릴 때 상처받은 일이 있느냐고 묻고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면 그들은 이제 딸들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 지속적인 암시, 최면 요법, ‘기억 회복’을 위한 모임, 신문기사들 등을 제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딸들은 서서히 기억을 되찾게 되는데 꿈이라 생각한 것이 현실이 되고, 상상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 딸들은 ‘플래시백’을 느끼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딸들이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실이 바로 ‘근친상간’이기 때문이다. 아, 내 삶의 문제들이 바로 부모들에게 있었구나! 그들이 나를 이 지경으로 내몰았구나.
이제 부모는 겨우 두 살인 딸을 성추행하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딸을 추행한 상습범이 되어 고발당하고 때론 딸의 친구마저 강간, 살해한 파렴치범으로 변하게 된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이 오로지 딸이 잊었던 기억을 회복하여 내뱉는 말로 인해서 말이다. 그렇게 풍비박산이 난 가정은 이제 예전의 가정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 사랑스러웠던 딸은 아버지를 강간범으로 대하고 아버지는 더 이상 딸을 딸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도대체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아무도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그저 고발당한 아버지는 딸들에게 혹은 아내와 딸에게 내몰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는 순간 평생을 근친상간의 죄를 안고 살아가야할 판이며 아버지를 그렇게 내몰고 고발한 딸은 어느 순간 아니라는 생각에 그 말을 번복하는 것과 동시에 평생을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며 살아야 한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물론 세상엔 아직도 아무 죄책감 없이 어린 딸을 성추행하고 괴롭히는 아버지들이 있다. 또한 그런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가엾은 딸들도 있다.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이런 ‘기억의 재구성’, ‘거짓 기억’, ‘억압된 기억의 발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들도 일어나는 것일 게다.
비록 이 책은 성추행이라는 사례를 들며 ‘기억’이라는 것에 접근하였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사람의 뇌란 교묘하다는 거다. 기억이란 충분히 조작이 가능하며 그 기억을 저장할 능력마저 가졌다는 점이다. 해서 앞서 내가 과학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내 머릿속의 기억들에 대해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할 판이다. 우리의 ‘기억’이란 충분히 재구성하고 조작할 수 있으며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소 자극적인 주제로 ‘조작된 기억’에 대해 풀어 놓은 책이지만 결국에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억’이다. 그걸 기억하기엔 ‘근친상간’이라는 주제가 너무나 무거웠고 충격적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