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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조경란 작가의 단편을 처음으로 읽었다. 집에 고이 모셔둔 『국자이야기』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아직도 못 읽고 있었다. 그의 책이라곤 겨우 장편 『혀』를 읽은 것이 다이지만 이 책 『풍선을 샀어』를 읽으면서 '참 좋다'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연륜이란 어느 분야에서나 있게 마련인가 보다. 누구나 한번쯤 반짝할 수는 있지만 그 반짝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하고 또 재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에겐 어쩌면 부담스러운 말이겠지만 조경란 작가는 그 반짝임이 사라지지 않는 그런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며 들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문체와 작가적 장인 정신의 절정!" 그의 초기 작품을 읽지도 않고서 이 말에 백번 공감이 가는 것은 그만큼 그가 보여주는 문체와 구성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는 뜻일 게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에서 작가는 유독 '상처'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 표제작인 「풍선을 샀어」에 나오는 '나'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십여 년 만에 귀국한다. 형제라곤 하나 있는 오빠도 분가하여 이제는 부모만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몽테뉴처럼 커다랗고 천장이 높은 원형의 서재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도착하지만 그곳엔 이미 오빠 내외가 육아를 핑계로 들어와 살고 있었다. 겨우 백화점 문화센터의 철학 강좌를, 그것도 선배의 도움으로 열게 되면서 강좌를 들으러 온 공황장애자 J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자살이 자신에게도 미칠 것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그를 공황장애자로 만들었듯이 그녀 또한 한때는 막막한 세계가 주는 두려움으로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치유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들의 '상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말하면서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다른 '상처'에 대한 이야기인 「달팽이에게」와 「달걀」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두 남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각기 고모와 이모에 의해 키워진다. 그 두 남자의 인생은 어릴 때 목격한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에 의해 그늘이 드리워진 인생을 살게 되지만 또 다른 죽음, 즉 고모와 이모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을 거라는 '치유'를 받게 된다.
작가가 말하는 '상처'는 이 책에서 유독 '가족'과 연관이 있다. 위의 두 작품 외에도 「밤이 깊었네」의 엄마,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의 할머니가 그러한데 독특한 가족 구성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불안들이 결국은 '나'라는 존재와 화해하면서 더불어 가족이 아닌 타인과도 소통하게 되는 '치유'의 과정을 세심하고 은밀하게 혹은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8편에 나오는 주인공 모두 1인칭인 '나'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하면서 작가 자신의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타인과 혹은 독자들과 소통하기 시작한 작가의 심정이 엿보이는 듯했다.
해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2007, 여름의 환(幻)」이다.
"거울, 즉 부드러운 어떤 하나의 막을 통과하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한 세계가 나온다. 신비한 것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 거울 속으로 한 여자가 걸어 들어간다. 여기와는 다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거울 저편의고요한 삶.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삶. 그런 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고 특별히 뜨거운 바람이 훅훅 끼쳐오는 여름이면 더욱 그런 것이다." p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