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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마녀
마이굴 악셀손 지음, 박현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과거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좋았던 일들도 가슴 아팠던 일들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법이다.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가끔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억들에 아픈 상처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동안 그 상처와 아픔들이 세월에 희석되어 버린 듯하다. 그 당시엔 그토록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른들이 늘 그렇게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는 약이 되지 못하는 세월도 있게 마련이다. 이 책에 나오는 네 자매와 엄마들, 그들에게 추억은 슬픔과 증오가 가득한 잿빛투성이의 삶이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림받아 임대주택 공동세탁실에서 발견되어 엘렌의 집으로 오게 된 마르가레타, 생모에게 심한 학대를 받다가 엘렌의 집으로 오게 되지만 엘렌이 죽자 생모에게 돌아가 살면서 오로지 벗어날 궁리를 하며 살았던 크리스티나, 또 외할머니와 같이 살다가 입학할 나이가 되어 생모랑 같이 살게 된 비르지타는 무능력하고 알코올중독자인 엄마로 인해 엄마와 떨어져 엘렌의 집으로 온다. 그리고 이 모든 아픔들의 원초가 된 엘렌의 딸 '사월의 마녀' 데시레, 얽히고설킨 이들 네 자매들의 과거와 현재가 그들의 추억으로 재생되면서 엄마와 딸의 질투와 원한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마르가레타의 상처는 실력 있는 물리학자가 되어 명예를 얻지만 자신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매번 관계이탈을 시도하고 생모에 대한 수치심으로 사회적 성공을 통해 그 수치심을 극복하고자 했던 크리스티나는 교수와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아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미지만 그 내면에는 그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 완벽과 냉소 가득한 인물로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힘든 인생을 살아가며 엄마인 게르트루드의 삶을 그대로 밟은 비르지타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평생을 시설에서 산 데시레보다도 많은 아픔을 간직한 채 헛된 세월을 보낸다. 또 그 아무리 반 강제적으로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고 하더라도 딸인 자신은 시설에 맡겨져 엄마의 품을 떠나 사는데 그 엄마는 다른 집의 자식들이 학대 받는다고 데리고 와 키워주는 것을 보아야 했던 데시레의 분노는 결국 자신이 가진 남다른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가져간 자매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된다.
이 책은 이렇듯 엄마와 딸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중년이 되어 회상을 하는 그들의 과거를 통해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 되어 있다는 스웨덴에서 그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인격을 존중해주지 않고 공공의 이익만을 위한 제도라면 오히려 그 부작용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을 작가의 손을 빌어 섬세하게 묘사한다.
학대하거나 능력 없는 생모의 곁을 떠나 좀더 안정된 가정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으며 산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기를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생모에게서 아이를 떼어 놓는 것 역시 그다지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나쁜 환경에서도 스스로 곧으면 잘 자랄 거라는 사람들도 있고 물론 그런 아이들도 있지만 어쨌든 그 근본적인 것의 상황은 어른들이 만든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가지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그 아이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는 없으니 이 소설이 비록 스웨덴이라는 나라를 배경으로 쓰인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 만나는 스웨덴의 작가이지만 이 시대에서 '사랑'과 '믿음'이 왜 중요한 것인지 엄마라는 존재가 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어떤 식으로 딸의 인생에 관여하는지 네 자매와 그 엄마들을 통해 제대로 보여준다.
첫 데이트를 위해 처녀성을 찢어버리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경악스러웠지만 그들이 회상하는 장밋빛 청춘은 어쨌든 그 청춘을 지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비르지타는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한다. 열다섯 살, 모탈라의 우윳빛 메릴린 먼로였던 그 시절을(…)드디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쾅 닫고 주위를 둘러보는 도게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휴대용 레코드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클리프 리처드의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주차장은 아주 조용하다. 모든 시선이 도게에게 쏠린다. 여자애들의 열망은 나비처럼 그를 향해 날아가고, 사내녀석들의 무력감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그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그녀 앞에 선 도게는 차 문을 열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다.
"지금부터 넌 내 여자야."
더이상 아무 말도 없다. 단지 그 한마디뿐이다.
영화의 한 장면이었어. 비르지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천 번도 더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영화는 계속 이어진다. 그가 그녀를 보닛 위에 눕히고 첫 키스를 하기 위해 머리를 숙이자 합창과 현악연주가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