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내가 처음으로 읽고 기억에 남긴 중국소설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이다. 왠지 무협지 같은 느낌을 받았던 제목의 소설이었다. <문화혁명기>시대에 가족을 위해 한평생 피를 팔아 생활하는 허삼관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는데, 분명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피식거리며 나오는 웃음과 은근한 감동은 중국소설에 대한 내 선입견을 바꾸어 놓았다. 그 후 또 다른 <문화혁명기>를 이야기 하던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역시 웃음과 감동이 섞여 중국소설에 대한 흥미를 한층 더해주었다. 더구나, 이 소설 하진의 『기다림』또한 <문화혁명기>의 시대이다. 그러나 하진의 『기다림』은 다른 중국작가들처럼 정치적이지 않다. 소설의 배경은 많은 중국소설에 등장하는 <문화혁명기>시대이지만 말이다. 그건 아마도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살면서 영어로 글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신, 몇 권 읽지 않은 중국소설들과 비교했을 때, 하진의 『기다림』은 <문화혁명기>를 살아가는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등장인물의 복잡한 심리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하진이 풀어 놓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늘 듣던 이야기처럼 익숙하고 그 상황이 짐작이 된다.

 기다림,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다. 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때가 오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쩌면 희망을 말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희망, 그렇다면 기다림 끝은 늘 희망하던 것처럼 다 잘되는 것일까? 사실, 불행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기다림의 끝은 행복일 것이라고 다들 믿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떠난 사랑을 기다리고, 내게 올 행복을 기다리고, 소설 속 우만나처럼 린이 아내와 헤어져 나와 살게 될 그 행복한 날을 기다리고….

육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인 쿵린은 부모에 의해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 흑백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약혼을 받아들였으나 직접 약혼녀를 본 린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약혼녀인 류수위는 40대로 보일 만큼 겉늙은 데다 신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족을 한 젊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약혼을 파기하고 싶었던 린은 부모를 설득하지만 “얼굴이 밥 먹여주더냐?“라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결국 결혼을 하게 되고 만다. 하지만 육군병원에 근무하는 린은 고향에 있는 아내와 늘 떨어져 지내고, 아이 하나를 낳은 뒤로는 거의 별거 상태였으며 고향에 다니러 가서도 자기 방에서 혼자 잤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아내가 사촌이라도 되는 양 대했다. 그래서 부모가 죽고 딸 화가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므로 자신의 삶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면에는 우만나라는 간호사가 있었다.

유부남이 애인이랑 공공연하게 연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두 사람의 아내를 둘 수도 없었던 그 시대에 린이 우만나와 지낼 수 있는 기회란 결혼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혼이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고, 질질 끌던 이혼은 급기야 17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 법적으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혼할 수 있는 18년째가 되어서야 이혼을 하게 된다. 우만나와 린에겐 길고도 긴 기다림 끝에 고대하던 행복의 날이 온 것이다. 하지만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행복은 순간이다. 처음 우만나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들은 이미 사라져버렸고, 우만나에 대한 린의 마음은 린 자신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우만나를 처음 만났을 때 결혼을 했다면 달랐을까? 내가 정말 우만나를 사랑하긴 한 것일까? 온갖 회의와 혼란스런 감정이 린을 괴롭혔지만 한숨을 내쉬는 일밖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이야기는 린이 아내와 이혼을 결심하지만 이혼하지 못하고 지내는 17년 동안 린과 우만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담담히 그려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 이혼하고 만나와 결혼을 한 후, 일어나는 린의 감정들을 잘 묘사해냈다. 그리고 마지막 “저는 너무 행복해요, 여보. 이렇게 집에 오셨잖아요.” 라고 말하는 수위의 한마디로 결국,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기다림은 린과 만나의 기다림이 아니라 아내 류수위의 기다림이라는 걸 말해준다.

일본소설에 비해 중국소설들은 대중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아직은 우리나라에 젊은 중국 작가들의 글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고, 중국의 현대적인 이야기보다는 지나간 한 시대적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소개된 까닭에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하진의 『기다림』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지나간 한 시대의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등장인물의 심리적 표현을 섬세하게 잘 나타내주어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리고 위화와 다이 시지에, 쑤퉁에 이어 내겐 하진이라는 또 한 명의 중국 작가를 알게 되었으며 중국소설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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