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어
안 소피 브라슴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작년에 마르셀라 이아쿱의 『사랑하면 죽는다』를 읽은 적이 있다. 심리소설이었는데, 내용이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소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찌나 사실처럼 글을 썼던지 이게 진짜야? 거짓말이야? 한참을 헷갈려했다. 그 책에 보면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는 감정을 지니게 되면서 사랑의 권력 투쟁이 시작된다고 한다. 사랑을 갈구하는 쪽은 항상 기다려야 하고 사랑을 구걸하게 되어 스스로 ‘먹이’가 되어버리고 사랑을 쟁취한 쪽은 느긋하고 잔인한 ‘학대자’로 변모한다는 거다.(레드님의 서평 중) 안 소피 브라슴의 『숨쉬어』를 읽으면서 이 둘의 관계가 동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이성보다는 동성에게서 더 많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남자 친구들보다는 여자 친구들에게 빠져 있을 때가 있다. 부모와 형제에게서 벗어나 친구라는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신비로움이랄까,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친구. 더구나 샤를렌과 같은 공상 속에 살며,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에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아이는 그 상처가 깊을 대로 깊어 치유되기 힘들었을 거다. 이방인과 같은 가족 관계에서 천천히, 가장 잔인한 침묵 속에서 서서히 파괴되어가는 가족을 바라보는 샤를렌의 고통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이 부당한 삶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 칠 때 구세주처럼 사라가 나타난다.  “나는 다 알고 있어. 네 마음 이해해. 너를 도와주고 싶어. 우리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사라가 이야기 하자마자 샤를렌은 스스로 ‘먹이’가 되어 있었다. 

아, 이제부터 샤를렌과 사라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러니 내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야겠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난 그 아이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 아이가 하는 행동은 다 따라하고 싶었고, 그 아이와 동일한 아이이고 싶었다. 내가 그 아이의 유일한 친구이고 싶었고, 그 아이 역시 내가 자기의 유일한 친구이길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 말고도 친한 친구가 그 아이에겐 있었고, 난 그게 싫었다. 어느 날,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 엄마에게 그 아이를 혼내주기를 요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행동이었으나 내 마음은 그렇게라도 해야만 편해질 것 같았다. 효과는 있었다. 그 아인 엄마에게 알 수 없는(사이좋게 놀아라!) 꾸지람을 듣고 나하고 다시 놀기 시작했으니까.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내 머릿속에 뚜렷이 남은 그 날의 일이 생각나 그 친구에게 물었다.(그 아인 그 이후로도 줄곧,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이고, 내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기억나니? -그런 일이 있었어? 기억 안나? -몰라

난 샤를렌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의 일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샤를렌을 말이다. ‘사라를 제외하고는 내 주변의 누구도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심지어 내 부모님조차도. 그들은 그것이 사고가 아니었음을, 그것은 죽음을 알기 위한 시도였음을, 질식에 대한 열망이었음을, 한마디로 말해 자살기도였음을 알지 못했다’(p58) 샤를렌은 그때 생각한다. ‘그것은 새로운 삶을 발견하려는, 다시 태어나려는, ’숨쉬어야 할‘ 필요성이었다.’ 고.

샤를렌 앞에 나타난 눈부신 존재, 사라의 주변은 모든 것에서 광채가 난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매력을 풍기는 존재, 자신을 마침내 ‘숨쉬게’ 해준 그 아이가 샤를렌에게 ‘친구’라는 이름을 다가왔을 때 샤를렌의 삶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하지만 샤를렌이 얻은 그 삶이 ‘숨 쉬기 곤란한’ 고통을 동반한 삶이란 걸 몰랐다. 사라가 ‘친구’를 핑계로 샤를렌을 이용하고, 무시하고, 명령하고, 귀찮아한다는 것을. 결국은 샤를렌이 홀로서기를 못하고 또다시 자신이 ‘숨을 쉬기 위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을.

학대자’는 ‘먹이’가 자유로운 것을 보지 못한다. ‘먹이’는 항상 ‘학대자’의 곁에 머물러야 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먹이’가 자유로워지는 것은 ‘학대자’가 ‘먹이’를 버렸을 때만 가능하다. 이젠 진짜 사라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라는 또다시 샤를렌을 이용한다. 끝없이 먹고 먹히는 관계.

 

가끔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꿈을 꿔”  샤를렌은 마침내, 고통과 혐오와 수치심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증오스러웠던 삶으로부터 영원한 승리자가 되어 빠져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샤를렌을 누가 나쁘다고, 잘못이라고 말할 것인가?  또 과연, 누가 샤를렌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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