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코끼리
랠프 헬퍼 지음, 김석희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언젠가 태국에 갔을 때 코끼리 쇼를 본 적이 있다. 동물원에서 우리 안에 있는 코끼리만 보다가 바로 눈앞에서 사람과 같이 쇼를 하는 코끼리를 봤을 때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살짝 놀라기도 했는데 조련사들이 코끼리를 조종하기 위해 갈고리처럼 생긴 걸 사용하는 걸 보면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이 책 『모독』에 나오는 브람처럼 사랑과 진심으로 대하면 그런 갈고리 따위는 필요 없었을 텐데 말이다.


난 동물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편이지만 오래 전에 애완견이 아닌 똥개라 불리는 그냥 개를 키워본 적이 있다. 애완견은 아니었지만 강아지 때부터 키웠더니 제법 말도 잘 알아듣고 키우는 맛이 났었는데 똥개라 너무 커버리는 바람에 마당이 있는 친구네 집으로 보내버린 후론 동물은 키워보질 못했다. 아니, 키울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이 맞겠다.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동물이든 한 마리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 못지않게 많은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정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동물을 키우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독』을 읽고 나자 그런 생각은 두 배는 더 커졌다. 브람의 모독에 대한 사랑은 정말이지 형제에게도 그런 사랑을 주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더구나 70년이란 긴 세월을 같이 보냈다고 하니 브람과 모독은 떨어진 몸이 아니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같은 날 태어난 인연을 가진 브람과 모독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생활했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 조련사를 하고 있던 아버지 덕분에 브람도 일찍부터 코끼리 조련의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서커스단이 불황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아버지는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브람은 다른 주인에게 팔려서 미국으로 가는 모독을 따라 불법으로 모독이 탄 배를 탄다. 하지만 그 배는 태풍을 만나 난파되고 그 와중에 죽을 뻔했던 브람은 모독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독일에서 인도로 넘어간 둘은 코끼리 왕국이던 인도에서도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모독을 샀던 주인에 의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브람과 모독은 서커스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러나 브람과 모독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으로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브람이 모독을 찾았을 때 한눈에 알아본 것은 그들이 같이 지내온 세월이 비록 코끼리일지라도 인간 대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책의 저자 랠프 헬퍼는 할리우드의 동물 조련사로 채찍과 강압적인 훈련이 아닌 브람처럼 애정과 친절한 태도로 동물들을 다룬 사람이다. 랠프가 모독을 구하지 않았다면 브람과 모독의 만남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 둘의 감동적인 만남을 목격했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도 있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숨을 쉬고 사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다.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게 하는 아이의 마음 같은 순수함이 브람과 모독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을 만든다. 인간만이 우월하고 동물은 동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브람과 모독은 버리게 해 주었다. 자연에서 사는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고 한다. 그만큼 영험한 동물이다. 인간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동물과 인간의 소통, 그래서 브람과 모독의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감동적이다.


(…) 누군가 오래된 서커스 음악을 찾아내어 그것을 틀었다. 칼리오페 연주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모독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랠프가 돌아보았을 때, 모독은 먼지 나는 공연장에서 스스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가 떨리고 있었다. 랠프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모독이 하고 있는 행동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동물도 조련사가 없으면 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적어도 랠프는 조련사 없이 스스로 재주를 부리는 동물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유가 무엇이든 모독은 오랫동안 공연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모독은 많은 훈련을 쌓은 노련한 연기자처럼 발끝으로 빙글빙글 돌고 한 발로 껑충 뛰고 가볍게 뛰어넘고 왈츠를 추고 다리를 들어올리고 대좌를 이용하여 재주를 부렸다. 하나, 둘, 셋, 왈츠, 하나, 둘, 셋, 왈츠. 모독의 근육은 오랫동안 활동하지 않아서 약해져 있었고, 아픈 발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을 텐데, 모독은 이 낡은 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커스 천막 안에 있었다. 톱밥을 깐 바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모독은 대형 천막에서 수천 명의 박수갈채를 받는 인기 스타였다. 거기에는 어릿광대와 아이들과 솜사탕이 있었다.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 기억, 냄새, 웃음소리, 박수갈채. 모독은 절을 하는 것으로 공연을 끝냈다. 음악이 멎었다. (…)  p371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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