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도치의 회고록
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동생 집에서『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를 처음 봤을 때 그 독특한 제목과 표지 디자인에 눈이 확 끌렸다. 한 치의 지체함도 없이 책을 펼쳤더니 제목만큼이나 또 디자인만큼이나, 하나 더 추가하자면 콩고출신의 이름도 특이한 작가만큼이나 내용 또한 특이했다. 그 자리에 앉아 몇 페이지를 읽다가 동생 몰래 들고 올 생각이었으나 읽고 있는 중인 것 같아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 그러고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읽을 책도 많았는데 그 책이 내 눈 앞에서 아른아른 했다나 어쨌다나. 더구나 이 책『가시도치의 회고록』을 읽고 나니『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를 읽지 않은 것이 천 번 정도 후회가 되었다. 아마도 뒤에 실린 <부록>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 들었으리라. 아무튼.


이 책은 우화 같다. 아니 우화다. 왜냐하면 ‘가시도치‘라는 동물이 화자이기 때문이다. 이 ’가시도치‘란 놈은 허울만 동물이지 인간 못지않다. 말은 물론이요,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 가시도치가  바오바브나무에게 늘어놓는 마흔두 해의 가시도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가시도치로 태어나 가시도치로 살지 못하고 인간의 분신, 그것도 해로운 분신이 되어  살아온 가시도치의 푸념을 들어보면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지만 한 편으론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다.


어떻게 끔찍한 일이 내 발등을 찧기에 이르렀는가부터 시작하여 가시도치가 동물의 세계를 떠난 이유, 아빠 키방디가 가시도치와 아들 키방디에게 자신의 운명을 팔아 치운 과정, 엄마 키방디와 아빠 키방디의 저세상에서의 조우, 결국 지난 금요일이 불행의 금요일이 되어 버린 것과 마지막으로 가시도치가 끝장나지 않은 이유를 바오바브나무에게 고백하듯 털어 놓는다.


가시도치의 말에 의하면 인간에겐 ‘해로운 분신’과 ‘평화의 분신’이 있단다. 후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나타나는데 인간이 중병에 걸리거나 재수 없는 일을 당할 때만 관여를 한다고 한다. 전자인 경우는 분신 중에서 가장 사납고 무시무시하며 흔치 않은 부류인데 가시도치가 그에 속한다. 이 해로운 분신은 평화의 분신처럼 독자적으로 행동하질 못하고 주인의 뜻을 따라야만 한다. 그 뜻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거다. 사람을! 이유가 있나? 모 개그맨의 말처럼 아무 이유 없다. 오로지 ‘해로운 분신’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99번의 살인을 저지르고 100번을 채우지 못하고 100번째로 주인인 키방디가 죽자 가시도치는 도망친다. 자고로 분신이란 주인과 같이 죽어야 할 팔자임에도 가시도치는 도망쳤다. 가시도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주인의 엑스트라로 시킨 일만 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보상받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저 살고 싶었다. 바오바브나무처럼 오래오래 살면서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좋은 암컷 만나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평화의 분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착각한다.


가시도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인간인지 동물인지 아리송하다. 인간의 분신으로 마흔 두해를 살아온 가시도치인 만큼 반 인간이 다 되어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 어쩌면 자신이 인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가시도치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동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회고에 가깝다. 그러고 보니 키방디가 하는 짓은 인간이기보다는 동물을 닮았고, 가시도치야말로 동물이 아닌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알랭 마방쿠는 가시도치를 통해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조리와 비극적인 면을 보여주고자 일부러 의도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분신의 이야기는 아프리카 설화에 속한다고 한다. 처음 접하는 아프리카 문학에다 낯설기만 한 명칭들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재미있었다. 더구나 마방쿠가 가시도치 ‘느굼바’를 통해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유머와 풍자로 가득하다. 성경을 패러디하고 아프리카의 습속을 관찰하러 온 백인 민속학자를 비웃고,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가끔 킬킬거리기도 하고 가시도치의 수다에 넋이 빠지기도 한다.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와 함께 또 한 권의 책이 더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책에서도 마방쿠가 시도한 문학적 실험은 여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어떤 의도로 문장부호를 마음대로 지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실험이 이 책에선 어쨌든 성공한 것 같다. 가시도치가 끝없이 이야기하는 상황과 마침표 없이 끝없이 나오는 쉼표는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뒤를 잇는 아프리카 환상 문학의 대표작가, 알랭 마방쿠!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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