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 벌레 이야기
이청준 지음, 최규석 그림 / 열림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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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유괴사건이 보도되었을 무렵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조카를 만났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고모 입장으로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두서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어보았다. 학교는 누구랑 가니? 혹시 혼자 다닐 때도 있니? 혼자서는 절대로 다니지 마라. 낯선 사람이 뭔가를 물어보면 대답도 하지 마라 등등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질문이지만 딴엔 조카가 걱정이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어이없는 질문과 권유(?)는 도통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세상이 험악하다느니 나쁜 사람들이 많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제 세상 속으로 들어간 아이에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빙빙 돌려 말할 수밖에. 당연히 나라도 못 알아들을 말이었다.- -;) 조카의 무관심으로 유야무야 되어버렸지만 모르는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조카가 가여울 뿐이다.


벌레이야기』는 이청준 선생이 198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십 여 년이 지난 작품인데도 이렇게 공감하는 것을 보면서 이청준 선생의 문체는 둘째로 치고, 강산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여전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유괴와 살인,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를 이청준 선생은 특유의 시선과 문체로 풀어냈다. 그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신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사람의 편에서 나름대로 그것을 생각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의문을 되새겨본 기록”인 것처럼 피해자가 된 엄마가 절대자인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벌레로 전락하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아이가 실종되고, 차츰 주변의 관심에서 멀어질 무렵, 엄마가 잡을 수 있는 희망은 당연히 모든 종교일 것이다. 부처님께 불공드리고, 예수님께 기도드리고, 그 어떤 힘든 일이라도 엄마니까 당연히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이웃집 여자인 김 집사의 도움은 절대자인 하느님에게 의지해서 실종된 아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주검으로 발견되고 범인이 잡히지 않았을 때, 절대자인 하느님에 대한 엄마의 원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이를 찾아내기 위해 기도드리고 하느님을 찾았건만 주검으로 변해 돌아온 아이를 보며, 더구나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아들만 주검으로 돌아온다면 어느 엄마인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을까. 하지만 범인이 밝혀지고 잡히자 엄마의 마음은 복수로 가득해진다. 내 아들은 죽었는데 범인은 이제 법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보호를 받고 있으니 어찌 엄마의 마음이 편할 것인가. 복수와 원망으로 가득한 엄마에게 이웃집 여자 김 집사는 이젠 ‘용서‘ ’동정‘이란 말로 엄마에게 다가온다. 잡힌 범인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오직 절대자인 하느님만이 심판할 수 있다며 사람에겐 오로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의무밖에 없다고 설교한다. 결국 김 집사의 간곡한 권유에 엄마는 범인을 용서하기로 하고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용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용서를 하러 간 그 자리에서 엄마는 용서 대신 배신감을 느끼고 돌아온다. 그 배신감은 곧 엄마를 절망 속에 빠뜨렸고 급기야는 분노하고 만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 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p90>                 


이것이야말로 신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이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내가 엄마였어도 어쩌면 똑같았으리라. 엄마가 아닌 하느님이 용서를 할 생각이었으면 엄마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든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이 지속되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 줬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동정해야 한다. 따위의 말로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결국 엄마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 벌레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벌레 같은 존재 말이다.


이청준 선생은 이 가슴 아픈 소설에서 용서와 구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무게감 있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당신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하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주었다. 나라면? 글쎄….  





이 책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설에서처럼 영화도 아이를 잃은 엄마의 처절한 마음을 표현한다고 한다. 전도연의 연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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