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
안 리즈 그로베티 지음, 신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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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끔 길지 않은 짧은 단편에 감동을 느낄 때가 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해야 할 말, 독자에게 전해주어야 할 이야기를 시처럼, 혹은 짧은 독백처럼 풀어 놓는다. 어떻게 보면 대충 쏟아내는 것 같지만 다 읽고 난 후엔 그 짧은 이야기 속에 함축된 단어와 문장들의 감동과 오랜 여운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더군다나 그런 짧은 소설들은 대부분 청소년 문학인 경우가 많았다. 내게 그런 소설로 통하는 몇몇 소설을 이야기 하면, 몇 년 전에 읽은 미셸 깽의『처절한 정원』이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이야기』, 그림책인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같은 것이 그런 책이다. 함축된 단어와 짧은 이야기가 그야말로 시처럼 간결하지만 아름다운 소설이었던 거다.


이 책, 안 리즈 그로베티의『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은 짧은 단편으로 된 청소년의 책이라 그냥 슬쩍 훑어본다는 것이 그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페이지마다 보여주는 짧은 감동이 어찌나 진하게 내 맘속으로 들어오던지 책을 덮고 나니 아, 하는 신음소리마저 나왔다. 어쩌면 내가 좀 과한 찬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나로선 어떤 말의 찬사로도 아까운 책인걸.


화자인 베냐민에겐 오스카라는 친구가 있다. 오스카의 아버지와 베냐민의 아버지 역시 친구로서 ‘둘도 없는 친구’ ‘세상이 생겨날 때부터 친구’ ‘한 손에 붙은 열 손가락 같은 친구’ 사이이다. 그래서 베냐민 역시 오스카와 함께 아버지들과 견줄만한 ‘친구 이상의 친구’ ‘영원한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들의 어린 시절은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느 날 ‘낮은 소리로 말해야 되는 시간’이 느닷없이 다가와 베냐민과 오스카의 어린 시절을 뒤죽박죽 만들어 버릴 때까진 말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시끄러운 목소리가 아버지와 안톤 아저씨와의 우정마저도 위태로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 베냐민은 울고 싶었고 위로 받고 싶었다. 그러나 베냐민도, 오스카도, 안톤 아저씨도, 아버지 하인치도, 그 누구도 위로 받지도 위로해주지도 못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인 오스카의 가족이 나치의 침공으로 어느 날 갑자기 상종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로 분류되어 유대인 전용 구역으로 쫓겨 가게 되면서 뒤죽박죽된 상황을 어떻게든 구제해 보려고 하는 베냐민의 아버지 하인치와 안톤 아저씨의 이야기다. 그들이 큰소리에 대항하여 낮은 소리로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친구로서 하인치가 안톤을 도와주려 하자 안톤은 오히려 자신을 도우려다 하인치가 피해를 볼까봐 둘의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 고맙네, 그리고 용기를 내게. 인간들을 저주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나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할거야. 하지만 자네는 언어를 그토록 존중하는 사람이니, ‘절망desespoir'이란 단어에서 ’희망espoir'만  읽게. 절대 잊지마.”


자신으로 인해 친구까지 죽음으로 몰기 싫었던 안톤은 그러나 딸인 아나이스를 하인치에게 남겨 둠으로써 절망이 아닌 희망을 재확인 한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 아나이스는 그 단어가 품고 있는 것을 현실로 이루어 주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치의 어떤 폭력적인 횡포도 찾아볼 수 없다. 기껏해야 오스카가 어느 날 축구부에서 쫓겨나고, 안톤 아저씨가 다니던 은행에서 쫓겨나는 정도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간결한 문장 속에 그 시절 유대인들이 당했던 아픔이나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놀라운 문학적 역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어 나온 소설이지만 요즘 나는 어른들의 소설보다 동화책이나 청소년 문학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는다. 세상에 물든 어른들의 이야기보다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순수하기에 그럴 지도 모르겠다.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가는 우정과 희망이란 단어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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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냐 2007-09-17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es24하고 같네요? ^^;

readersu 2007-09-1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책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읽어보세요.^^
글구, 같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