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늙은 절집 - 근심 풀고 마음 놓는 호젓한 산사
심인보 글 사진 / 지안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근심 풀고 마음 놓는 호젓한 산사, 곱게 늙은 절집.

내 고향에서 가까운 절은 아주 오래 전부터 고향 사람들에게 피서지로 통했다. 절 안쪽 숲 옆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물은 한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시원하고 조용한 곳이었고, 고등학교 들어가 사귄 남자친구와 첫 데이트라도 할라치면 작은 도시에서 열 걸음마다 부딪히는 친구들을 피해 나무숲 우거진 흙길을 따라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고 도란도란 속삭이듯 이야기 하는 재미가 첫 데이트의 떨림도 없애주었다.


그런 곳이 언젠가부터 유명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계절마다 찾아 왔다. 절 앞 도로가 넓어지고, 절로 들어가는 자가용도 많아지고, 소림사 같은 도저히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의 여름 휴양처는 어느 날 접근금지 푯말과 함께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젠 여름이 와도 우린 그곳으로 수박 들고, 돗자리 들고 쉬러 가지 못한다. 그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지도 못한다. 돗자리에 누워 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도 볼 수가 없다. 너무, 너무 아쉽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웅전으로 가는 그 길이 흙길 그대로라는 것. 첫 데이트 때 떨리던 마음을 다독여 주던 그 흙길 그대로라는 거다.


『곱게 늙은 절집』을 읽는 동안 고향의 그 절이 참 많이 생각났다. 봄이면 봄꽃들을 보러가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찾아가고, 가을이면 형형색색 멋진 단풍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겨울이면 하얗게 내린 눈을 밟으며 뽀드득 소리 듣는 재미로 찾아가는 곳이 절집이기 때문이다. 그런 곱게 늙은 절집이 내 마음 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그 장에 딱 알맞은 절집을 소개했다. 내가 가 본 곳도 있고, 이름만 들은 곳도 있고, 처음 들어 본 곳도 있다. 저자의 말처럼 호화로운 여행은 아니지만 저자의 글을 따라 그 절들을 다녀 보면 옛 모습 그대로 곱게 늙어 온 아름다움과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 영화보다 더 솔깃한 이야기들을 듣고, 보고, 느낄 수 있다.


제목처럼 ‘곱게 늙은 절’을 이야기 하는 첫째 장은 초라하고 볼 폼이 없어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사람이 좀 찾아온다고 해서 시멘트 길을 만들지 않는다. 불편함이 가득 묻어 나와도 고고한 자태의 옛 모습 그대로 고요와 향기를 가득 머금은 채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마음이 풍경되는 천 년의 곰삭은 천등산 봉정사,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고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는 봉황산 부석사, 세상의 어떤 위로로도 아물지 않는 아픔을 묻어주는 지리산 화엄사의 구층암.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절은 고색을 지녀야 한다는 편견이 찾아낸 곳들이다.


둘째 장엔 해우소가 나온다. 해우소의 유래는 여러 개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멋진 말, 근심을 푸는 곳이다. 그런 해우소와 같은 절집들이 있다. 세상의 불만과 욕심을 순식간에 잊게 만들어 주는 조계산 선암사, 묵은 근심마저 다정하게 비우게 하는 운달산 김룡사, ‘꽃이 저보다 더 예쁘다면 오늘 밤 꽃을 안고 주무세요.’ 고려 때 문인 이규보의 <절화행>의 한 구절이 멋들어지게 잘 어울리는 상왕산 개심사, 늘 비어 있는 곳이고 늘 가득 찬 곳, 헛것도 받아들이는 산사 월출산 무위사. 아마도 그 절집에선 꼬인 창자를 풀 수 있을 거다.


절집과 그 주변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종교를 떠나서 절을 찾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것이 셋째 장 ‘풍경 속의 풍경’이다. 노을 속에 숨어 풍경 소리마저 숨죽이는 노을을 가진 달마산 미황사, 낙동강에 밀려온 구름이 청량산 열두 봉우리에 걸려 산문이 되었다는 봉화 청량사, 바람소리든 빗소리든 가슴으로만 보이는 것들, 전나무 길이 끝나면 단풍나무 길이 이어지는 능가산 내소사. 느닷없이 만나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 절과 어울려 산이 절이 되고, 절이 산이 되는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마지막 장인 ‘이야기가 그리우면’에서는 절에 얽힌 사연들이 나온다. 영귀산 운주사에서 만나는 석불들은 천 년의 전설을 숨기고 있다.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운주사의 비밀은 보여주는 만큼 새로운 비밀을 간직하는 비밀의 사원이다. 기생 매창의 아름다운 시와 사랑을 간직한 능가산 개암사, 많은 이들이 노래하고 가을이면 붉은 꽃 애절하게 피는 절 선운산 선운사. 절마다 간직한 사연들은 우리 마음을 그곳에 널어놓게 한다.              


저자인 심인보는 단순히 절집에 대한 이야기만을 풀어 놓진 않았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람이 훑고 간 자리, 세월이 가져간 단청의 색, 그 속에서 전해지는 전설과 군데군데 어울리는 시구는 저자가 찾아간 절집만큼 아름다운 글과 어울려 멋진 작품을 창조해냈다. 이 봄날에 꽃구경 한번 하지 못한 나는 이 멋진 책으로 나라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곳을 다 찾아가보았다. 곱게 늙은 절집을 찾아가 근심을 풀고,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열며 절의 이야기를 듣고 왔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곱게 늙은 절집』, 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내 사랑」에 나오는 시구 마냥 잘 늙은 절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 주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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