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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줄리언 반스를 알게 된 것은 아직도 읽어보지 못하고 침을 흘리고 있는 <내 말 좀 들어봐>이다. 그보다 유명한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있지만 내 기억엔 어쩐 일인지 <내 말 좀 들어봐>가 남는다. 최근에 나온 줄리언 반스의 책 중에서 <10과/2장으로 쓴 세계 역사>를 먼저 읽기 시작했지만 그 책은 워낙 집중을 요하는 책이라 반을 남기고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을 집어 들었다.
<10과 1/2장~>을 처음 읽을 때도 줄리언 반스의 사실에 허구를 섞어 엮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와우~감탄사를 내 뱉으면서 읽었는데, 이 책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역시 사실적인 일을 두고 그 일이 가져다 준 과대망상적인 과거의 집착이 만들어 낸 허구를(줄리언 반스가 좋아하는 장르인 듯) 잘 버무려, 그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인간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잘 그려냈다. 그렇다. 이 책은 비극이다. 책을 읽을 때 책에 대한 정보를 알고 읽으면 그 기분이 반감 되니 대충 사랑이야기려니 하면서 읽었는데 틀렸다. 이 책은 고등동물이라는 인간이 동물적 충동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적인 이야기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인간만이 느끼는 질투가 가미되고 그 질투가 빚어내는 사실과 허구 속에서 어처구니없게도 모두를 파멸시키고 만 한 남자의 인생이야기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여자의 과거사는 약간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 같다. 초혼이든 재혼이든 이미 지나 간 과거에 집착하여 자기의 인생을 파멸로 끌고 가는 그런 멍청이 같은 짓이 어디 있을까? 사랑이라고? 정말 사랑하니까? 글쎄...
줄리언 반스는 그 문제를 아주 현명하고 지식적으로 풀어 간다. 그레이엄의 집착을 뒤늦게 앤 역시 알게 되지만 거짓말보다는 진실이(사실, 지나간 과거이고 그건 그레이엄을 만나기 전의 일이었으니 그것이 이제 와서 그레이엄하고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그러니 과거를 묻는다고 진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 둘에게 이로울 거라고 판단했기에 숨기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엄의 과거에 대한 집착은 이미 빠져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독자로서 그레이엄의 행동을 미리 다 안다. 그러니 책을 읽으면서 ‘아니..이정도인데 앤은 왜 헤어지지 않지? 뭘 기대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앤으로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약간의 집착이 보이지만 그레이엄은 지식인답게 거의 표를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찝찝한 앤이 어쩔 수 없이 그레이엄의 친구 잭에게 찾아가 과거를 지우기로 입을 맞추는 것은 오로지 그레이엄과의 행복한 결혼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앤은 그레이엄과의 결혼 생활 중에 단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았으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원했다. 우리가 보듯이 앤의 눈엔 그레이엄의 그런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앤은 그레이엄이 그러다가 말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결과는 무시무시했지만.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은 가벼운 듯, 무거운 듯 재치 있고 위트도 있다. 자칫 과거에 집착한 한 남자의 치졸한 복수극에 빠질 뻔 할 수도 있었지만 반스의 해박한 지식과 탐구 정신이 멋진 소설을 탄생시킨 것 같다. 비극적이지만... 줄리언 반스...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