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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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난 한국 문학을 잘 안 읽었다. 기껏 읽어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검증된(?) 혹은 소문이 날 대로 난 작가의 책이나 읽어보았을까? 그마저도 요즘은 제대로 읽은 것이 없는데 가끔 읽게되는 한국 신인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재기넘치고 기발하며 재미있기까지 하다. 그런 새로운 작가들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처음보다 더 멋진 소설들을 써 낸다면 우리 문학에도 언젠가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보다는 독자인 우리가 먼저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지만 말이다.

 작가들의 상상력에 대해선 매번 이야기를 해서 지겹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또 이야기 하련다.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런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전혀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징후를 가진 사람들' 혹은 심토머symptomer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어찌나 능청스레 모든 것을 풀어 놓는지 깜빡하고 속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읽다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문장, 스타일, 약간 식상한 스토리도 느껴지고 많은 에피소드들이 정신을 산란케 하지만 귀싸대기 맞을 각오로 썼다하니 그런 것 쯤이야 통과!

 심리학인지 문학인지 모호한 생각마저 갖게 한 이 책은 사법고시라도 합격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들어간 연구소에서 기껏 아침에 들어온 물건을 내리고 서류와 물건의 개수가 일치하는지 확인한 후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하면 그 날의 업무가 끝나버리는 한 무료한 직장인의 기상천외한 경험담이다. 작가는 그가 말하는 심토머들의 등장이 인류의 새로운 종의 탄생이니 어쩌니 하면서 설設을 풀어 놓지만 <믿거나 말거나> 혹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그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우리 주변에 각자의 집에서 심지어 우리 몸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고,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거나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기에 이렇게 서두가 긴지 알아보자.

 어느날 우연히 회사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엿보게 된 13호 캐비닛. 텅 빈 연구실 구석자리에 처박혀 꼼짝도 안 하는 그 캐비닛의 비밀번호를 맞추기 위해 아니, 무료한 회사 생활을 0000에서 9999까지 눈 딱 감고 만번만 반복하면 될 그 일로 활기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케비닛 열기를 한 후 그  안에 들어 있는 삼백일흔여섯 개의 파일들을 읽게 되면서 알게 된 일이다. 물론 주인공인 공대리는 그 바보같은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지만 말이다.

 그 서류엔 심토머들이 나온다. '징후를 가진 사람들'. 공대리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행동과 징후가 보이는 그들의 증세는 이러하다. 자다가 깨면 몇 시간 아니 몇 일 아니 몇 년의 시간이 사라지는<토포러Torporer>의 징후를 가진 사람들, 심호흡 한 번하면 몇 시간이 사라지고 없는<타임 스키퍼Time skipper>를 가진 여자, 자기하고 똑같은 분신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짜증난다는 <도플갱어Dopperlganger>의 여자, 사랑하는 여자 곁에 있고 싶어 고양이로 변신하고픈 남자, 홍당무보다 지우개가 더 맛있고 광고지라든가 이쑤시개 같은 것을 먹더니 이젠 달빛까지 먹어댄다는 남자.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속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상담을 맡게 된 공대리가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마치 공중그네의 이라부 선생을 보는 것 같지만 그다지 쓸만한 해결책을 내세우지 않으니 꼭 그렇다고 볼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심리서도 보고서도 아니고 소설이다. 그저 심토머들의 상담 내용이 다라면 뭐가 그리 재미가 있을 것이겠냐마는 <캐비닛>엔 음모와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약간의 엽기적인 결말이지만.

 2부 마지막 이야기에 <저도 심토머인가요?>라는 글이 있다. 사실 작가가 심토머라는 신종어를 써가며 이야기를 엮어 가는 것을 보면 처음에도 말했듯이 그 심토머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심토머의 첫 징후는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겪고 있는 스트레스로 나타난다. 직장을 자주 바꾸는 사람, 쓸데없이 뭔가를 모으는데 심하게 집중하는 사람, 지하철만 타면 구토가 나는 보험판매원,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는 핸드폰의 밧데리를 매일 바꾸는 외로운 사람, 일에 빠진 사람, 빚에 쪼달리는 사람, 또 남들이 배부른 소리라고 하지만 자긴 미칠 것만 같다는 주부. 그들은 아직 심토머의 자격이 없지만 언젠가는 그 증상이 심해지면 심토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빌미로 심토머를 만들어 냈다. 사람들이 각자 받고 있는 스트레스와 고민들이 <캐비닛>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현실. 그 현실을 블랙유머속에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문학도 그 다양함이 날로 발전되어 가는 듯하다. 작가의 상상력은 늘 독자보다 한 발 앞이다. 그러니 작가를 하는 것이지만 매번 감탄이다. 캐비닛. 은희경의 말처럼 능청스런 '구라'가 일품인 작품이었다.

 뭐 어쨌거나, 심토머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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