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선 - 아깝지만 괜찮아..]


영화를 얘기하려면 배창호 감독에 관한 얘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한국영화는 다 시시하다고 얘기하던 시절이었다.

스무 살이 채 안되었던 나는 그의 [꼬방 동네 사람들]을 봤다.


어둡고 불운한 사람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휩쓸리면서도

서로를 향한 끈을 결코 놓지 않던 그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그 시절의 나는 사랑이라는 건 저렇게 복잡한 것이구나...

또 인생이라는 건 저토록 덫 같은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후로 [고래사냥1], [깊고 푸른밤], [기쁜우리젊은날], 그리고 [젊은남자]까지..

배창호의 영화들은 대부분 내 정서와 일정부분 잘 맞았고

나는 배창호 감독의 정서를 편안히 수용하면서 그의 영화를 봐왔던 것 같다.

그건 [흑수선]을 보고 난 지금도 크게 변함이 없다..


[흑수선]..

내가 너무 기다려했던 탓일까? 배창호감독도 너무 설레었던 탓이었을까?

우리 앞에 오랜만에 나타났기 때문에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그걸 정돈할 여력이 없었던 탓일까?

우리가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급한 마음이 앞선 탓에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현재시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오래전 황석과 손지혜의 운명에 휩쓸리는 사랑이야기...

이 두 가지 상황을 함께 풀어 가면서 비중을 거의 비슷하게 두고 있다보니...

어떤 것에 중점을 두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차라리 배창호의 장기인 인간의 감정이야기에 비중을 더 두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석과 손지혜의 그 오래고 운명적인 사랑은 너무 간단히 설명을 하는 바람에

감정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랬었구나 하는 정보로만 받아들여졌고

이정재가 풀어나가는 현재 상황들은 억지스러울 정도로

너무도 잘 맞춰 돌아가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마 배창호 감독이 만든 영화가 아니었으면 난 그저 그럭저럭

듬성듬성 틈이 많지만 스케일이 큰 영화 한편을 보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창호 감독은 더 잘 만들어야 했다.. 그는 배창호니까...


이정재는 열심히 맡은 바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해내었다.

그는 무럭무럭 자라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내게 기분 좋은 신뢰와 만족을 준다..

하지만 나는 이정재가 섬세한 역할을 맡았을 때 그의 좋은 느낌이 십분 발휘된다고 느낀다.

그의 윤곽이 강한 얼굴이 섬세한 감성을 드러낼 때

바로 그때만큼 기분 좋은 느낌을 받는 경우도 흔치 않으니까..


그리고 안성기... 그처럼 존재만으로 우리를 압도해오는 배우가 또 있을까?

그가 없었더라면 [흑수선]은 절대 무게중심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연... 난 이미연의 자연스러움을 예뻐하는 편이지만..

70먹은 노파역을 하면서도 초콜렛 cf를 찍는다고 착각한 건 아닌지...

[나라야마부시코]에서 어떤 여배우는(아..이름을 기억하지 못함이 죄송하다)

이가 빠진 노파역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생니를 뽑기까지 했다던데..

그녀만 제대로 인생의 긴 여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어도

영화가 끝난 뒤 조금은 두 사람의 운명에 가슴이 아팠을 것을...


2002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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