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 내용에 결말이 포함되어 있음

 

o 얼굴(顔)

 

소규모 극단에서 8년간 열심히 연기하던 이노 료키치가 거장 이시이 감독의 눈에 들어 비중 있는 조역을 맡게 된다. 

지난 번 영화 촬영 때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클로즈업 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촬영에서는 이시오카 사다부로의 눈에 뜨이지 않을 리 없다. 이노 료키치는 다시 한번 이시오카 사다사부로에 대한 흥신소의 보고서를 읽으며 회상에 잠긴다.

9년 전 좋아지내던 미야코가 자신의 아이를 밴 후 책임을 물어오자 이노 료키치는 그녀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속여 기차에 태워 시골로 가던 중 미야코가 알은 척 했던 이가 바로 이시오카 사다부로이다. 미야코의 사체가 발견되어 수사가 시작되고, 신문에는 그때 마주친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범인으로 짐작되는 이의 얼굴을 기차에서 봤다고 적혀 있었다. 이노 료키치는 이시오카 사다부로와 생활권이 다른 곳에서 산다면 별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흥신소에 의뢰해 그의 거주지를 수소문해 왔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영화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볼 것이 틀림 없다. 그를 살해해야 한다.

이노 료키치는 꾀를 내어 이시오카 사다부로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은 미야코의 친척이다, 범인으로 짐작되는 이를 찾아냈으나 확신이 서지 않으니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직접 와서 확인을 해줬으면 한다, 그런 내용을 편지에 적고 기차삯을 소액환으로 바꿔 동봉해 보낸다. 편지를 받은 이시오카 사다부로는 고민하다 경찰에 편지를 들고 찾아간다.

경찰들은 긴장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범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문 기사에는 이시오카 사다부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고, 이시오카 사다부로의 소재지 역시 계속적인 관찰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사 둘이 이시오카 사다부로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노 료키치와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식당에서 합석을 하게 된다. 이노 료키치는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는 해방감에 눈물마저 흘린다. 약속 장소에는 나가지 않는다.

얼마 후 이시오카 사다부로가 이노 료키치가 나오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된다.이노 료키치가 기차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9년전의 기억이 일순 떠오르며 그가 범인임을 알게 된다.

 

o 잠복(

 

 

o 귀축(鬼畜)

 

다케나카 소키치는 각 지방 인쇄소를 전전하며 기술을 배우던 중 스물 일곱에 오우메라는 여공을 아내로 얻는다. 둘은 열심이 돈을 모아 마침내 인쇄소를 차린다. 형편이 나아지자 소키치는 술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거기서 기쿠요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정을 통하던 밤 기쿠요가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지 묻자 소키치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에서 그렇다는 대답을 한다. 관계는 8년간 지속되고 아이도 셋이나 낳는다.

어느 날 인쇄소에 불이 난다. 주변에 최신 설비를 갖춘 인쇄소가 들어서는 악재까지 겹치자 소키치는 기쿠요에게 돈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기쿠요는 생활비를 졸라대고 소키치는 이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기쿠요가 마침내 인쇄소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 담판을 짓고자 한다. 하지만 담담하게 응대하는 오우메의 서슬에 질려 기쿠요는 아이들을 내팽개친 채 가버린다.

오우메는 아이들을 키울 생각이 전혀 없다며 모든 육아를 소키치에게 맡긴다. 막내 쇼지가 영양실조에 걸려 앓는다. 어느 날 2층 방에 올라가보니 쇼지의 얼굴에 담요가 떨어져 있었다. 저절로 떨어졌더라도 쇼지의 얼굴에 떨어질 위치는 아니었다. 소키치는 오우메가 쇼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홀가분함을 느낀 것이다. 그날 밤 오우메가 집요하리만치 소키치를 유혹하여 둘은 정사를 나눈다. 절정의 순간에 오우메가 요시코를 도쿄에 내버리고 오라고 시킨다. 소키치는 오우메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온다.

오우메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는 큰애인 리이치였다. 리이치는 종이나 석판석의 파편에 그림을 그리고 놀 뿐 말도 별로 하지 않고 오우메를 슬슬 피했다. 오우메는 소키치를 시켜 리이치에게 청산가리를 조금씩 먹이라고 한다. 하지만 리이치는 청산가리 맛을 느꼈는지 먹은 음식을 뱉어내곤 했다.

바다에 빠뜨리려던 계획도 실패하자 이번에는 잠이 든 리이치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린다. 소키치는 리이치가 자신과 조금도 닮지 않았으므로 기쿠요가 부정한 짓을 해서 낳은 아이라 생각하며 죄책감을 덜어내려 한다.

다음 날 낭떠러지 중간에 걸려 있는 흰 물체가 어부들에 의해 발견된다. 아이는 탈진 상태였다. 경찰은 아이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아이는 아빠와 놀러 왔다가 잠에 든 후 떨어졌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아이의 주머니에서 나온 돌을 마침 경찰들의 명함을 전해주러 왔던 인쇄업자가 알아본다. 석판석을 복원해 인쇄하자 거기에 소키치가 인쇄했던 라벨이 찍혀 나온다. 경찰은 살인미수사건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한다.

 

o 투영(投影)

 

다무라 다이치는 도쿄의 일류 신문사에 다녔지만 부장과 불화를 일으켜 사직하고 세토 내해에 있는 S시로 이사한다. 처음 얼마간은 퇴직금으로 그럭저럭 버텨냈지만 점차 형편이 곤란해지자 아내 요리코가 호스티스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다무라 다이치도 계속 낚시나 하며 태평하게 지낼 수만은 없어 <요도신보>라는 지방지에 면접을 보러간다. 말이 신문이지 병석에 누워 있는 사장 한 명에 기자도 한 명뿐인 신문사였다. 하지만 더운 밥 찬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S시에는 시장파과 보좌파가 다투고 있었다. 보좌파는 시의원과 공무원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부정 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장파가 청렴한 것도 아니었다. 히타나카 사장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신문이 시정의 정의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취재를 위해 시청을 어슬렁 거리던 다무라 다이치는 우연히 미나미 토목과장이 덩치 큰 사내에게 곤경을 치루는 장면을 목격한다.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로쿠에게 물었더니 덩치 큰 사내는 이시이 엔키치라는 시의원으로 보좌파를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항만 한쪽에 철사 공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항만 확장 공사가 확정 됨에 따라 철사 공장의 보상비 명목으로 400만엔을 요구했다. 그런데 미나미 토목과장이 한푼도 줄 수 없다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내막을 캐보니 철사 공장의 토지소유주는 이시이 엔키치가 아니었고, 공장 건물 자체도 무허가 건물이었다. 이시이 엔키치는 항만 확장 계획을 미리 입수한 직후 남의 땅에 무허가 건물을 지어 시청의 돈을 우려내려고 했는데 미나미 토목과장에 가로 막힌 것이다.

얼마 후 미나미 과장의 부하 직원 야마시타가 새로 신설된 항만 과의 과장으로 승진한다. 야마시타는 이시이 엔키치의 충복이었다. 승진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끝나고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미나미 과장이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다무라 다이치와 신로쿠는 철사 공장 보상비가 600만엔이나 항만과에서 지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수한다. 미나미 과장은 살해당했다고 전제하고 둘은 조사를 시작한다.

미나미 과장이 죽던 날 밤 가로등을 야마시타의 아들이 공기총으로 쏴 깨뜨렸다는 사실, 사진을 좋아하지도 않던 이시이 엔키치가 촬영회를 연다며 사진사들로 하여금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는 사실에서 다무라 다이치는 미나미 과장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밝혀낸다. 미나미 과장이 한밤중에 이정표로 삼는 불빛을 이들은 거꾸로 만들어내어 자전거가 집과 반대편에 위치한 절벽으로 향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도쿄로 돌아가게 된 다무라 다이치는 의기에 넘치는 히나타가 사장과 신로쿠를 생각하며 가슴 뜨겁게 눈물을 흘린다.

 

o 목소리(聲)

 

다카하시 도모코는 모 신문사의 전화 교환원이었다. 어느 날 기자의 요청에 따라 전화를 연결하다가 실수로 엉뚱한 번호에 연결한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곳이 화장터라며 장난을 친다. 곧 누군가 억지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기색과 함께 전화가 끊긴다.

그런데 다음 날 세타가야에서 주부가 살해된 강도 살인 사건이 보도된다. 도모코가 전화를 잘못 건 곳이 범행 장소였다. 도모코의 제보 덕택에 두 명 이상이 범행했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목소리만으로는 범인을 잡아 낼 수가 없었다. 도모코는 시게오와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 두게 된다.

시게오는 결혼 전부터 낭비벽이 심하고 책임감이 없었는데 결혼 후에도 그 습벽은 여전해서 금새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그 후 시게오는 6개월을 빈둥대더니 수상한 회사에 취직을 한다. 월급은 가져왔지만 봉투에 회사명이 적혀 있지 않았고 명세서도 없었다. 그리고 마작을 한다며 수시로 회사 동료를 데려왔다.

어느 날 하마자키라는 자가 마작에 올 수 없다며 전화를 걸어오는데 목소리를 들은 도모코는 경악하고 만다. 도모코는 평소 하마자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했었는데 전화기를 통해 목소리를 듣자 그가 3년 전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도모코는 무서운 마음이 들면서도 하마자키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들어 모든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한편 시게오의 동료들도 도모코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녀를 의심하여 뒷조사 하게 되고 결국 3년 전 목소리를 들은 교환원이 도모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도모코를 유인해 살해한다.

경찰은 도모코의 사체를 부검한 결과 폐와 코에서 석탄이 나왔다는 점과, 저탄고 인근에서 그녀의 핸드백이 발견된 점을 알아낸다. 유력한 용의자로 시게오의 동료들을 조사했지만 저탄고 까지의 거리를 왕복하기에는 그들의 알리바이 공백 시간이 너무 짧았다.

석탄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에 담아가는 것을 본 한 형사가 용의자들이 저탄고에서 범행이 일어난 것처럼 꾸민 후 사다코를 밀폐된 공간에 가두고 석탄 가루를 흡입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o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地方紙を買う女)

 

시오타 요시코가 <고신신문> 앞으로 선금을 보내 구독을 신청한다. 연재중인 <야도전기>라는 소설이 재미있는 것 같아서 받아보려 한다는 내용과 함께.

신문이 도착하자 요시코는 자신이 찾는 내용이 있는지 꾸준히 신문을 읽는다. 구독한지 한 달 정도 지나자 찾던 기사가 발견된다. 동반 자살한 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다.

<고신신문>에서 구독기간 연장 여부를 묻는 엽서가 도착한다. 요시코는 아무 생각 없이 <야도전기>가 재미없어져서 구독을 종료한다는 답변을 보낸다.

<야도전기>의 작가 스기모토 류지는 불쾌한 생각이 든다. 소설이 점차 흥미 진진해 지려는 판국에 재미 없어졌다는 여성 독자의 엽서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해보니 그녀는 도쿄에 살면서 <고신신문>을 구독한 것으로 보아 소설 때문이 아니라 특정 기사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19일부터라고 명토 박아 신청한 점을 보면 18일 즈음 일어난 어떤 사건이 신문에 나는지 보려는 것 같았고 한 달이 종료된 시점에 구독을 중지했으니 그녀가 찾던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신문에는 동반자살한 남녀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흥신소를 시켜 조사해보니 죽은 남자는 요시코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스기모토 류지는 여러가지로 요시코를 떠본다. 요시코는 스기모토 류지가 무언가 눈치 챘음을 알고 그에게 접근해 친한 척을 하더니 함께 놀러가자고 권한다. 친한 여자 한 명을 더 데려오라면서.

스기모토 류지와 요시코,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가 산 속으로 놀러간다. 요시코가 초밥을 꺼내 스기모토 류지와 다른 여자에게 권한다. 스기모토 류지는 초밥을 못 먹게 하면서 청산가리로 두 남녀를 죽인 후 동반 자살로 위장했을 거라는 추리를 말한다. 요시코는 말도 안된다면서 초밥을 모두 자신이 먹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후 요시코의 유서가 스기모토 류지에게 날아든다. 죽은 남자는 백화점 경비원으로 여성에게 도둑질 했다는 누명을 씌운 후 농락하는 사내였고 거기에 걸려든 요시코는 몸은 물론이고 돈까지 빼앗기고 있었다. 남편이 시베리아에서 곧 돌아오게 되자 요시코는 그로부터 벗어나야 겠다고 결심하여 살해한다. 초밥에는 독이 없었다. 초밥을 먹으면 목이 마를 것이니 주스에 타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시코는 주스는 자신이 마실 것이라면서 유서를 마친다.

 

o 일 년 반만 기다려(一年半待て)

 

29세의 스무라 사토코가 남편을 살해한 죄로 구속당한다.

사토코는 전쟁 중 여전을 나와 회사에 취직했다가 스무라 요키치를 만나 결혼한다. 스무라 요키치는 학벌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 구조조정이 닥쳐오자 해고되었고, 그 후로도 신통치 못한 회사를 전전하다가 결국 백수가 되고 만다.

사토코가 보험외판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가기 시작한다. 밉지 않은 외모와 지적인 말투 덕분에 보험은 잘 팔린다. 경쟁이 심화되자 댐 건설 현장으로 가서 남들보다 발빠르게 마케팅을 성공시키기도 한다. 점차 벌이가 좋아진다.

하지만 남편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고 여자에 빠져들더니 급기야 사토코와 아이들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매일 밤 구타가 반복되던 어느 날 아이들을 때리는 남편을 사토코가 장대를 휘둘러 살해하고 만다. 사정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는다. 사토코는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의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된다.

어느 날 사토코의 변호를 맡았던 다카모리 다키코에게 오카지마 히사오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사토코 사건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오카지마 히사오는 사토코가 남편과의 잠자리를 6개월간 거부한 뒤 술집을 운영하는 자신의 친구 집에 남편을 보내 성적 불만을 해소하도록 유도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토코는 댐 건설 현장에 찾아와 자신이 미망인이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건설 현장의 건장하고 정렬적인 사내와 무기력한 남편이 비교되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은 모두 추측이라고 했다. 다카모리 다키코는 그렇다면 더 들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오카지마 히사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난다. 스무라 사토코는 히사오가 청혼하자 일년 반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년 반 후에 사토코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녀의 유일한 오산은 일 년 반을 기다리게 한 남가자 도망갔다는 것이다.

 

o 카르네아데스의 널(力ルネアデスの舟板)

 

사학과 교수 구무라 다케지는 은사 오쓰루 게이노스케로부터 사사받았다. 오쓰루 게이노스케는 대정익찬회라는 우익 단체에 참가하는 등 우편향 사학자였고 국가주의적 역사론을 강의하고 저술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학계에서 추방당했다.

이를 본 구무라 다케지는 마르크스주의적 유물사관으로 발빠르게 전향하여 교과서, 참고서를 집필해 큰 돈을 번다. 구무라 다케지는 은사를 찾아가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었다. 은사는 생각보다 영락해 있었고 제자에게 비굴했다. 비굴한 이유는 그의 추방이 곧 끝날 것이고, 6개월 뒤에 학교로 복귀하도록 힘을 써달라는 청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시큰둥한 구무라 다케지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오쓰루 게이노스케는 대학에 복귀한다.

오쓰루 게이노스케는 구무라 다케지의 집과 벌이를 보더니 자신도 좌편향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구무라 다케지를 열심히 쫓아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즈음 교과서의 검정 체계가 바뀌더니 좌편향 인사들의 교과서가 무더기로 탈락한다. 구무라 다케지는 더 이상 좌편향 저술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노선을 바꿔타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오쓰루 게이노스케가 한 발 먼저 우편향을 선언하고 나설 참이었다.

구무라 다케지는 오쓰루가 먼저 우편향을 선언하고 나서면 자신의 전향이 두드러져 보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이 날아올 것이 겁이 났다. 그 때 카르네아데스의 널이라는 형법 학설이 떠올랐다. 물에 빠져 널판을 잡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고 살아남더라도 무죄라는 학설이었다. 구루마 다케지는 자신의 정부 류게쓰를 사주하여 오쓰루에게 강간 누명을 씌워 고소하고 그를 학계에서 쫓아낸다.

얼마 후 구무라 다케지가 류게쓰를 살해한 혐의로 입건된다. 그는 류게쓰와 오쓰루의 관계를 사주했으면서도 그 후로 류게쓰가 다른 남자와 관계했다는 점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다툼 끝에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는 류게쓰를 살해한 것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를 흔히 사회파로 분류하는데, 작가 자신도 그러한 분류에 동의했는지는 차치하고 여기 소개된 8편의 단편은 그의 초기작들로 미스터리이면서도 수수께끼 풀이보다는 범죄의 동기, 혹은 범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조건이나 배경에 천착한 작품이 많다.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잠복>은 사실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고 봐도 무방한 스토리이고, 작가 자신도 이를 미스터리 작품으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루하고 틀에 박힌 일상에서 잠시나마 생의 활력을 얻어 탈출을 꿈꾸던 여자는 상대 남자가 검거됨과 동시에 다시 박제와 같은 삶으로 돌아간다. 담담한 묘사가 일품이다.

<얼굴>과 <목소리>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관찰이다. 직접 얼굴을 보았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영화 속 특정 행동을 하는 얼굴은 알아본다든가, 육성을 식별하지 못하다가 전화기 속 목소리는 식별해낸다는 설정이다.

아이를 살해한 후 극도의 욕정을 느끼는 <귀축>의 오우메나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남편을 살해하고 형벌을 가볍게 받는 <일 년 반만 기다려>의 사토코를 통해서는 남녀 관계의 미묘함과 인간 존재의 악마적 속성을 그리고 있는데,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러한 악마적 속성이 특정 조건 하에서 발현되는 과정을 정묘하게 보여준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기타노 다케시의 팬임을 자처했으므로 드라마 <점과 선>은 고대하던 작품이었다. 허름한 모자를 쓰고 지겹게도 걸어다니며 사건의 단서를 수집하는 형사 주타로 역이 기타노 다케시였다.

더운 여름, 여덟 편의 단편을 읽으며 행복을 느낀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지독히도 많이 써냈고, 나는 지금까지 <잠복>을 포함해 그의 책을 세 권 읽었을 뿐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5359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날을 위한 우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화자인 '나'는 46세의 중년으로 구두를 신어본 뒤 착화감을 보고하는 것으로 푼돈을 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구두를 신고 도시의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난다. 친구들의 모습은 영락한 '나'의 모습, 혹은 영락할 수 밖에 없는 그 나이대의 인간을 표상하는 것 같다. '나'는 사소한 사물들과 영락한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하고 분열의 예감에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여자친구 리자는 얼마 전 '나'를 떠났다. 리자만이 유일하게 '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2년간 모은 통장의 잔액을 나에게 맡겨둔 채 어느 날 집을 나갔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녀에게 연락하고 싶지만 함께 사는 친구가 전화를 받아 원치 않는 대화를 해야 할 것만 같아 그만둔다. 대신 '나'는 방에 낙엽들을 흩뿌려 놓는다. 어렸을 적 낙엽을 한쪽으로 모으면서 느꼈던 그런 아늑함을 다시 맛보며 리자를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미장원에 간다. 그곳은 60년대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실내장식과 집기들을 갖추고 있다. 그곳에서 마르고트와 관계를 갖는다. '나'는 미장원에서만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구두 테스터 일의 임금 조건이 나빠진다. 상황이 달라졌다며 사례금이 1/4로 삭감된 것이다. '나'는 구두를 벼룩시장에 내다 판다. 그리고 착화감에 대한 보고서는 순전히 거짓으로 작성한다.

경제적 위기가 눈 앞에 닥쳤는데도 '나'에게는 별다른 대비책이 없고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갈 만한 의지도 없다. 그 즈음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꿈꿨으나 현재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수잔네와 우연히 만나 점심을 함께 한다. 얼마 후 저녁에 초대받은 '나'는 수잔네의 손님들에게 허황된 말을 지껄인다. '나'의 그럴싸한 말에 발크하우젠 부인이 반응을 나타내자 한술 더 떠 기억술과 체험술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내뱉고 만다. 손님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은 눈치다. 손님 중에는 힘멜스바흐도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친구로 사진작가를 꿈꿨으나 재능과 끈기가 없어 실패했고 꿔간 돈을 갚지 않은 자였다.

힘멜스바흐는 '나'에게 신문사 사진 작가 자리를 따내는데 힘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청탁을 위해 신문사를 찾아간 '나'는 엉뚱하게도 기자 자리를 제의 받고, 힘멜스바흐의 부탁은 거절된다. 그에 대한 미안함은 미장원의 마르고트를 힘멜스바흐가 집적거리는 것을 본 것으로 상쇄된다.

발크하우젠 부인이 권태를 이기지 못해 '체험술 연구소'를 운영하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시덥잖은 잡담을 나눈 댓가로 200마르크를 벌고, 그녀는 자신의 치유 효과를 다른 이들에게 광고까지 해준다. 경제적 배경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리자에게 전화를 해서 얼마나 건실한 삶의 배경이 생겨났는지 얘기해 주고 싶을 지경이다.

 

신문사에서 원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 축제에 참가한다. 그곳에서 한 아이가 담요로 자신만의 동굴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본다. 강렬한 자극이 넘치는 축제와 아이의 동굴이 대비된다. '나'는 어쩐지 그 아이가 '나'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다고 생각한다. 기사를 신문사에 넘겨준 후 '나'는 동굴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그곳에 다시 간다. 소년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동굴이 망가질새라 조심조심 발코니를 지나다녔다. 축제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내 교육 수준으로 보자면 나는 중요한 사람일 수 있고 내 지위를 보자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진짜로 중요한 사람들이란 오직 자신들의 학식과 지위를 삶 속에서 서로 융화시켜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단지 교육만 많이 받은 나 같은 아웃사이더들은 어디에 몸을 숨겨야 할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현대판 거지에 불과하다.

 

'나'의 자조적인 고백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식을 써서 밥벌이를 할 곳이란 일제에 부역하는 곳 외에는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지식인들이 스스로 룸펜을 자처한 것이 역사적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빌헬름 게나치노는 '자기 내면의 동의'라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개인(주체)과 사물(객체)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식한 화자는 그 원인을 '자기 내면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분열 상태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면서도 끊임 없이 타인의 삶과 사소한 이웃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곧바로 이를 부정하기도 하는 등 혼란스러운 양태를 보인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여인의 부재, 자신이 유일하게 돈벌이하고 있는 직업을 박탈 당할 위기에 직면해서도 화자는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연인의 부재를 이겨내기 위해 낙엽을 주워다 방에 늘어놓는 행위와 전화를 걸지 않으려 이유를 대는 화자의 행동은 영화 <중경삼림>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중경삼림>이야 말로 의사소통에 관한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금성무는 통조림 유통기한에 의미를 부여하고, 임청하의 구두를 닦아준다. 왕정문은 양조위의 집을 몰래 청소해주고 양조위는 비누와 대화를 나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대조는 금성무가 무선호출기를 버리는 행동과 양조위가 잉크가 번진 냅킨 항공권을 간직하는 행동이다. 금성무는 끝내 계속 달리기를 해야 할 운명이고, 양조위는 액면이 날아간 수표일지언정 통용에 성공할 것이다.

<이날을 위한 우산>의 화자는 금성무의 운명이 될 공산이 크다. 그는 끝내 리자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4232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와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처가에서 함께 산다. 장인은 처가살이를 하면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고 약속했는데 막상 재산을 물려 받고 보니 보잘 것이 없었고, 둘 사이에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호세 볼리바르는 아내를 데리고 엘 이딜리오에 정착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내는 곧 죽고 만다. 혼자 남은 호세는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주었던 수아르 족에게로 가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사냥 등 삶의 지혜를 배운다. 어느 날 뱀에게 물려 사경을 헤매다 기사회상한 호세는 자신이 수아르 족에 남게 될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누시뇨라는 수아르 족 친구도 생긴다.

어느 날 백인들이 밀림에 들어와 총을 난사해 누시뇨가 총에 맞는 사건이 일어난다. 호세는 도망친 백인을 쫓아가 그를 살해한다. 하지만 누시뇨가 원했던 정정당당한 대결이 아니었기 때문에 호세는 수아르 족을 떠나야만 했다. 

다시 엘 이딜리오로 돌아온 호세는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과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책을 읽기 시작한다. 연애 소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년에 두 번 부락을 방문하는 치과의사에게서 연애 소설을 얻어 읽는 것은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런 그의 평온은 백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깨진다. 시체는 살쾡이에게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의 소지품에서 새끼 살쾡이의 가죽이 여러 장 발견된다. 호세 노인은 백인이 살쾡이 새끼들에게 총질을 했다가 어미에게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살쾡이는 인간의 피 맛을 보았고 복수를 위해 또 다시 인간들을 습격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읍장은 호세 노인의 경고를 무시한다. 시체는 거듭 발견된다.

다급해진 읍장이 호세 노인을 수색대에 참가시켜 살쾡이 사냥에 나선다. 읍장의 거듭되는 실수로 사냥이 실패하고 자신의 권위가 추락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읍장은 잔꾀를 내 노인 혼자서 살쾡이를 처리하도록 지시한다.

노인은 이를 수락한다. 그는 살쾡이가 왠지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살쾡이를 추적하던 호세 노인이 카누 밑에 기어들어가 잠이 든 사이 살쾡이가 카누 뚜껑 위로 올라선다. 기척을 느낀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고 둘 사이에 끈질긴 탐색전이 벌어진다. 마침내 살쾡이가 카누 한쪽 땅바닥을 발로 파내기 시작하자 노인이 총을 쏜다. 총알은 살쾡이와 노인 모두를 다치게 한다. 평지에서 대면한 둘은 한동안 상대편을 노리다 살쾡이가 먼저 뛰어오른다. 노인의 총이 살쾡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호세 노인은 명예롭지 못한 싸움이었고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린다.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 읍장, 노다지꾼,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노인은 연애 소설이 있는 오두막으로 걸음을 옮긴다.

 

1949년 칠레에서 출생한 작가는 피노체트 군사 정권 하에서 '산디니스타'에 입대하여 반독재 무장 투쟁을 벌였고, 체포되어 수감된 후에는 국제 사면 위원회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망명길에 오른 그는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를 거쳐 독일에 정착한다. 현재는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세계화를 반대하고 아마존의 파괴에 저항하는 작가로 그린피스와 함께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신념을 소설 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이고 있는 작가 중 한명이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티그레 후안상을 수상했는데 작가는 이 상을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고 있다. 치코 멘데스는 브라질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다국적 기업에 맞서 싸우다가 암살당한 활동가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2735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짜 경감 듀 동서 미스터리 북스 80
피터 러브제이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터 바라노프는 그저 그런 독심술사로 일하다가 리디아를 만나 결혼한 후 그녀가 대주는 돈으로 치과의사 수업을 마치고 개업한다. 리디아는 촉망받는 배우로 연극계에서 다양한 커리어를 쌓아왔으나 최근에는 이렇다할 배역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치른 오디션에서 탈락하자 그녀는 찰리 채플린과의 연줄을 이용해 미국 영화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했다며 월터에게 통보한다. 그녀는 월터의 병원 지분마저 일방적으로 처분하고 만다.

한편 로맨틱한 소설 속 여주인공을 꿈꾸던 28살의 여성 알머는 치과 의사 월터 바라노프를 만난 후 그를 자신의 운명적 상대라고 여긴다. 그녀는 자기 좋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월터와 관계를 발전시킨다. 월터가 리디아가 두고 간 스크랩분 때문에 그녀의 꽃가게를 다시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서로의 열정을 확인한다. 그릇된 열정은 리디아 살해 계획으로 발전한다. 그들의 계획은 리디아 몰래 월터가 모리타니아호에 가명으로 승선한 후 그녀를 살해하고 그 후부터는 알머가 리디아 행세를 한다는 것이었다.

 

월터가 리디아를 처리한 후 알머가 리디아의 방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극도의 긴장과 공포 속에서 밤을 보낸다. 그런데 그날 밤 승객 중 누군가가 바다에 여자가 빠지는 것을 목격하였고 배는 수색을 위해 대서양 한 복판에서 멈춰선다. 그리고 시체 한 구가 끌어올려진다. 알머와 월터는 꼼짝 없이 살인자로 지목될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건져올려진 시체는 리디아가 아니라 캐서린이라는 엉뚱한 여자였다. 선장은 즉시 배에 상주하는 경찰 섹손에게 조사를 맡기는데 승객들은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배에 승선하고 있다면서 그가 사건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름은 월터 듀, 과거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활약한 베테랑 형사였다. 그리고 그 이름은 월터 바라노프가 감상적인 이유에서 가명으로 삼은 것이기도 했다. 이제 월터 바라노프는 꼼짝없이 베테랑 형사 월터 듀가 되어 자신도 살인자이면서 또 다른 살인을 조사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유력한 용의자 잭이 사실은 캐서린의 남편임이 밝혀지고 월터가 권총에 피격당하는 등 사건이 점차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알머는 긴장감과 죄책감에서 월터를 멀리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월터와 알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월터에게 '자기 아내를 죽여 바다에 내던질 사람이 어디있느냐'며 항변하는 용의자의 모습은 블랙코미디 그 자체이다. 

 

골드대거상을 수상한 <가짜 경감 듀(The False Inspector Dew, 1982)>는 구성과 미스터리도 수려하지만 알머라는 인물을 통해 삶의 비밀을 보여준다. 알머의 이야기만으로도 <가짜 경감 듀>는 훌륭한 소설이다.

알머는 타인의 행동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유리할 대로 끌어다 붙이고 욕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녀는 리디아를 살해하도록 월터를 부추기면서도 죄의식을 느끼기 보다는 운명적인 사랑의 예감에 행복해 하는 여자이다.

문제는 그녀가 삶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측면을 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과정에 지불해야 할 '통행료'에는 인색하다는 데 있다. 그녀에게 있어 책임감이란 진정한 자신의 욕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느끼는 부조리한 죄의식일 뿐이다.

월터가 리디아를 살해했다고 판단되자 즉시 그녀는 월터의 범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녀는 자신이 월터에게 느꼈던 사랑이 일시적인 충동이었을 뿐이라 자위하며, 선상에서 만난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그녀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지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가 육지에 닿기도 전에 자신의 이런 상태를 월터에게 털어 놓는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았음을 고백해야만 과거의 행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월터가 알지 못했던 것은 알머는 '유부남'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유부남이 이혼을 하는 순간, 혹은 아내를 살해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유부남이 아니며 이혼남, 혹은 상처남(그도 아니라면 단순 살인자)로 형질전환되고 만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1416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요네즈 - 제2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전혜성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사흘돌이로 전화를 걸어와 여러가지 것들을 하소연 하기 시작하더니 아정의 입에서 '올라와 함께 지내자'는 말이 나오자 그제서야 멈춘다. 함께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정의 온 신경은 엄마로 인해 예민해진다.

아정이 새 일감을 맡는다. 보험판매왕의 삶을 대필해주는 일이었다. 자세한 설명이 번거로워 엄마에게는 책을 쓰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엄마는 딸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엄마 친구들에게 책을 쓰는 큰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었다.

 

상념은 과거로 치닫는다. 아버지는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이북에서는 생물 선생을 했었고, 남쪽에 내려와서는 무허가 약방을 차려 운영하였다. 아버지는 '술독을 깔고 앉은' 사주 팔자였다. 술을 먹고 들어오면 소리 안나는 물건부터 때려부수기 시작하여 급기야 온 집안을 들어엎었고, 엄마가 마실을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기라도 할라치면 불꺼진 약국으로 데려가 엄마 위에 올라타 묵묵히 주먹질을 해댔다.

딸만 내리 셋 낳은 죄로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주먹질과 패악을 참아냈고, 그럴수록 아정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엄마는 아정이 천재라고 믿고 싶어했고, 그런 바람이 어느 날부터인가는 확신으로 변했다. 아정은 엄마의 과도한 기대와 확신에 숨막혀한다. 엄마는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변비약 등 각종 약꾸러미를 달고 살았고 담배를 배웠으며 '점잖은' 신사들을 만나러 다닌다.

의사나 판검사가 되라는 엄마의 기대를 배신하고 아정은 서울로 대학을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 대학원에 다닐 즈음 가세가 기울어 취직하여 돈을 벌기 시작한다. 동생 아라와 살던 방의 허물어진 벽지를 지금의 남편이 새로 발라준 날 아정은 그와 결혼하기로 맘 먹고 아라를 그곳에 남겨둔 채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엄마가 가벼운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아버지는 발빠르게 대처하고 열부 노릇을 했다. 그 덕에 의사들의 예상보다 빨리 엄마는 회복된다. 얼마 후 아버지가 같은 병으로 쓰러진다. 아버지는 만 하루를 집안에 방치된다. 앰뷸런스라도 부를 생각을 못했느냐는 아정의 타박에 엄마는 심상한 말투로 앰뷸런스도 못 들어오게 좁은 길목을 탓했다. 마치 아버지라는 원수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투로 들린다. 아버지를 보러간 어느 날 와병중인 아버지가 변을 놓치고 만다. 엄마는 변을 치우는 일을 온전히 도우미 아줌마에게 쓸어 맞겨놓는다. 아버지의 변냄새에 끼어든 시큼한 냄새에 아정은 비위가 상한다. 시큼한 냄새의 정체는 엄마가 머리에 뒤발해놓은 마요네즈였다. 아정은 토악질을 하고, 얼마 후에야 아이가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험여왕의 삶을 대필하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요통이 겹쳐 짜증이 극에 달한 어느 날 돌아와보니 엄마가 화장실에서 변을 놓치고 쓰러져있었다. 머리에는 예의 마요네즈를 뒤발한 채. 콜택시만 타고 다녀야 한다고 고집하고 방에서 담배를 피워대며, 아이들에게 사소한 것조차 양보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엄마에게 아정은 급기야 더 이상 함께 살기 어렵다는 말을 뱉고 만다.

엄마는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아정의 외할머니 이야기를 해준다. 아정의 외할머니는 몰락한 양반가의 딸로 씨받이로 들어가 육십 먹은 노인네를 수발하다가 엄마를 낳는다. 얼마 후 아들을 낳지만 남편과 아들 모두 죽고 만다. 집안에 드나들던 총각과 야반도주를 했다가 한 달 뒤에 돌아온 외할머니는 엄마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때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 시집을 간다. 하지만 아버지는 못말리는 술꾼이었고 외할머니가 빌려간 돈을 갚지 않는다며 엄마를 닦달한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가서 패악을 떤다. 결국 견디다 못한 외할머니가 서울로 재취자리를 얻어서 떠나버린 후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사과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얼마 후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끝내 외할머니에게 패악을 떨었던 것이 한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이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 없는 설움이 어떤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아정은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를 견디지 못한 딸'이 되었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고 어떻게든 자신의 말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가 젊었을 적 만났던 '점잖은 신사'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신사는 당시 몰려다니던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엄마는 아정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때까지는 어쨌든 집에 머물러야 겠다고 말하고, 아정은 엄마와 화해할 시간을 벌었다는데 안도한다.

 

제2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이다. 신인작가가 쓴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쓰여진 소설이다. 헌신적이기만 한 어머니,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책임감 강한 큰 딸은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자신을 학대했던 남편을 미워하며 남편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머리결을 살리기 위해 마요네즈를 뒤발하는 어머니, 동생을 남겨둔 채 음습한 방에서 결혼을 통해 탈출하고 엄마를 못 견디겠다고 소리치는 딸이 나온다. 그들의 모습은 불편하다. 왜냐면 그들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떤 '전형'에서 많이 멀어진 그들을 화해시키고 작품을 갈무리하는 솜씨도 훌륭하다. 맘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내지르고 난 연후 '아차'하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끼어든 전화. 분명 작위적인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둘은 화해를 위한 사건을 만들어냈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세 자매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중매 섰던 아줌마 아저씨야 말로 모든 사단의 시작이라며 키득대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장례는 슬픔이 켜켜이 쌓여 삶을 까라지게 하는 과정만은 아니다. 분명 그 사이에 웃음이 끼어든다.

 

나의 할아버지는 구십이 넘어서 돌아가셨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호상' 이니 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장례가 주는 그 무거움과 혈육이 돌아가셨다는 슬픔의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작은형님의 문상객이 향을 피우기 위해 영전에 다가섰을 때였다. 촛불은 영전 위쪽에 있었고, 문상 경험이 적은 그 객은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영전 아래쪽만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치 영전 위쪽으로 시선이 올라가면 큰 불경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도무지 향에 불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몰라 난망해하던 그 객은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기왕에 꽂혀 있는 향 끝 부분의 빈약한 발간 점에 새 향의 끄트머리를 접촉시켜보려는 안타까운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향 끝은 부들부들 떨려 발간 점에 접촉되지도 않았지만, 오른쪽 손목을 왼손으로 받치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발간점에 접촉시켜도 불이 붙을리 만무였다. 객은 상주들 모르게 발간 점에 바람까지 불어넣고 있었다. 그때 우리 삼형제는 분명 웃었다. 웃으면 안되니까 앙다문 입은 폭발하기 직전이었고 얼굴은 벌개졌으며 작은형의 그 어리숙한 객이 우리에게 웃음을 불러일으켰음을 탓하듯이 작은형 옆구리를 찔러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가장 숭고하고 엄숙해야 할 시기에도 인간은 웃도록 되어 있다고.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0299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