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장의 참극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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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장(名琅莊)은 메이지(1867~1912)의 권신 후루다테 다넨도(=후루다테 구라노스케)가 후지산 남쪽에 지은 저택이다. 그는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이 저택을 짓고 암살을 막기 위해 집안 곳곳에 미로와 탈출구를 설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인가부터 명랑장을 미로장(迷路莊)이라고 불렀다.

후루다테 다넨도가 메이지 45년 천수를 누리고 영면한 뒤 2대 가즌도 백작이 명랑장의 주인이 된다. 그는 선대에 비해 평범한 인물이었고, 이런 저런 사업에 실패한 탓에 쇼와 2년 금융공황 시기 파산하고 만다. 선대가 물려준 재산 대부분을 상실하고 겨우 명랑장만 건진 그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즌도 백작의 첫째 부인은 다쓴도라는 외아들을 남겨두고 일찍이 세상을 떴다. 후처로 맞아들인 가나코는 55세의 가즌도 백작에 비해 스물일곱 살이나 어린 28세였다. 화족의 딸로 빼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집안이 몰락해 후처로 들어온 그녀에게서 7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자 가즌도 백작은 차츰 그녀가 자신을 차갑게 대하고 경멸한다는 망상에 빠지고 만다.

한편, 별장에는 오가타 시즈마라는 일꾼이 있었는데 그는 가나코의 소개로 들어온 청년이었다. 가즌도는 오가타 시즈마와 가나코가 불륜 관계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쇼와 5년 가을 10월 20일, 명랑장 안뜰 정자에서 엄청난 분노에 찬 외침과 비명이 들려왔다. 하인들이 달려가 보니 거기에는 가나코 부인과 가즌도 백작이 칼에 찔려 무시무시한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었다. 또 현장에는 어깻죽지에서 잘라낸 듯한 왼팔이 있었는데 왼팔에 붙어있는 작업복 한쪽 소매로 보아 오가타 시즈마의 한쪽 팔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자에서 오가타 시즈마와 가나코 부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가즌도 백작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뛰어들어 단칼에 가나코를 베어 죽이고 오가타 시즈마의 한쪽 팔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도를 떨어뜨리거나 빼앗겨 거꾸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오가타 시즈마의 핏자국은 명랑장 뒤쪽 절벽 기슭의 동굴까지 이어졌으나 끝내 그의 시체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명랑장은 이후 3대인 후루다테 다쓴도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하지만 다쓴도는 명랑장을 건사할 형편이 되지 못해 신흥 재벌 시노자키 신고에게 소유권을 넘기는데, 엽기적인 것은 미모의 아내 시즈코 마저 넘겨주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명랑장을 인수받은 신고는 저택을 활용해 호텔로 개조하고 운영하는데 어느 날 외팔이 남자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명랑장을 떠돌자 신고는 사건을 긴다이치 고스케에게 의뢰하는데, 역시나 그나 명랑장에 도착한 직후 후루다테 다쓴도, 다쓴도 생모의 동생인 덴보 구니타케, 여종업원 다마코 등이 차례로 죽어 나간다.

명장장의 종업원이자 혼혈의 전쟁고아인 다혈질의 하야미 조지, 가나코의 친동생이자 시즈코의 과거 연인인 야나기마치 요시에 등 새로운 인물이 떠오르지만 정작 이렇다할 혐의점을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명랑장 지하의 미로는 점차 붕괴해 간다.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외팔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시나 괴기스러운 분위기 연출에는 일가견이 있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답게 명랑장이라는 저택을 둘러싼 기괴한 사건들로 긴장감이 한껏 고조된 상태에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긴다이치 고스케가 등장하는 작품이 으레 그렇듯 죽을 사람이 모두 죽어 나가야 범인이 밝혀지는데, 수수께끼 풀이를 모두 끝나면 초반부의 피가 식을 듯한 긴장감에 비하면 너무나 형편없는 결말부에 실망하고 만다.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평가는 높게 주기 어렵지만 메이지 시대의 망령과 유령이 쇼와 시대에서 결착되고 마무리되는 전개는 나쁘지 않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미스터리 버전으로 편집한 것이라고 보면 어떨지.

끝간데 모를 미로와 장치들이 시간이 흐르자 끝내 붕괴되어 쥐떼가 들끓고 그 쥐떼가 사람을 갉아 먹는 엽기적인 장면, 몰락한 화족들의 허세만 남은 모습과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벗어 던지는 모습들, 전쟁고아인 혼혈아 하야미 조지의 되바라진 성격 등을 통해 요코미조 세이시는 변화된 시대의 새로운 모랄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기괴한 이야기 속에 담아 피력하는 듯 하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10127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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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범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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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의회 의원 도도 야스유키와 전직 배우 도도 에리코 부부가 불 탄 저택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도도 야스유키의 목에 끈 모양 흔적이 있었고, 도도 에리코 역시 욕실에 목 메달린 상태였으므로 처음에는 자살사건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감식 결과 도도 에리코의 목에서 발견된 삭조흔이 두 종류로 드러남에 따라, 누군가 그녀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어설프게 자살로 위장하려 했음이 밝혀진다. 경시청은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도의원 부부 살해 및 방화사건' 수사에 착수한다.

얼마 뒤 익병의 범인이 도도 야스유키가 평소 이용하던 태블릿을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협박 편지를 보내온다. 그는 도도 부부의 추악한 과거를 폭로하겠다며 거액의 돈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자 금액을 낮춰 재차 협상해 온다. 경찰은 도도 부부의 딸 내외와 협의한 뒤 3천만엔을 범인이 지정한 계좌에 입금하고, 인출책 체포를 시점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기로 한다.

한편, 주인공인 수사1과 고다이 쓰토무 순사부장은 관할 경찰서 야마오 요스케 경부보와 짝을 이뤄 범인을 추적한다. 고다이 쓰토무는 도도 에리코(본명 후카미즈 에리코, 예명 후타바 에리코)의 과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야마오 요스케 경부보가 도도 에리코와 동창이었고, 도도 야스유키는 그들을 가르친 교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도도 에리코가 학창시절 사귀었던 나가마 가즈히코가 야마오 요스케와 친구였다는 사실, 나가마가 졸업한 뒤 석연찮은 이유로 자살했다는 사실 등을 알게낸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야마오의 태도였다. 그는 자신이 도도 에리코와 동창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사건 해결에 실마리가 될 내용도 일부 비밀에 붙이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좌에서 돈이 인출된다. 경찰은 니시다 간타라는 인출책을 긴급 체포하여 취조하는데, 이 과정에서 인출을 의뢰한 사람이 야마오 요스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긴장한 수사본부는 즉시 야마오 요스케를 임의동행으로 연행하여 취조를 시작하는데 의외로 야마오 요스케는 큰 저항 없이 자신이 협박범이라고 순순히 시인한다. 하지만 경찰은 그의 진술 외 어떠한 물증도 없어 검사가 과연 기소를 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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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대로 정치가 집안이었던 도도 야스유키는 교사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인을 꿈꾸는 야심 만만한 젊은이였다.

그는 제자 후카미즈 에리코와 육체 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카미즈 에리코는 도도 야스유키를 동경했기에 그에게 추문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마음에 위장 애인을 만들었는데, 그가 바로 나가마 가즈히코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도 야스유키와 후카미즈 에리코의 애정 행각은 우연히 야마오 요스케에게 발각되고 만다. 후카미즈 에리코는 야마오 요스케에게

침묵해줄 것을 요구했고, 졸업 후 그 댓가로 자신의 육체를 하루 동안 제공한다.

한편, 야마오는 친구 나가마에게 도도 야스유키와 후카미즈 에리코가 연인 관계이며 나가마는 위장 애인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에리코에 대한 미련을 끊고 대학입시에 열중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지만 나가마는 폭주하여 도도 야스유키를 등산 나이프로 상처입힌 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겁을 집어먹고 절망하여 자살하고 만다.

이 사건 이후 도도 야스유키와 후카미즈 에리코도 이별하고, 시간이 흐른 뒤 후카미즈 에리코는 자신이 야마오 요스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몰래 출산한 에리코는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긴 채 배우로 데뷔한다. 이때 맡긴 아이가 이마니시 미사키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에리코는 데뷔 후 다시 도도 야스유키와 만나 사귀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딸인 이마니시 미사키가 안타까워 보육원에 보러 다녔고, 성년이 된 뒤에는 백화점 VIP 담당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뒤 실적을 올려주었다. 또한 손녀 마나미의 교육에 관해 상담하는 등 사뭇 자상한 어머니 역할도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눈치챈 도도 야스유키가 제자이자 경찰인 야마오 요스케에게 아내의 행적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한다. 야마오 요스케는 조사 과정에서 이마니시 미사키가 사실은 자신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도도 야스유키에게는 이마니시 마사키는 도도 야스유키와 에리코가 헤어지기 직전 가진 관계에서 생긴 아이이며, 에리코는 헤어진 뒤 도도 야스유키의 장래를 위해 몰래 출산했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이로써 도도 야스유키 역시 이마니시 미사키가 사실은 자신의 아이라고 착각하고 만다.

도도 에리코와 이마니시 미사키의 모녀 관계는 끝내 잘 풀리지 않는다. 손녀 마나미가 마약 판매에 손을 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도도 에리코는 평온한 시기에는 이마니시 미사키에게 엄마로써 자애로운 모습으로 대했지만, 막상 마나미 문제가 드러나자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봐 야멸찬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고 비난했다. 이에 격분한 이마니시 미사키가 자신의 친모인 도도 에리코를 목졸라 살해한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도도 야스유키는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한) 이마니시 미사키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스스로 자살한 뒤 타살인 것처럼 꾸민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야마오는 자신이 범인인 것처럼 꾸민 뒤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흐지부지 되도록 만들기 위해 가공의 범인 역할을 자인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 40년 기념작으로 <백조와 박쥐>에 이어 고다이 쓰토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고다이 쓰토무는 냉철하고 강인한 이미지의 가가 교이치로나 논리적인 사고로 퍼즐을 풀어나가는 유카와 마나부와 달리 평범한 이미지에 어쩐지 지쳐보이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명탐정은 아니지만 구두 밑창을 닳아뜨리며 범인에게 한발 한발 다가서는 <점과 선>의 주인공 미하라 가이치 경사를 떠오르게 하는 면도 있다.

<가공범>에서 공감되지 않는 부분은 바로 도도 에리코와 야마오의 관계이다. 야마오의 입을 막기 위해 도도 에리코가 졸업한 뒤에 몸을 허락한다는 것도 어색하지만, 그 관계에서 아이가 생기고 몰래 낳아 보육원에 맡긴다는 설정 역시 도도 에리코의 야멸차고 계획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매우 억지스럽다.

또한 정치인으로 잔뼈가 굵은 데다가 공권력을 남용하는데도 능란한 도도 야스유키가 유독 자신의 딸로 짐작되는 이마니시 미사키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자 별다른 대책을 고민하지도 않고 주저 없이 자살해버리는 장면은 아무리 또다른 자녀의 정치권 진입을 목전에 둔 시점임을 감안해도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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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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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세의 무직 남성이 사망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구조대원은 숯이 피워진 그릇,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남성의 사인을 자살로 결론 짓는다.

하지만 철수 직전, 옷장에서 크기가 제각각인 원통형 유리병 스무개 남짓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유리병 안에 인간의 팔다리와 장기가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는 최소 2명. 남성과 여성으로 추측되는 두 시신은 보존된 시기가 달라 보였다. 문제는 셰바이천이라는 이 남성이 20년간 화장실 딸린 방 안에서만 생활한 극단적 은둔형 외톨이라는 데 있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옆집 사는 30년지기 친구이자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과연 시신은 누구인가? 셰바이천은 이들을 죽인 범인일까? 만약 그렇다면 동기가 무엇일까? 경찰의 집요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었던 칸즈위안의 알리바이가 확실해지자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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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린궈원(람궈완)이라는 택시운전기사가 경찰에 체포된다. 죄명은 연쇄살인. 택시운전사였던 그는 4명의 여성을 납치하여 강간 살해하였고, 이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하거나 사진 찍어 현상하였으며, 성기 일부를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술에 절여 보관하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인 인물이다.

그가 체포된 것은 어이 없게도 사진 현상을 맡겼다 들통 났기 때문이다. 친구가 운영하는 현상소에 필름을 맡겼는데 공교롭게 기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친구가 다른 현상소에 필름을 건냈고, 현상과정에서 기괴한 범죄 현장을 본 직원이 경찰에 신고하여 검거된 것이다. '유리병 살인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이 <고독한 용의자>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다.

20년 전 쉐바이천은 불치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친 칸즈위안에게 자신이 죽은 뒤 그 사실을 숨겨 달라고 부탁한다. 외할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맨션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삼촌이 자신이 죽게되면 어머니를 꼬드겨 소유권을 빼앗아갈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리병에 든 첫 번째 시신은 쉐바이천이다. 칸즈위안은 쉐바이천이 죽기 직전 일상 생활에서 주고 받을 만한 대화들을 녹음기에 녹음한 뒤 쉐바이천이 퇴사 스트레스로 은둔형 외톨이가 된 것처럼 설정하고 쉐바이천이 죽은 뒤에도 그의 어머니를 속이기 시작한다.

한편, 칸즈위안은 과거 불 난 건물에서 '더듬이'라는 별명의 친구 아위안이 도와준 덕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고로 '더듬이'는 아버지를 잃었고, 갈 곳 없게 된 '더듬이'는 칸즈위안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다.

그러다 쉐바이천이 죽자 '더듬이'가 쉐바이천 역할을 하면서 그 방에 살게 된다. 진짜 은둔형 외톨이는 '더듬이'였다. 그러다 '더듬이'가 궈쯔닝이라는 여성과 웹상에서 친구가 된 뒤 서로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데, 궈쯔닝이 쉐바이천의 집에 왔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궈쯔닝은 쉐바이천의 외삼촌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다 이를 비관한 것이었다. 궈쯔닝이 바로 두번째 유리병의 시신이었다.

찬호께이는 만약 쉐바이천이 20년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범죄도 저지를 수 없다는 대전제를 독자에게 제시한 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내면서 전제를 깨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진행시킨다. 이 수법은 때로 절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리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쉐바이천 역할을 하던 '더듬이'가 자살하고 시신이 담긴 유리병이 발견되면서 자살사건은 살인사건으로 방향 전환된 뒤 모든 증거들이 쉐바이천의 외삼촌을 향한다. 이 과정에서 서술 트릭, 바꿔치기, 시점전환 등 미스터리 소설의 각종 기법이 현란하게 구사되는데 기술적 측면에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20년을 못 봤다 해도 '아들을 구별 못하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과연 독자에게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3.67>이 그의 전성기이고 이후 죽 내리막이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이번 작품에서도 확인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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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230
진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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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규는 1945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국어 교사와 미술 교사를 했으며 시인이자 화가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은 그가 살고 있는 전주 지방 풍경과 견훤, 이성계, 정몽주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동학 혁명과 광주민주화항쟁, 정여립의 난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감상, 그리고 꽃과 별, 눈과 산 등 자연에 관한 완상을 노래한 시집이다.

1부에서 백제 장수 견훤에 대해 노래하는데 <눈썹 끝에 연꽃 피는 - 덕진채련> 에서

젊은 장수 견훤은 반월성 짓고 눈 눈 지그시 앉아 눈썹 끝자리쯤 해서 연못을 팠습니다.... 아마도 무왕 대에 현신하지 않은 미륵을 당신은 꼭 보리라 믿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는 것을 보면 사뭇 흠모의 정이 느껴진다. 실패했지만 그의 의지는 미륵세상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까지 평가하는 것을 보면...

한편, 이성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깎아 내리는데 <좁은목 약수를 마십니다 - 한벽청연>에서

도조인지 익조인이 환조인지, 아무튼 이태조 웃할아버지는 소싯적 전주천 한벽당 돌아 병풍바위 밑에 소낙비를 피하다가 그 바위 무너지는 순간에 빠져나와 목숨을 구했답니다. 저고리도 벗어던지고 빠져나왔습니다만, 피하지 못한 동네 아이들은 그 자리에 다 죽고 말았답니다

라며 동네 사람들이 약숫물이라며 줄을 서서 떠다 마시는 좁은목에 대해 연관된 고사를 들먹이며 빈정댄다. 기막힌 운을 타고 나서 너는 살아남았을지 몰라도 그때 아이들은 죄다 깔려 죽었는데 거기 솟아나는 약수가 한을 품지 않았겠느냐 하는 으스스함마저 느껴진다.

시인은 그림도 그리는데 그러한 시각적 정서와 청각적 요소가 시에 담겨 즐거움을 준다.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솔 꽃가루 쌓인

토방 마루

소쩍새 울음 몇

몸 부리고 앉아

피먹진 소절을 널어

말립니다

산 발치에서는 한바탕

보춘화 꽃대궁 어지럽더니

진달래 철쭉 몸 사르더니

골짝 골짝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쌓인 송홧가루

밭은기침을 합니다.

<가을 도드리 2>

하늘과 땅 사이를

기차 하나가 지납니다

누런 들과

푸른 하늘을 가릅니다

세상은 미완성의 수채화

첫사랑의 뒷모습 같은

머플러 한 장 나부끼며

기차 하나

그림 속을 갑니다.

겨울산에서 하산하면서 완상에 잠기는 시인의 모습을 그린 <겨울산 어둠은>도 반복해서 읽게 된다.

<겨울산 어둠은>

산을 내리는 우리 걸음보다

몇 발 앞서 명명한 어둠이 갔다

뒤돌아보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척하는 것인가?

멈칫거리는가 다시 보면

저만큼 가고 있었다

내리막을 거침없이 훑다가도

농부들이 흘리고 간 것들까지

무엇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골짜기의 마른 고춧대, 무명대

꺾인 억새 잎에도

북 장단 두어 번 잊지 않고

매김하고 갔다

마른 싸릿가지 꺾인 채로

어둠 속을 버티어 있는 것을 보고는

봉우리에 첫눈 내리던 날

자작나무 늘어서서

휘파람 불던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산비탈에 누운 고사목 고자빠기

'라'음으로 마른기침을 했다

아득히 산 너머

눈 소식이 오고 있었다.

팬지꽃은 80년 5월 광주 시가지에 피었던 꽃이다. 시인이 전주가 아닌 광주를 노래한 시 세 편이 있다. 그중 한 편을 옮겨 적어본다.

<팬지꽃 1>

광주에 가면

서성거리는 사람을 만난다

충장로에나 금남로에나

특별한 일이 없어도

거리에 나서는

얼굴이 팥죽 같은 사람을 만난다

밤늦은 시간에도

옷 깨끗이 다려 입고

짖어대는 자동차

끄떡도 않고

골목골목을 둘러보며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난다

바람 부는 날도

말 한마디 없이

무등산 아래 지산동까지

팬지꽃 한 송이까지 챙기며

서성이는 사람을 만나다.

제6부는 그 빈자리 연작인데 마음을 끄는 시 한 편을 옮겨 적어본다.

<낙숫물 -그 빈자리 6>

깊은 밤 나를

깨우는 것은

아득한 빛

유년의 사금파리처럼

낭자한 빗줄기의

끝, 먼 강을

건너며

가슴으로

낙숫물.

<문학과 지성사> 창간 맴버인 평론가 김치수는 해설 <고향에서 부르는 행복의 노래>에서 이렇게 쓴다. 소설가와 시인을 구분하는 독특한 시각이라 기록해둔다.

소설가는 삶의 고통이나 불행을 그 뿌리부터 결말까지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시인은 그러한 지속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거나 발견하는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노래하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이 사라졌고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불행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 반면에 시인은 모든 사물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나 자신의 고향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그때마다 행복을 노래한다... 소설가는 불행을 이야기하기 위해 태어난 비극적 운명의 소유자라면, 시인은 매순간의 삶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노래하는 초원적 세계관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진동규는... 전주... 고향에 사는 행복을 누리고 있고 그것을 노래하는 드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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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집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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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연애시집>을 읽는다. 와닿는 시가 별로 없다.

그가 노래하는 산이나, 강이나, 들꽃들의 이미지가 나의 파장과 일치하지 않고, 정념(情念)이 느껴지지 않는 연애 이야기는 어쩐지 허무하다.

허위의식까지야 아니겠지만 순하고 깨끗한 것들이 연애의 속살을 이루고 있어 아프지 않고 곱고 착하기만 하다. 평이한 시어가 주는 편안함 이면에서 느껴지는 헛헛함.

그래도 게중에 여러 번 읽은 시를 추려서 적어본다.

<빈 들>

빈 들에서

무를 뽑는다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처럼

나는

하얀 무를 들고

한참을 캄캄하게 서 있다

때로

너는 나에게

무 뽑은 자리만큼이나

캄캄하다

<초가을1>

가을인갑다

외롭고, 그리고

마음이 산과 세상의 깊이에 가 닿길 바란다

바람이 지나가는갑다

운동장가 포플러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어제와 다르다

우리들이 사는 동안

세월이 흘렀던 게지

삶이

초가을 풀잎처럼 투명해라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054163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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