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인류 역사가 곧 계급투쟁의 역사'임을 선언하고, '중요한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라며 끝을 맺는다. 1848년 영국에서 발간된 이 소책자는 이후 수많은 변혁운동과 혁명에 영감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발생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은 소련과학아카데미를 만들고 연방 옹호를 위한 각종 교육자료를 발간했는데, 상당히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그리고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련공산당사> 따위가 그것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이 교과서는 '모순'을 중요하게 다루고 두 가지로 구분했다.
타협과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한 '적대적 모순'과, 부분적 차이와 대립은 있으나 타협으로 해결이 가능한 '비적대적 모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르면 계급 갈등은 '적대적 모순'이므로 대화와 타협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계급갈등 해소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유혈혁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기득권 계급이 자신의 기득권을 평화적으로 내놓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등의 복잡다단한 층위와 중첩을 '주요/부차', '적대적/비적대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증명'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대담론을 밀어붙인 진보 진영에서 페미니즘은 어떤 양태를 띠었을까?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여성 문제가 계급 모순의 하위 문제로 중첩되어 나타난다는 입장이다. 즉, 여성노동자는 '여성차별'로 인해 남성노동자 보다 가혹한 조건에서 노동력을 착취 당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재생산의 기본단위를 가족으로 설정하고(가족에 전가하고), 여성을 남성의 하위 파트너로 자리매김으로서 계급 내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주요 착취 대상인 남성노동자를 보좌하고, 2세 노동자를 양육하며, 필요 시 부분노동자(파트타임)로서 착취도 당하는, 어찌 보면 노동자 재생산 기본단위의 최말단을 차지한다.
이는 육체노동의 비중이 높고(남성이 선호되는 이유), 요리, 청소, 육아 등 가정노동을 대신해줄 수단이 충분치 못해, 오롯이 여성 한 사람 분 노동력이 가족 재생산을 위해 필요했던 시기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물론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여성이 그러한 위치에 있어도 된다는 '당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원하는 가족재생산의 '효율적 형태'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육체노동의 비중 축소, 가정노동력을 대신할 수단의 증가,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 공교육 비중 확대 등으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 사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권력지형으로까지 진화하고 고착 되었다.
한편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말 그대로 거대담론에서 파생된 이론으로, 주요모순 이외의 문제에 대응할 만한 미세 전략이 부실하다. 기껏해야 여성차별 문제는 계급문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해소된다는 낙관론만 있을 뿐이다.
즉 노동자가 착취에서 해방되고, 공공사회가 자녀 양육을 분담하는 사회주의가 된다면 여성에게 부여된 '남성의 하위파트너' 및 '2세 양육 담당자' 역할은 자연 해소된다는, 어찌 보면 상당히 순진한 이론이다.
그런 이유로 진보진영에서 남녀모순은 계급모순 해결 이후 처리할 별도 과제로 취급되며 우선순위가 밀려 왔다. 그 어느 곳보다 평등한 남녀관계를 지향해야 할 운동권 내부에서 성범죄가 자주 발생하고, 뒤처리도 기묘하게 진행되는 이유가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반성으로 부터 새로운 여성해방이론이 탄생하지는 못한 듯하다. 새로 태어난 최신판 페미니즘 이론은 20세기 초반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를 표지갈이만 해서 새로운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대해서는 고차원적인 분석이 필요 없다. 자본가 대신 '남성'을, 노동자 대신 '여성'을 대입하면 99% 똑같기 때문이다. 혐오에 기반한 극단적 남여 대립을 이론의 핵심으로 하므로 기존 페미니즘과 구분하기 위해 표지갈이 페미니즘은 레디컬 페미니즘이라고 하자.
<82년생 김지영>의 해설을 쓴 김고연주의 글을 내가 임의로 써 넣은 괄호 안의 단어로 치환해 읽어보면 어떤 느낌인가.
다양한 정체성들 중에서도 자기 정체성의 핵심은 '성(계급)'이다. '여성(노동자)'이라는 정체성에 주목하면 한국인의 절반은 상당히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성(계급)에 기반한 "젠더(계급성)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함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 모든 공적 영역에 작동하는 강력한 '체제'" 이기 때문이다.(180p)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노동자계급에게 도덕은 없다' 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있다. 얼핏 보면 과격한 이 문장은 '현재 법률과 도덕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계급에 유리하게 제정한 것이므로 노동자계급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가 도덕의 판별 기준이다' 라고 해석된다.
레디컬 페미니즘은 이 문구를 '성인지감수성' 이라는 용어로 치환하여 써먹는다.
현행법(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제도, 규칙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남성'이 자신들의 성에 유리하게 제정한 것이므로 여성은 여성만의 별도 '성인지감수성'으로 성추행여부 등을 결정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갸륵한 투쟁 노력으로 성추행 관련 범죄는 '유죄추정원칙'이 적용되는 듯하다. 성추행 고발을 당하면 무고죄로 대항할 수 없고, 무죄 판결을 받아도 무고죄 확정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성혐오'를 통해 '여성해방'을 이룩하자는 레디컬 페미니즘이 과연 여성들의 광범위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확산된 것일까?
나는 레디컬 페미니즘을 표방한 강좌, 교육, 도서출판 등 돈이 되는 곳에 종사하는 자들이 안정적 수입원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를 조장한다고 느낀다. 이들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PPT를 띄워 놓고 주장하는 내용은 혐오와 공포의 조장, 남성에 대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이 주조를 이룬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싱글맨>에서 조지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집단이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고 자기 집단이 가장 심한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죠......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은 자기 상황을 미워합니다. 그런 상황을 일어나게 만든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미움의 세계에 있습니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던 진보프로젝트도 실패했지만, 수조원대 자산가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단지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동일한 모순과 질곡을 겪는다고 주장하는 레디컬 페미니즘도 실패할 것이다.
돈이 되지 않는다고 판명되는 시점이 되면 그들은 가뭇없이 사그라들 것이다. 이들이야 말로 자본주의 속성을 가장 잘 파악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니, 강사니, 무슨무슨 단체니 하는 타이틀에 기댄 소수 '전문가'가 자기 집단의 영향력을 부풀려 과시하고 국회의원 비례대표 자리를 얼씬대거나 책을 팔아먹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사이비 종교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저 그런 영향력에 그칠 것이다. 혐오에 기댄 사이비 정의는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82년생 김지영>에 관해선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작품이 발표되기 20년 전인 90년대 초 방영된 <아들과 딸>이 차라리 균형잡힌 시각이었다는 느낌이다. 가부장제의 질식할듯한 분위기와 고통받는 딸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남성 역시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제시함으로서 혐오와 부정이 아니라 인정과 대안을 촉구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작가상>은 가급적 구입해서 챙겨 읽는데 <82년생 김지영>은 <부초>, <머나먼 쏭바강>, <숲속의 방>,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옆자리가 아니라 <철수사용설명서> 옆자리에 꽂아 두어야겠다. 문학작품의로서 딱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466323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