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 ㅣ 살림지식총서 340
김용수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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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요약된다.

욕망은 흔히 윤리의 적으로 여겨지며, 이런 이유로 개인의 사적 욕망은 희생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권력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다. 따라서 "욕망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오라"라는, 현재 시급한 공익을 위해 욕망은 뒤로 미루고 양보하고 포기해야 하는 부차적 방해물로 삼는 기존 윤리에 라캉은 반대한다.

도덕적 '선'과 경제적 '효용'에 바탕을 둔 권력의 윤리는 다른 욕구, 소수의 욕망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덕과 쓸모의 이름으로 지배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따라서 권력에 위협적이고 파괴적이며 비타협적인 욕망을 긍정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급진적인 정치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변화와 새 출발을 요구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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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체제들이 체제의 유지 존속을 위하여 욕망과 윤리를 대립시키고 가족이라는 재생산 구조를 통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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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심리학(ego-psychology)에서는 '바람직한' 욕망을 미리 정해놓고 서열화시킨다. '정상'에서 벗어난 성은 '비정상' 낙인을 찍고, '성기의 결합에 기반을 둔 이성애주의' 기준에서 벗어난 다른 욕망은 억압한다. 따라서 자아심리학은 정치적 보수주의로 귀결된다. 욕망의 긍정은 '성숙'의 윤리를 거부하는 일이고, 그것을 위해 배제되고 희생된 '쓸모없는' 욕망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비타협적으로 끌어안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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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에 서열을 매기는 것이야 말로 체제의 유지 존속을 위해 필수적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철저한 구분은 서열화를 긍정하며, 서열화의 긍정은 곧 계급과 계층의 긍정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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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 es war, soll ich werden.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내 것으로 인식되지 않은 낯선 욕망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 바깥에 있는 낯선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핵심에 자리 잡은 존재의 일부이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따라 '그것'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데서 정신분석의 윤리를 찾는다. 윤리는 '그것'이 '내'가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이 되는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이다.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의 욕망들은 욕망의 만족을 대체하는 환상이고 진정한 쾌락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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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물신화는 욕망의 물신화를 가져온다. 욕망이 상품화되고, 상품화된 욕망이 외부로부터 주입될 때 자본주의의 거대 매커니즘은 비로소 작동되기 시작한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을 주입받는 체제. 아울러 이러한 욕망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욕망으로 귀결된다. 상품화된 욕망은 욕망의 쟁취를 위한 경쟁을 권장하고 용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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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the real). 욕망은 실재를 향하고, 실재는 욕망의 원인이다. 실재란 무엇인가? 의미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표(signifiant)의 전체집합이 필요하지만 마지막 기표는 계속 연기되므로 전체가 구성될 수 없다는 모순을 안고 있는 언어의 체계가 상징계이다. 이런 조건에서 금지와 배제를 통해 전체를 환상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상상계이다. 실제는 상상적인 전체가 구성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상징질서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실재는 '상징화를 거부하는 어떤 것'이며, 실재는 상징계의 바깥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거세(castration)가 주체의 성립조건이다. 실재는 문명과 주체의 구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금지되고 배제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실재는 상징질서의 바깥인 동시에 구조적인 원인이다.

금지는 욕망을 창조한다. 욕망은 법이 배제한 실재적 대상 때문에 끊임없이 활성화된다. 문명과 주체가 금지르 통해 탄생한다면, 그 금지는 동시에 금지된 대상에 대한 새로운 욕망을 무한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문화는 욕망을 금지하지만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금지된 대상을 향한 욕망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므로 욕망은 본질적으로 반문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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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의 이러한 욕망이론은 근친상간으로 풀어볼 수 있다. 근친상간을 배제하고 금지했기에 인간은 문명사회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문명사회에서 근친상간은 욕망의 대상이된다. "나는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문장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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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위반은 금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법은 위반을 필요로 하는데 위반을 찾아내고 처벌함으로써 법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금지와 위반은 서로 기묘한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위반이 반역의 실천이 아니라 죄의식의 통로로 기능할 경우 진정한 의미의 위반이 아니라 법의 현상유지나 강화에 기여할 뿐이다.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법과 위반의 틀에 매어 있는 욕망이 아닌 그 틀을 벗어나는 욕망이다. 초자아의 교묘한 감시의 눈을 벗어난 위반은 그러므로 아버지의 도덕주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욕망은 도덕질서가 금지하는 어떤 것을 지향한다. 한편 문명은 위협적인 대상을 금지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하고, 주체는 금지를 내면화함으로써 탄생한다. 거세는 일종의 주체가 탄생하는 통과의례다.

라캉은 문명이 억압하는 근원적인 금지 대상을 'das Ding'이라는 독일어 단어로 지칭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데올로기로 구성된 세계 밖에 존재하는 대상이고, 문명의 바깥이며, 문명으로부터 배제된 대상이다.

주체는 이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야 가능한데, 동시에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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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생각해보라.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법이 관철되어 주체의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는 초자아라는 죄의식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더욱 강력한 아버지로 살아남는다. 금지되어 있기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무한한 쾌락의 환상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이 이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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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기제를 통해 탄생한 금지 너머의 희열은 사후에 구성된 환상이다. 소외 이전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소외 이후에 등장한 소외의 부산물인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대상의 결여 또는 부재를 상실로 착각한다. 과거는 보다 아름답고 보다 완벽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재구성된 환상임에도 현재는 잃어버린 과거를 욕망하게 된다. 부재를 상실로 전환함으로써 어머니의 몸에 대한 근원적인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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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재와 상실의 구분을 혼동하여 우리는 윤색된 과거를 부여안고 허구의 환상을 욕망한다. 부활의 노래 <흐린 비가 내리며는>의 가사는 이러한 정서를 본능적으로 잘 포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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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비가 내리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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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달이 구름에 가려져 흐린 비가 내리며는

비는 어느새 낡은 펜으로 변해 나의 추억을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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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으는 새들이 너를 데려가버리고 나는 홀로 그 자리에

스르르 뒤도는 너의 슬퍼하던 모습 지금 또 비로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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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거리를 걸으려하네 하늘을 멀리 바라보네

저 비는 음악으로 내게... 또 시간이 뒤로 가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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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난 스미려하네 조금씩 흐트러지며

난 흐린비로 변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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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풍연애(courtly love)는 기본적으로 높은 신분의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헌신적인 사랑을 일컫는데 여성을 향한 충절과 찬미를 특징으로 한다. 중요한 것은 궁정풍연애에서 사랑의 대상인 귀부인은 이미 결혼한 상태이기에 기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성적인 접촉의 불가능성과 육체관계의 부재를 전제로 유지되는데, 시의 창조라는 '승화' 행위를 통해 좌절된 성적인 욕망은 어느 정도의 만족을 추구할 것인데 어쨌든 획득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끝없는 이상화로 귀결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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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반한 여성에 대한 사랑이든, 기혼자에 대한 욕망이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측면에서 주체는 '승화'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끝없이 이상화되고 그 아름다움이 찬미되는 이유를 라캉은 '주체의 오인(misrecognition)'에 기초한 자아도취라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사랑은 타자에 대한 사랑인가, 자기애에 불과한 것인가. 라캉에 따르면 자아도취적인 이상화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상상적인(imaginary)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야말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꼴이다.

이성복의 시 <그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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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

외로운 사람은, 또한 신비롭다.

그는 언제나 물기에 찬 모습.

- 고트프리트 벤, <외로운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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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자화자찬 아닌 외로움은 없어서, 아무도 보는 사

람 없는 걸 알면, 그 으악새 슬피 우는 울음 딱 그쳐버리

거나, 자못 심각한 표정 거두시고 헤시시 웃는다. 본래

진기명기 아닌 외로움은 없어서, 한 공주 한 왕자 하고

나서도 고색창연한 연기는 계속된다. 제 연기를 고백하

는 연기, 제 연기를 부정하는 연기. 제 연기를 모독하고

타도하고 끝내 聖化하는 연기. 외로운 사람은 끝없이 풍

선을 불어댄다. 그는 제가 부는 풍선 속으로 들어가려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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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천우편집중국에서 근무할 때 읽었다. 그때가 명절 소통기간 직전이었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차량 통제를 하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스스스슷' 하고 미루나무 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남색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세종시에 와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그 시절이 문득 떠오르고, 그때가 전생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세종시의 밤하늘에는 정적, 정적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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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퀴즈쇼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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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 간 은막의 스타 최여사를 외할머니로 둔 민수. 외할머니가 죽고, 살던 집이 사채업자에게 넘어가자 여자친구 빛나와 당연하다는 듯 이별하고 혼자가 된다.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긴 민수는 최여사의 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하는 일이라곤 인터넷 퀴즈 채팅방을 전전하는 것. 민수는 그곳에서 퀴즈를 풀다보면 어쩐지 자신의 존재 의미가 확인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민수는 '벽속의 요정'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여자와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된다. 민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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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고시원 옆방에는 공무원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수희가있었다. 민수는 그녀와 오며가며 얘기를 하다 친해졌고, 어느 날엔가는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얘기도 나눈다. 하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지적인 유희와는 거리가 멀었고 먹고 사는 고단함이 한껏 묻어나는 대화였다.

수희는 어딘지 현실과 동떨어진 민수의 태도, 그리고 박학다식한 면모를 동경하지만 민수는 그녀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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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돈이 떨어져 가던 어느 날 퀴즈쇼에 나가 우승을 하면 상금을 받는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퀴즈방 참가자들도 거드는 통에 민수는 퀴즈쇼에 참가한다. 하지만 퀴즈쇼 우승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벽속의 요정'을 만났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민수의 착각이었다. 사실 '벽속의 요정'은 퀴즈쇼 프로그램의 작가였고, 민수가 엉뚱한 여자에게 말을 거는 순간 바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뒤 민수와 '벽속의 요정'과 다시 만난다. 한눈에 '벽속의 요정'을 알아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둘은 대화가 잘 통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가진 돈이 다 떨어진 민수는 데이트 장소에 나갈 차비나 밥값도 없었다. 민수는 염치 불구하고 수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말을 하는데 그녀는 선뜻 민수에게 돈을 건냈주었을 뿐 아니라 더 필요할 거라며 더 주기까지 했다.

얼마 뒤 수희가 자살한다. 아마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친구와 공무원에 자꾸 떨어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그런 것 같았다.

그녀의 자살과 고시원에서 내쫓긴 사건으로 민수는 비로소 현실의 냉혹함을 자각하게 된다. 수상한 지하 퀴즈쇼에 참가하게 된 것은 이런 조바심 탓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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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팔기 힘든 것이 바로 지식이다. 지식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생산해 내지 않기에 날것의 지식은 구매자가 별로 없다. 그래서 소설에서 지식을 뽐내는 것은 인세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물결과 인터넷 바람을 타고 그 지식을 소설에 녹여내 파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잡다한 지식을 이미지에 녹여 내고 생활의 고단함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만들면 '쿨함'이 된다. 이 '쿨함'을 파는 것이다. 그 '쿨함'이 존재하지 않는 것, 우리 사회에서는 어림 없는 것임에도 잘 팔린 이유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현실이 너무 고단했으므로 '쿨함'이라는 단 꿀을 빨며 나뭇가지에 메달린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쿨함'을 그대로 파는 것은 하수이다. 이 '쿨함'을 다시 '생활'에 녹여내고 반성과 성찰을 조미료로 첨가하거나, 시대인식과 어떻게든 결합시켜 반자본주의적 결론으로 유도하면 이제 독자 뿐만 아니라 평론가의 찬사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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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만큼 '쿨함'과 '생활'을 잘 녹여낸 소설가도 없을 것이다. 얼마든지 잡다한 지식을 뽐내며 돈벌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김영하의 작품들은 재미를 보장한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소설 속 세계에 나는 풍덩 뛰어들지 못하겠다. 그것은 작가 자신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는 소설을 잘 '지어내는' 작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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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박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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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영은 연애도 사랑도 인생도 요리처럼 레시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나영은 성우와 연애를 하고 있지만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남자는 지훈이라고 따로 있다. 나영은 지훈과 때때로 만나 밥도 먹고 영화도 보는데 이런 둘의 관계를 절친인 은주와 수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성우는 지훈을 은근히 의식하고 경계했고, 은주는 지훈과 사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젊었을 적 연애가 그렇듯 나영과 성우가 열정이 다해 헤어지고, 은주와 지훈도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어 멀어진다.

얼마 뒤 지훈이 나영에게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이 너였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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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닌데도 유일하게 두 번 본 드라마가 있다. 허영만 원작, 김래원 남상미 주연의 2008년 드라마 <식객>이다. 식재료를 고르고 요리를 해서 누군가와 함께 나눠 먹거나 경연을 벌이는 설정에 청춘 남녀의 풋풋함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그 즈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 같다. 무레 요코의 <카모메 식당>이나 아베 야로의 <심야 식당>,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이나 <제빵왕 김탁구> 등이 이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난다.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역시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작가에게 오늘의 작가상 영예를 안겨준 <백수생활백서>와 함께 산 책인데, 2011년에 사서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가 이제서야 읽는다. <백수생활백서>는 꽤나 참신했었는데 이 책은 연애와 요리라는 두 가지 재료가 잘 어우러지지 못하고 밋밋한 맛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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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한동림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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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진형은 애인 인숙과 유령에 대해 이야기 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떠올린다. 그날 진형은 빈소를 지척에 두고 낯선 여자와 동침했다. 그 기억은 부끄러움이 되어 진형을 괴롭혔다. 맏손주였던 진형은 숙부를 도와 할머니 염습을 하고 장례를 치른 기억을 떠올린 끝에 인숙에게 유령이 있다고 했다. 인숙은 유방암과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유령이 있다면 다행이라며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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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닷새째 계속된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버스에서 몸이 불편한 중학생 아이와 어머니를 본다. 불현듯 형과 어머니의 기억이 의식에 스며든다.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을 하며 아들 둘을 키웠다. 그렇게 열심히 돈을 모았던 어머니지만, 정작 형이 아플 때는 제대로 된 약을 쓰지 못해 형이 불구가 되었다며 일평생 한을 품고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나'를 형으로 착각해 누렇게 변색한 이불을 한사코 물려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불을 불에 태우니 그 안에서 어머니가 감춰둔 돈이 흘러 나왔다. 형은 그 돈은 내 다리 값이라며 서럽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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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흑백사진 속의 새벽 새>

사장 면전에 사표를 던진 영훈을 위해 동료 직원들이 송별회를 열어주겠다고 한 곳이 하필이면 창신동 환희였다. 동료들은 나를 대단한 영웅인양 추켜주었다.

그 술집에 대한 기억은 은주와, 그녀를 유다처럼 배신했던 못난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술집에서 '나'는 억병으로 취했고, 따라온 여자와의 관계도 치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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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나는 산>

황학산 성불암에서 평섭은 목탁을 깎으며 장영감의 지리한 과거사를 듣는다. 겨울은 불상 조각장이들에게 긴 휴식과 정착을 의미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 휴식기에 들어갈 참이다. 불상을 깎는 평섭의 의식 속으로 그림에 미쳐버린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저주하던 어머니의 기억 따위가 떠올랐다.

그러다 한 여자가 작업장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추위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는데 산 꼭대기로 가겠다는 둥, 백화산으로 데려가 달라는 둥 횡설수설한다. 평섭은 여자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쉬게 해주며 상념을 이어갔다.

다음 날 여자는 자취를 감추었는데 덮고 있던 담요를 관세음보살상에게 씌워 놓고 떠났다. 담요를 치워보니 관세음보살상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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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던 현숙이 훈련을 위해 산에 올랐다가 조난을 당한다.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며 시시포스의 신화와, 안나푸르나 등정에서 함께 캠프를 나섰다 실종된 박선배의 기억 따위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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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 시대>

삼류영화관에서 그는 <빠삐용>으로 추정되는 영화를 보고 있다. 주인공은 탈출을 시도하지만 쉽지 않고, 옆자리에 호모가 앉아 추근댄다. 그의 의식이 과거로 향한다. 도로에서 들렸던 기관총 소리, 아내와 태중의 아이가 사망한 기억.

탈출에 실패한 영화 속 주인공이 스크린에 비추고, 그 스크린을 나방 한 마리가 영사기에 비춰 가로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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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바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말에 '나'는 혼란을 느낀다. 아버지는 분명 내 손으로 죽였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말인가. 정신과의사를 앞에 두고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집을 나간 어머니, 형과 '나'를 학대했던 아버지. 형은 나를 아버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끝내 집을 나갔고, 나는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고 최근 죄책감에 형사에게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실토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있다니.

의사는 내가 아버지를 죽이는 상상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틈입하는 기억. 찾아낸 형, 그리고 형에게 학대받았음이 분명한 조카들. '내'가 죽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형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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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서의 계절>

며느리 옥순이 마을 앞 횡단보도에서 화물트럭에 치어 숨진 뒤 아들은 손자와 손녀에게 함부로 하며 자신을 망가뜨렸다. 그날 며느리의 죽음을 지켜본 목격자들은 자살 같다고 했다. 김노인은 억장이 무너졌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빵공장을 빌려 한여름에 땀을 바가지로 쏟아가며 일을 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며느리는 그런 현실에 절망에 트럭에 몸을 던졌을까.

아이들과 아들, 그리고 김노인이 다시 희망을 부여잡고 빵공장을 열어 빵을 만들다 김노인은 깨달았다. 과로와 탈수가 현기증을 일으켜 며느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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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림 소설은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과거의 한 장면이 틈입하며 시작된다. 과거는 대게 아팠던 기억들인데 상처가 벌어진 채로 잊혀지거나 무의식 속에 묻혀있던 순간들이다. 그 과거는 현재로 이어져 있으므로 어느 때고 상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띠고 있다. 소환된 과거는 현재와 의식 속에서 뒤섞인다. 현실과 과거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 경계의 어느 부분을 한동림은 소설로 포착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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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때로 과거는 윤색되거나 왜곡되어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과 만나 격렬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재해석되며, 현재와 화해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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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작품 해설에 앞서 발터 벤야민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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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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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강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한강은 한동림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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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관점은 다소 다르지만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는 그 지점에서 이뤄지는 진지한 성찰과 탐구가 우리를, 그리고 이 사회를 좀 더 옳은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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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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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의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때문이었다. 장정일은 자신의 꿈이 '무엇무엇'이 되어 5시에 퇴근한 뒤 딱딱한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것이었노라고 그 책에 적고 있다.

내가 막상 장정일의 못 다한 꿈을 이루려고 그 직업을 가져보니, 장정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빙충이였다. 업무는 5시에 끝나지 않았고, 잘리지 않는다 뿐이지 스트레스가 심했으며, 주거 역시 불안정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했다.

하지 말라는 것은 무수히 많았고, 전쟁이 나면 어디로 가서 무엇무엇을 하라는 것까지 카드로 적어 속박했고, 월급은 겨우 먹고 살만큼 줬다.

그러다보니 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업무가 바뀌기를, 진급을 해서 직급이 올라가기를, 다른 곳으로 발령 받기를 바라며 유예된 시간을 견디곤 한다. 그리고 기다리던 진급이, 보직 변경이, 전보 발령이 이뤄지면 다시 다음번 진급을, 다음번 보직 변경을, 다음번 발령을 기다리며 괴로운 시간을 견딘다.

그렇게 한 20년 뺑뺑이를 돌면 얼추 남은 직장생활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 거지반 결정이 되는데, 문득 허탈한 생각이 든다. 다음번 진급을, 발령을 위해 현재를 견디다 보니 가장 중요한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참고 견딘 그 시간이 사실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게되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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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이 악을 다루는 방식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주인공과 함께 저 밑바닥으로 함께 떠밀려 가며 광적으로 휘갈겨대는 묘사는 사뭇 빼어난 데가 있어 몰입감 측면에서 더할 나위 없지만, 다시 현실로 빠져나오는 데 서툴기 때문이다. 때로 인물들에 휘둘려 허우적 대거나,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정쩡한 지점에서 힘이 달려 마무리 짓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았다.

그런데 <완전한 행복>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다. 고유정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하여 쓰여졌기 때문에 이미 출발점이 명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의 호흡과 내공이 강해진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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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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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문장을 읽노라니 매번 현실을 부정하며 다음번 이벤트까지만 어떻게든 참고 버티자는 식으로 직장 생활을 해온 내 과거가 오버랩 된다. 완전한 행복이 어디있겠는가. 그저 다음 진급, 다음 발령만 바라보며 달려온 내 직장생활도 어찌 보면 저놈의 '완전한 행복' 신기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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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rainsky94/224389047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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