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둠의 근원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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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22일 오전 10시 10분, 엘 몬테의 킹스 로와 타일러 가 교차지점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백인 여성으로 흰 피부에 빨강머리, 나이는 40세 정도 되어 보였다. 오른팔을 위로 하고 주먹을 쥔 왼팔은 팔꿈치를 구부린 채 배 위에 얹혀 있었다. 다리는 활짝 벌린 채였다.

앞이 파인 간소한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하체에는 드레스와 어울리는 안감을 댄 오버코트가 덮여 있었다. 발과 발목은 코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오른발은 맨발이었고 왼쪽 발목 주위에는 나일론 스타킹이 둘둘 말려 내려와 있었다.

얼굴에는 타박상이 있었고 혀가 삐죽 나와 있었다. 브래지어 끈이 풀린 채 가슴 위로 밀려 올라간 상태였고, 목에는 나일론 스타킹과 면 재질의 끈이 묶여 있었다. 피해자의 팬티, 구두, 핸드백은 찾을 수 없었고, 오른쪽 유두가 없었다. 피해자는 살해 당할 당시 생리중인 것으로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자의 이름이 진 엘로이로 밝혀졌다. 전 남편 아만드 엘로이와 아들 제임스 엘로이가 불려 왔다. 남편 아만다 엘로이는 이제 주중에도 아들과 지낼 수 있다는 점에 기뻐했을 뿐, 전처의 사망에 대해 별다른 슬픔을 나타내지 않았다. 10살 난 아들 제임스 엘로이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아버지와 지내는 편이 더 좋았으므로 불만이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죽음에 다소 냉담하게 반응했다.

초동 수사 결과 피해자는 드라이브인 식당에 두 차례 들렀으며, 라틴계 남자와 함께였다는 증언이 확보된다. 차량 모델과 라틴계 남자라는 결정적 단서와 목격자가 있었으므로 범인을 찾는 작업은 단순해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 이상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한편, 10살에 어머니를 잃은 제임스 엘로이는 아버지와 함께 살며 이모가 맡아둔 보험금을 거짓말로 우려내며 자유롭게 살았다. 정크 푸드를 먹고 도둑질을 했다. 유일한 취미라면 범죄소설과 범죄드라마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나는 어머니가 싫었다. 엘 몬테도 싫었다. 이름 모를 살인자가 나에게 근사한 새 인생을 선물해준 것이었다.(108p)

그전까지 내가 어머니를 싫어한 것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어머니를 싫어했던 것이다.(118p)

어느 날 밤 나는 샤워하고 몸을 닦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반쯤 벗은 모습, 알몸, 슬립만 걸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슴이 출렁이는 모습도. 왼쪽 유두가 추위에 빳빳해진 모습도 보았다. 어머니 다리 사이의 붉은 부분도 보고, 수증기에 피부가 상기되는 모습도 보았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고, 어머니를 욕망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어버렸다.(119p)

제임스 엘로이는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강간 살해라는 끔찍한 사건을 관통하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건강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욕망하면서 증오하는(자신을? 아니면 어머니를?) 기묘한 정신상태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후 아버지가 사망하고 군대에서 쫓겨난 그는 마약과 술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지내다 노숙자가 되고 만다. 어머니 '빨간 머리'에 대한 성적 욕망과 죄책감은 무기력증과 자기혐오를 낳았고 마침내 그는 죽음 직전까지 추락한다.

때때로 제임스 엘로이는 이 모든 정신적 불구상태가 어머니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의 형태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도둑질과 관음증, 스토킹, 그리고 마약과 알콜 의존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러다 블랙 달리아 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는 블랙 달리아를 어머니 '빨강머리'와 동일시 한다. 블랙 달리아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어머니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혼동했고, 불균형한 몸매와 특이한 모양의 가슴에 강하게 끌리며 엄청난 양의 책을 훔쳐 읽었다.

그러다 골프 캐디 일을 우연히 하게 된다. 약간의 전기가 마련되자 범죄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첫 소설 <브라운 진혼곡>을 1981년에 발표하고 이듬해에 <클랜데스틴>을 연달아 발표하며 인기를 끈다. 1987년 <블랙 달리아>를 발표한 제임스 엘로이는 문단과 독자를 사로잡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내 어둠의 기록>은 그가 범죄소설 작가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이후 자신을 평생에 걸쳐 괴롭히던 어머니의 사망사건을 재조사하며 자신의 심리상태를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제임스 엘로이는 전직 형사와 팀을 이뤄 3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 '빨강 머리'사건을 재조사한다. 어머니의 나신이 찍힌 사진을 다시 열람하고, 당시 인터뷰와 용의자를 재검토하며, 유사한 사건을 발굴하여 수사 영역을 확장한다. 그 모든 '대면'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극복이라는 이연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이었다.

진 엘로이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제임스 엘로이는 자신의 성벽과 과거를 낱낱이 글로 적는다. 필요 이상 자세한 이 기록 <내 어둠의 근원>은 과연 '씻김굿' 역할을 해냈을까?

그로테스크한 욕망과 죄책감의 양 극단에서 정신이 붕괴되어 노숙자의 삶을 살다 겨우 현실로 돌아와 발표한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들은 무척 기괴한 모습을 띤다. 그 '어둠의 근원'이 이 책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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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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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무 살 생일 날, 그녀는 롯폰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친구가 대신해 주기로 했지만, 감기가 도져 몸져 눕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에는 사십 대 중반의 플로어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는 저녁 여덟 시가 되면 어김없이 6층의 사장실로 식사를 가지고 갔다. 사장의 식사는 언제나 '치킨일 것, 그 외에는 어떻든간에 상관이 없는' 메뉴였다.

그런데 그날은 매니저가 갑작스런 복통으로 병원에 가는 바람에 별 수 없이 그녀가 저녁을 가지고 6층으로 올라갔다.

사장은 작달막한 사람이었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그는 그녀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품고 몇 가지 질문을 하다가 그녀가 오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장은 그녀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얼마간 장난스런 기분으로 사장에게 맞춰주었다. 사장은 소원을 듣더니 다른 소원, 즉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미인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어도 괜찮은지 다시 묻는다.

그녀는 '하지만 그런 것은 만일 실제로 이루어져버리면 그 결과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상상도 안되고 감당을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미 말한 소원을 고수하기로 한다.

사장은 힘차게 손바닥을 따악 하고 맞댄 뒤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 뒤로 그녀는 사장을 볼 수 없었고, 다음 해에는 그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어 인연이 끊어진다.

'나'는 그녀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질문은 그 소원은 이루어졌는가 였다. 그녀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 소원은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소원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딸, 개와 함께 살며 아우디를 타고 일 주일에 두 번 친구들과 테니스 치는 인생이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내 입장이었다면 어떤 소원을 빌었을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나'는 스무 살에서 너무 멀리 와서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당신은 틀림없이 벌써 소원을 빌었을 걸' 이라고 말했다.

그림은 독일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시크가 그렸는데 팝 아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빌었던 소원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소설에서는 두 가지 힌트가 나온다. 첫 번째는 소원에서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아직 단정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보통의 사람들이 바라는 부자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외모라든가 하는 것과 관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의문이 샘 솟는다. 지금 그녀가 대화하고 있는 '나'는 그녀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중산층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나'와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상대편의 과거에 대해, 특히나 '스무 살 생일이라는 특별한 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라면 이성, 특히나 호감을 품고 있는 상대가 아닐까?

다시 힌트로 돌아가 그녀는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지만 소원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 않았다. 즉,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윤택한 삶이 그녀의 소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쩐지 로맨틱하면서도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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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으로 지어진 곳
소운 지음 / 여름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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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 아버지 동렬이 찾아왔다. 동렬은 "연선아, 그 가서는 능력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라" 라고 했다. 은희는 부조금 상자에 있던 봉투들을 동렬의 무릎에 모두 부어버렸다. 은희는 동렬에게 '엄마의 목숨값이니 그 돈 다 가져가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했다.

장례식장에 산이가 왔다. 아무 말 없이 은희를 지나쳐 향에 불을 붙이고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절을 했다. 11년 만이었다. 산이는 그러고 나서 빈소를 나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장례식 내내 옆에 있었다고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은희는 소동이 보이는 동해로 내려갔다. 할머니 종순과 지내면서 은희는 산이가 꾸려가는 책방에 엄마가 아끼는 책을 기증하고, 엄마의 사망신고를 하러 갔다 하릴없이 등본만 떼어 돌아왔다.

과거의 기억들이 은희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중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으면서 대학을 나왔다고 사기를 치고 엄마와 결혼한 뒤 끊임 없이 사업을 벌였고, 금방 망했다. 엄마 이름으로, 은희 이름으로 빚을 얻어 썼고, 그 빚 때문에 은희는 대학을, 꿈을 포기하고 산이와 만나는 것을 피해야 했다.

산이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문제를 일으켜 할머니 집으로 내려왔을 때 만났다. 은희가 대학을 가면서 산이를 떠났다. 산이는 고향을 지키면서 은희 엄마에게 은희 얘기를 들으며 지냈다.

끝내 엄마의 사망신고를 마치지 못하고 은희는 서울로 떠난다. 가는 길에 가방을 열어보니 산이가 만든 책이 들어 있었다. 은희와 관련된 곳을 찍은 사진과, 편지들.

은희는 산이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엄마의 낮잠을 알리러 주민센터에 가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단편 소설이 한 편 실려 있고, 책 값은 11,700원이다. 값을 매겼으니 자비출판은 아니겠고, 무슨 예산 같은 것을 타내기 위한 증빙으로 만든 책인가 싶기도 하다. 알 길이 없다. 때로 어떤 작가의 책은 두 번 다시 읽지 않기 위해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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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도 돼?
나카지마 타이코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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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근거지가 바뀌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새로운 장소에 집을 구해야 한다. 세달 째 손품(인터넷), 발품(임장) 팔아가며 집 구하기에 골몰 해 보았지만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 아니다, 사실 마음에 드는 곳이야 많다. 내가 가진 예산 범위 안에서 마음에 드는 곳이 없을 뿐.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스러져가는 집들에 매력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보수할 마음이 없거나, 살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어 쇠락해 가는 분위기가 엿보이는 집. 그런 집을 사서 약간 보수하여 사는 공상을 하다 보면 여러가지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런 집을 사면 후회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혼자 살 집이 아니니 아이가 다닐 학교나, 아내가 출근할 직장이나, 여러가지 생활 편의시설과 치안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일반적인 기준으로 집을 구하려고 마음 먹으면 또 의외로 빨리 구해질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내가 자꾸 쇠락해 가는 집들을 구경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인천 중구와 동구, 미추홀구의 오래된 집, 부천시 원미동의 낡은 단독주택, 양평읍 시장통과 인접한 구옥들...

<지어도 돼?>는 홀로 원룸 살다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30대 독신 여주인공이 연애보다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시작된다.

수입상을 운영하는 사촌동생과 사이좋게 일하고, 가족과도 화목하지만, 이제 슬슬 결혼 압박이 거세지는 나이의 주인공 마리. 하지만 마리는 '결혼' 보다 '독립된 주거'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맞선 자리에 나온 남자를 '게이일 것이'라고 예단하여 연애과정은 차단한 뒤 그의 직업인 건축설계사에 집중하여 집 짓는 데 도움을 받기로 한다.

독신이었던 이모가 물려주기로 한 맨션을 아버지가 가진 토지와 맞바꾸기로 하여 땅을 확보한 마리는 맞선남이었던 건축설계사와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짜내며 집을 짓기 시작한다.

이렇다 할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을 짓고 싶어하는 독신녀의 의식을 담담히 보여줄 뿐인데 요새 내 관심사와 부합되어 그런지 그럭저럭 읽힌다.

<그가 보낸 택배> 라는 짤막한 단편이 하나 더 실려 있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소포를 보냈다는 소식에 온갖 상상을 하며 감정의 기복에 시달리던 '나'는 자신이 남자친구 책꽂이에서 즐겨 빼 보던 사전을 받고선 살짝 감동한다. 하지만 뒤이어 포스트잇에 쓰여진 '이거 네 거였지? 미안, 돌려주는 걸 잊었어!' 라는 무신경한 메모를 발견하고 기분 잡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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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 정진영 소설집
정진영 지음 / 무블출판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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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박지수는 어렸을 적, 아내를 잃은 뒤 피리를 부는 동네 할아버지로 부터'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적들을 물러가게 하고, 백성들의 병이 낫게 만들며, 가물 때는 비가 오게 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치게 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준다는 전설의 피리 이야기. 지수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수는 어머니께 만파식적 이야기가 실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사달라고 하여 읽는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만파식적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긴 하지만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는 짧고 무미건조한 내용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실망한 지수는 헌책방 주인에게 이를 따져 물었고, 헌책방 주인은 지수에게 <삼국사기>는 역사를 기록한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설명과 함께 <삼국유사>를 선물한다. 그날 저녁 지수는 <삼국유사>를 읽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았고, 후에 사학과에 진학하는 계기가 된다.

대학에 진학해서 지수는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또 다른 박지수와 사귀게 된다. 7년을 사귀었다. 그러나 둘은 이어지지 못했다. 또 다른 지수는 선을 봐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친구 동호가 전화를 걸어와 '지수가 간암에 걸려 죽었다'고 말했다.

향을 사르고 절을 한 뒤 상주와 맞절을 했다. 상주는 지수를 안다고 했다. 현주는 지수가 '마지막에 네 이름만 부르더라'고 했다. 아마 그래서 아는 것 같았다.

술잔을 비우면서 한국사 전공수업 시간에 들었던 처용무 이야기를 떠올린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처용은 왜 역신疫神과 관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도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하며 춤까지 추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교수는 아내의 문란한 행실에 의연히 대처하는 남편의 이야기가 천년을 이어갈 생명력을 가졌을 리 없다며 자신의 해석을 들려준다. 아내와 역신이 몰래 잠자리를 했다는 표현은 아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의미이며,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처용이 깨달았을 때 미치지 않기 위해 춤이라도 추었어야 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지수는 술이 올라 꼬부라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갑자기 별이 보인다 싶더니 바닥이 덤벼들었다. 지수의 남편이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지수와 지수의 남편, 처용과 역신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이 역신인지 처용인지 잘 모르겠다고 낄낄댔다. 둘은 어깨동무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높아진 노랫소리에 흐느적거리는 춤사위가 어우러졌다.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는 잘 쓴 소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대비시켜 역사와 이야기의 경계를 만들고, 둘 사이의 긴장을 소설에 녹여내는 수법이 꽤나 멋지다.

처용무를 인용한 부분도 그럴싸하다.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이야기가 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현실과 이야기에 시간이 쌓여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구멍과 헛점이 있다. 언제나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내가 처용인지, 역신인지 알 수 없게'되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처용무를 다르게 해석한다. 처용이 돌아와보니 아내가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있다.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간장이 끊어지는 이 아픔을 이겨낼 것인가.

아내가 자의로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면, 저 사내가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라면, 그런 경우라면 겨우겨우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처용은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 것 아닐까. 역신이야 말로 내가 어쩔 수 없는 존재다. 지금 아내와 관계하고 있는 저 남자는 역신이다.

이렇게 현실을 부정하고 춤을 추는 것, 그것이 애이불비愛而不悲에 더 가깝지 않을까?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외에는 그다지 마음 가는 작품이 없다. 같은 작가가 쓴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준이 한참 못 미친다.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만 '원 히트 원더' 느낌이랄까.

아울러 작가의 역사 인식과 세계사에 대한 통찰력도 단선적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일본문제에 대한 인식 등이 다소 편협하고, 정치권 문제에 대해서는 발만 들여놓을 뿐 자신의 생각은 얼버무리는 비겁함도 엿보인다. 소설가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명재일', '석윤열' 까지 등장인물로 끌어들인 마당에 얼버무리는 건 왜일까. 커밍아웃 타이밍을 재는 느낌도 얼핏 든다.

작품집에는 재난지원금으로 홍삼세트를 사서 어머니와의 소박한 식사를 꿈꾸는 <선물>, 당근마켓에서 목업폰 사기를 당한 뒤 마찬가지로 당근마켓을 통해 사연있는 남자로부터 위로를 받는 <징검다리>, 학폭과 사실적시명예훼손 문제를 다룬 <네버 엔딩 스토리>, 주거 문제와 소시민의 심리를 다룬 <숨바꼭질>, 2042년 미래에 자신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시간을 되돌리면>, 깐따삐야에서 온 도우너가 지구인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눈 먼 자들의 우주>, 환웅과 웅녀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여진 <사랑의 유통기한>, 도시개발과 부동산 문제를 다룬 <동상이몽>, 콜센터 노동자를 소재로 한 <안부>, 동호회에서 여성회원의 태도를 오해해 김칫국을 마시는 <동호회>, 큰외삼촌의 첫사랑 이야기를 다룬 <첫사랑>이 함께 실려 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27700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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