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크 라캉 ㅣ 살림지식총서 340
김용수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평점 :
자크 라캉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요약된다.
욕망은 흔히 윤리의 적으로 여겨지며, 이런 이유로 개인의 사적 욕망은 희생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권력의 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다. 따라서 "욕망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오라"라는, 현재 시급한 공익을 위해 욕망은 뒤로 미루고 양보하고 포기해야 하는 부차적 방해물로 삼는 기존 윤리에 라캉은 반대한다.
도덕적 '선'과 경제적 '효용'에 바탕을 둔 권력의 윤리는 다른 욕구, 소수의 욕망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덕과 쓸모의 이름으로 지배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따라서 권력에 위협적이고 파괴적이며 비타협적인 욕망을 긍정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분석의 윤리는 급진적인 정치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변화와 새 출발을 요구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얼마나 많은 체제들이 체제의 유지 존속을 위하여 욕망과 윤리를 대립시키고 가족이라는 재생산 구조를 통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 하는가.
자아심리학(ego-psychology)에서는 '바람직한' 욕망을 미리 정해놓고 서열화시킨다. '정상'에서 벗어난 성은 '비정상' 낙인을 찍고, '성기의 결합에 기반을 둔 이성애주의' 기준에서 벗어난 다른 욕망은 억압한다. 따라서 자아심리학은 정치적 보수주의로 귀결된다. 욕망의 긍정은 '성숙'의 윤리를 거부하는 일이고, 그것을 위해 배제되고 희생된 '쓸모없는' 욕망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비타협적으로 끌어안는 행위이다.
// 욕망에 서열을 매기는 것이야 말로 체제의 유지 존속을 위해 필수적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철저한 구분은 서열화를 긍정하며, 서열화의 긍정은 곧 계급과 계층의 긍정으로 귀결된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존재한다."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내 것으로 인식되지 않은 낯선 욕망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 바깥에 있는 낯선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핵심에 자리 잡은 존재의 일부이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따라 '그것'에 일치하여 행동하는 데서 정신분석의 윤리를 찾는다. 윤리는 '그것'이 '내'가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이 되는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이다.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의 욕망들은 욕망의 만족을 대체하는 환상이고 진정한 쾌락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 자본주의의 물신화는 욕망의 물신화를 가져온다. 욕망이 상품화되고, 상품화된 욕망이 외부로부터 주입될 때 자본주의의 거대 매커니즘은 비로소 작동되기 시작한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을 주입받는 체제. 아울러 이러한 욕망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욕망으로 귀결된다. 상품화된 욕망은 욕망의 쟁취를 위한 경쟁을 권장하고 용인한다.
실재(the real). 욕망은 실재를 향하고, 실재는 욕망의 원인이다. 실재란 무엇인가? 의미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표(signifiant)의 전체집합이 필요하지만 마지막 기표는 계속 연기되므로 전체가 구성될 수 없다는 모순을 안고 있는 언어의 체계가 상징계이다. 이런 조건에서 금지와 배제를 통해 전체를 환상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상상계이다. 실제는 상상적인 전체가 구성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상징질서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실재는 '상징화를 거부하는 어떤 것'이며, 실재는 상징계의 바깥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거세(castration)가 주체의 성립조건이다. 실재는 문명과 주체의 구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금지되고 배제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실재는 상징질서의 바깥인 동시에 구조적인 원인이다.
금지는 욕망을 창조한다. 욕망은 법이 배제한 실재적 대상 때문에 끊임없이 활성화된다. 문명과 주체가 금지르 통해 탄생한다면, 그 금지는 동시에 금지된 대상에 대한 새로운 욕망을 무한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문화는 욕망을 금지하지만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금지된 대상을 향한 욕망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므로 욕망은 본질적으로 반문화적이다.
// 라캉의 이러한 욕망이론은 근친상간으로 풀어볼 수 있다. 근친상간을 배제하고 금지했기에 인간은 문명사회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문명사회에서 근친상간은 욕망의 대상이된다. "나는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문장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위반은 금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법은 위반을 필요로 하는데 위반을 찾아내고 처벌함으로써 법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금지와 위반은 서로 기묘한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위반이 반역의 실천이 아니라 죄의식의 통로로 기능할 경우 진정한 의미의 위반이 아니라 법의 현상유지나 강화에 기여할 뿐이다. 라캉의 윤리가 긍정하는 욕망은 법과 위반의 틀에 매어 있는 욕망이 아닌 그 틀을 벗어나는 욕망이다. 초자아의 교묘한 감시의 눈을 벗어난 위반은 그러므로 아버지의 도덕주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욕망은 도덕질서가 금지하는 어떤 것을 지향한다. 한편 문명은 위협적인 대상을 금지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하고, 주체는 금지를 내면화함으로써 탄생한다. 거세는 일종의 주체가 탄생하는 통과의례다.
라캉은 문명이 억압하는 근원적인 금지 대상을 'das Ding'이라는 독일어 단어로 지칭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데올로기로 구성된 세계 밖에 존재하는 대상이고, 문명의 바깥이며, 문명으로부터 배제된 대상이다.
주체는 이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야 가능한데, 동시에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다.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생각해보라.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법이 관철되어 주체의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는 초자아라는 죄의식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더욱 강력한 아버지로 살아남는다. 금지되어 있기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무한한 쾌락의 환상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이 이로부터 비롯된다.
금지의 기제를 통해 탄생한 금지 너머의 희열은 사후에 구성된 환상이다. 소외 이전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소외 이후에 등장한 소외의 부산물인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대상의 결여 또는 부재를 상실로 착각한다. 과거는 보다 아름답고 보다 완벽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것이 재구성된 환상임에도 현재는 잃어버린 과거를 욕망하게 된다. 부재를 상실로 전환함으로써 어머니의 몸에 대한 근원적인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
// 부재와 상실의 구분을 혼동하여 우리는 윤색된 과거를 부여안고 허구의 환상을 욕망한다. 부활의 노래 <흐린 비가 내리며는>의 가사는 이러한 정서를 본능적으로 잘 포착한 것 같다.
<흐린 비가 내리며는>
차가운 달이 구름에 가려져 흐린 비가 내리며는
비는 어느새 낡은 펜으로 변해 나의 추억을 그리네
날으는 새들이 너를 데려가버리고 나는 홀로 그 자리에
스르르 뒤도는 너의 슬퍼하던 모습 지금 또 비로 내리네
또 거리를 걸으려하네 하늘을 멀리 바라보네
저 비는 음악으로 내게... 또 시간이 뒤로 가려하네
추억에 난 스미려하네 조금씩 흐트러지며
난 흐린비로 변해가
궁정풍연애(courtly love)는 기본적으로 높은 신분의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헌신적인 사랑을 일컫는데 여성을 향한 충절과 찬미를 특징으로 한다. 중요한 것은 궁정풍연애에서 사랑의 대상인 귀부인은 이미 결혼한 상태이기에 기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성적인 접촉의 불가능성과 육체관계의 부재를 전제로 유지되는데, 시의 창조라는 '승화' 행위를 통해 좌절된 성적인 욕망은 어느 정도의 만족을 추구할 것인데 어쨌든 획득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끝없는 이상화로 귀결될 뿐이다.
// 학창시절 반한 여성에 대한 사랑이든, 기혼자에 대한 욕망이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측면에서 주체는 '승화'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끝없이 이상화되고 그 아름다움이 찬미되는 이유를 라캉은 '주체의 오인(misrecognition)'에 기초한 자아도취라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사랑은 타자에 대한 사랑인가, 자기애에 불과한 것인가. 라캉에 따르면 자아도취적인 이상화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상상적인(imaginary)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야말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꼴이다.
이성복의 시 <그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가 떠오른다.
그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
외로운 사람은, 또한 신비롭다.
그는 언제나 물기에 찬 모습.
- 고트프리트 벤, <외로운 사람은>
본래 자화자찬 아닌 외로움은 없어서, 아무도 보는 사
람 없는 걸 알면, 그 으악새 슬피 우는 울음 딱 그쳐버리
거나, 자못 심각한 표정 거두시고 헤시시 웃는다. 본래
진기명기 아닌 외로움은 없어서, 한 공주 한 왕자 하고
나서도 고색창연한 연기는 계속된다. 제 연기를 고백하
는 연기, 제 연기를 부정하는 연기. 제 연기를 모독하고
타도하고 끝내 聖化하는 연기. 외로운 사람은 끝없이 풍
선을 불어댄다. 그는 제가 부는 풍선 속으로 들어가려는
참 이상한 꿈을 가졌다.
이 책은 부천우편집중국에서 근무할 때 읽었다. 그때가 명절 소통기간 직전이었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차량 통제를 하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스스스슷' 하고 미루나무 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남색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세종시에 와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그 시절이 문득 떠오르고, 그때가 전생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세종시의 밤하늘에는 정적, 정적 뿐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4404113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