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 (반양장)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쾌적하고 안락한 굴속에 사는 호빗 골목쟁이네 빌보는 부유한 편이고 모험이나 예상에서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아 평판이 좋았다. 어느 날 마법사 간달프가 빌보를 찾아온다. 빌보는 툭 아저씨로부터 그 마법사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났다. 빌보는 귀찮은 일에는 말려들고 싶지 않아 간달프를 멀리 하는데, 다음날 빌보의 집에 드워프 열 세명이 몰려 온다. 드워프들은 간달프로부터 빌보가 매우 유능한 좀도둑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터와 보물을 스마우그라는 용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빌보를 찾아온 것이었다. 툭 아저씨의 기질이 빌보를 모험에 뛰어들게끔 부추겼고, 이로써 용을 물리치러 가는 열 다섯명의 모험대가 구성이 된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롤 세마리를 만나는데 이들을 물리치고 엘프의 검인 '글람드링(비터)'와  '오르크리스트(바이터)'를 얻게 된다. 엘프들의 거처를 찾아간 일행은 그들로부터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는다. 하지만 고블린들의 동굴에서 한바탕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일행과 떨어진 빌보는 반지 하나를 얻게 된다. 그 반지는 골룸이 떨어뜨린 것인데 반지를 끼면 모습이 사라지는 반지였다.

고블린과 늑대들에게 곤경에 처했을 때 우연히 독수리들이 도움을 주고 위기를 넘긴 일행은 베오른을 찾아간다. 그는 동물을 애호하며 조용히 살아갔는데 곰의 형상으로 변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베오른과 함께 쉬면서 휴식을 취한 드워프들과 호빗은 간달프와 헤어져 여행을 계속하는데 거미들로 인해 곤경에 처하고 숲속 엘프들에게 감금당하기도 한다. 빌보의 기지로 간신히 탈출하여 마침내 스마우그의 거처에 당도하는데 스마우그는 온몸에 몇겹의 비늘 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불음 내뿜기까지 해서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란 없어 보였다. 빌보가 반지를 끼고 술잔을 훔친데 화가 난 스마우그는 인간의 마을을 습격하고 용감한 바르드가 용의 약점을 화살로 쏘아 죽인다.

인간의 마을이 폐허가 되어 바르드는 용의 보물 일부의 권리를 주장하며 드워프 소린에게 나누어주길 요청하지만 보물의 매력에 빠져버린 소린은 정당한 인간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인간과 요정의 연합군과 드워프들의 전쟁이 불가피해 보였다. 하지만 빌보가 드워프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석 아르켄스톤으로 협상을 도모하고 늑대와 고블린의 군대까지 밀려오자 인간과 요정, 그리고 드워프는 한편이 되어 이들에 맞서게 된다. 소린은 뒤늦게 나마 드워프의 긍지를 지닌 채 전사하고 빌보는 보물의 일부를 받아 호빗 마을로 돌아온다.

 

톨킨이 자기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지은 동화가 판타지 소설의 고전이 되었다. <호빗>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반지의 제왕>이 출간되기 17년 전인 1937년에 쓰여졌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의 출발이 된다.

그 후로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호빗>이라는 하나의 전형을 출발점으로 한다. 1974년 TSR이 <던전 앤 드래곤>이라는 테이블 롤 플레잉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의 변경에 엄격함을 더하지만 사실 <던전 앤 드래곤> 역시 출발은 톨킨의 아이디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톨킨의 아이디어를 가장 잘 구현한 게임은 SOE사의 <에버퀘스트>가 아닐까 싶다. 물론 에버퀘스트는 그 자체의 세계와 세계관이 있고 12개의 종족이 갖는 직업과 그들이 섬기는 신도 톨킨의 작품과는 다르지만 판타지 MMORPG 게임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수많은 업적들이 톨킨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에버퀘스트는 MMORPG 게임에서 '레이드'라는 모험 형태를 최초로 제안한다. 레이드를 위해서는 각 직업과 종족이 적절히 균형을 맞추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에버퀘스트를 통해 생겨난 또 하나의 개념이 바로 풀러, 탱커, 힐러, 데미지딜러, 버퍼 등이다. 이러한 에버퀘스트의 직업, 종족, 역할 등은 블리자드사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매우 초보적인 형태로 이식되는데, 뜻밖에도 이러한 소프트함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인기 면에서는 <에버퀘스트>를 넘어서게 된다. 

<에버퀘스트>를 했던 게이머는 누구든 <에버퀘스트> 이외의 MMORPG 게임에는 몰입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에서는 직장 동료가 라이벌이라면 <에버퀘스트> 시디를 선물하라는 말도 있었다.

비록 서비스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노라쓰'라는 세상은 역사와 함께 사라졌고, 나의 한 시기도 사라졌다고 느낀다. 이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에버퀘스트>를 플레이 했던 사람들과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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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정일 문학선집 2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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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주인공 한일남은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곧바로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 한일남은 자신이 꿈 속에서 본 것을 그대로 썼을 뿐이라 항변하지만 그 후로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미니스커트를 입은 <바지 입은 여자> 정선경이 한일남을 찾아온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과 한일남의 소설 내용이 똑같아 놀랐고, 따라서 표절이 아니라는 것도 믿으며, 그가 멋진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한다. 한일남의 집에 눌러 붙은 <바지 입은 여자>는 한일남을 독려하는 한편,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쓴 날은 그 대가로 몸을 제공한다.

 

그런데 사실 한일남은 소설 쓰기를 집어 치우고 기관원에게 도색소설을 6백매당 3백만원에 팔아치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기관원은 한일남 뿐만 아니라, 시인 이정박(그 역시 표절 시인이로 낙인 찍혔다)에게도 똑같은 일을 의뢰하였고, 한일남과 이정박이 쓴 도색소설은 주체사상과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제목으로 역전 앞 노점상에서 팔려 나간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도색소설 제목으로 주체사상과 마르크스주의를 접하여 왜곡된 인식을 갖도록 하는 '이중사고' 의도라 추측한다.

한편, 한일남의 친구 <은행원> 조사명은 매일 '수정궁'이라 불리는 은행의 유리 부스 안에서 잔돈을 바꿔주는 일을 한다.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 독서반과 문예반을 두고 한 달을 고민한 끝에 독서반을 가입하였고, 당시 엽집에 살던 택시운전기사의 매맞는 부인과 일년간 관계를 맺었으며, 그 일로 성병을 얻어 발기 불능이 된 사내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새로운 슬픔>에 바나나 껍질 마약이 나온다며 직접 시행해보는가 하면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영화 속 인물에 자신을 투영시켜 보기도 한다.

 

기관원이 <바지 입은 여자>가 써준 독후감으로 쫓겨나고, <바지 입은 여자>는 '경산 문화협회'의 백형두에게 몸을 내어준 후 배우로 성공하는 모습을 꿈꾸게 된다. <바지 입은 여자>는 <은행원>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알려준다. 그녀가 <바지 입은 여자>로 불리게 된 이유는 그녀가 쓴 시 때문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오만과 자비>라는 운동권과 동거를 하게 된다. <오만과 자비>는 큰 틀에서는 운동권적 사고를 하는 자였으나, 일상 생활은 권위주의적 발상과 변태적 성향으로 뭉친 자였다. 가투가 있던 날 <오만과 자비>와 <바지 입은 여자>는 숨어들어간 화장실에서 비역질을 하고, 그 후 치마 안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바지 입은 여자>가 전경들에게 연행되어 궁둥이를 드러내고 원산폭격 하던 장면이 외신 기자에게 찍혀 전 세계에 전파되어 퓰리쳐상까지 타게 되는 일이 있었다.

 

한일남의 이모님이 돌아가시면서 '국제여관'을 물려 주자 한일남은 여관을 물려 받아 그곳에서 기식하고 <바지 입은 여자>는 몸을 팔다가 영화감독을 따라 서울로 가 출세한다. <은행원>은 수정궁을 나와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한일남은 <바지 입은 여자>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한 끝에 그녀의 '가방모찌'가 된다. <바지 입은 여자>는 <은행원>이 준 책을 한일남에게 건내며 소설 쓰기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길 권하고 한일남은 자신이 꿈을 꾼 후 소설을 썼다는 말을 아직도 믿느냐고 묻는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기억과 이미지들이 있다. 그것들이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일부 왜곡되기도 했었다는 것은 책을 읽고서 알게 되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장선우 감독의 영화로 1994년도에 보았다. 그 영화를 보기 전에 여균동은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편역자로 알고 있었고, 장정일은 내 기억이 맞다면 기형도의 <짧은 여행의 기록>에 나오는 '책에 지문 묻히는 것을 싫어하는 소년'으로 알고 있었다. 어쨌든 영화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책에서 <오만과 자비>로 등장하는 자와 <바지 입은 여자>의 화장실 비역신은 물론 불쾌했었지만, 한일남 역의 문성근이 살던 집과 비내리는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그 후로 종종 장정일의 원작을 꼭 읽어보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디에 바나나 마약이 나오는가 하는 것이었다. 을유문화사의 아리송한 번역본에도 없었고 민음사 세계문학 번역본에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책을 읽고서야 사실은 울리히 플렌쯔도르프의 <젊은 베르테르의 새로운 슬픔>을 내가 잘못 들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경우 작가 장정일에 대해서는 그의 소설 작품 보다 시에 익숙하고,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한 몇몇 단어와 이미지들이 익숙하다.  여호와의 증인, 중학교 졸업, 소년원, 삼중당문고, 거짓말, 재판, '뇌가 있습니다/없습니다', 등등.

그는 콜린 윌슨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웃사이더>라는 역작을 발표한 후 점점 이상해지더니 미스테리와 왜곡된 성에 천착하는 기인. 그 역시 제대로된(혹은 제도화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독학에 의존하여 방대한 지식을 쌓은 후 역작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길로 들어선 후에 재능을 낭비한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기존 권위에 대한 강력한 반발뿐만 아니라, 그 권위에 대항하는 운동권에 대한 과도한 비아냥이 결국 그를 성에 대해 천착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장정일은 언제나 나에게 신선함을 주고, 그의 책을 읽고 싶게 만든다. 일그러진 느낌을 줄 망정, 그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은 후 박일문은 뭐하고 있나 궁금했다. 뇌가 있느니 없느니 장정일에게 양 싸다귀를 맞은 후 잠잠해졌다가 그 후로 한 번도 그의 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혼인 빙자 간음으로 실형을 살았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충격적이다. 

<베끼기의 세 가지 층위>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표절의 판단 근거로 명시성을 들먹이는 부분을 한껏 비판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 동감하는 바이지만, 페스티쉬를 들먹이며 이인화를 옹호하는 부분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박일문의 반박이 궁금했었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명예회손 운운하며 법에 호소했다. 그런 그가 법 집행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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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이치
코니 팔멘 지음, 이계숙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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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데니트는 1980년 자신이 아르바이트 하는 서점에서 점성술사를 만난다. 작가가 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 믿고 있는 마리는 점성술사의 예언에 매혹되고 둘은 친구가 된다.

두번째 남자는 간질병환자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대한 세미나에서 만나게 된다. 간질병환자는 자신의 질병을 자랑스러워 했고 마리의 피부병이 갖고 있는 은유와 상징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준다.

세번째 남자는 마리가 푸코에 매료되었을 때에 만난 철학자였고, 네번째 남자는 철학자의 소개로 만나게 된 신부이다. 신부는 마리가 푸코보다는 데리다쪽에 가깝다며 추근댔고 마리는 불구인 신부의 몸을 성적으로 충족시켜준다.

다섯번째 남자는 물리학자로 유부남인 그와 바람을 피운다.

여섯번째 예술가와의 사랑이 자기파괴적으로 끝난 후, 점성술사가 사고로 죽고 마리는 점성술사의 아버지인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20대의 여대생 마리 데니트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자신의 지적 욕구를 남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해소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녀의 지적 관심과 수준이 변화함에 따라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과 분야도 달라진다.

소설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리 저리 옮겨 다닌다. 철학자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지만, 그 폭과 깊이는 소설에서 장식의 역할 이상이 아니다.

작가는 다분히 <마의 산>을 뛰어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었고, 그 작품에 어느 정도의 불만도 갖고 있었지만 <자명한 이치>는 <마의 산>이 이룬 문학과 철학의 지적인 융화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지적 욕구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주인공 마리의 남성 편력이 명품과 신상에 매료되는 여성의 행태와 별반 다르게 읽히지 않았다. 양자 모두 자신을 대상화 한다는 것에는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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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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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5월 8일,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 이 폭발은 아름다운 도시 상피에르를 불과 2분 만에 쓸어버렸다. 그런데 그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니, 루저 실바리스라는 죄수였다. 도시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멕시코로 건너간 후 삼십년을 은둔해 살며 '상피에르 사람들'이란 책을 조금씩 써서 마침내 출판하는데, 책 속의 상피에르 사람들은 모두 기묘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실바리스가 왜 그런 식으로 써내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인공 '나'는 Y 공기업의 부속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딱히 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사정은 부장, 과장, 계장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는데 범선 모형 만들기나 무협지로 소일하거나 사우나에 가서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13호 캐비닛을 발견한다. 4자리 번호로 된 자물쇠를 단순 무식하게 하나씩 대입하여 연 나는 거기에 들어 있는 파일을 읽기 시작한다. 거기에 보관된 자료는 '심토머'에 관한 자료들인데, 종은 진화할 필요가 없는 동안은 거의 변화하지 않다가 바뀐 환경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갑자기 변종하는데 기존 인간의 종과 새로 태어날 신인류라는 종의 중간지에 있는 징후를 가진 인간을 '심토머' 라고 한다.

한편 13호 캐비닛의 파일을 읽었다는 사실을 권박사에게 들킨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13호 캐비닛의 자료를 정리하고 심토머들을 상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손가락 끝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의 기억을 조작하여 현재의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는 메모리모자이커가 있다. 시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가버리는 타임스키퍼, 겨울잠 자듯 긴 잠에 빠져들어가는 토포러, 고양이로 변하고 싶어하는 사람 등 갖가지 증상의 심토머들을 상담하던 '나'에게 어느 날 기업의 K라는 자가 접근한다.

K는 '나'에게 13호 캐비닛의 파일 중 은행나무가 손가락 끝에서 자라나는 심토머에 관한 연구 자료를 20억에 사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팔고 싶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있기나 한건지 알 수가 없었고 권박사는 나에게 13호 캐비닛을 계속 지킨다면 매달 100만원을 지불하겠다는 한가한 제안이나 할 뿐이다.

권박사가 암으로 죽고, 연구 자료의 소재를 캐내기 위해 기업이 파견한 인물은 나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하는 고문을 가한다. 손정은의 집으로 피신한 나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전가옥을 요구하고 섬으로 떠난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고 구성은 억지스럽기도 하다. 심토머들의 병렬식 나열에 일관성이 없어서 소설 중반부는 조금 지루하다. 손정은의 역할이 애매하고, 후반부의 엽기적인 고문과 도피는 작가의 넘쳐나는 아이디어가 심토머들의 등장까지였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철수사용설명서>와 같은 조악한 소설은 아니다. 무엇보다 작가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이 곳곳에 느껴지고 기교에 치우쳐 말장난을 하려 하지 않으며 작가의 소설관이 일관되게 소설을 관통하고 있다.

루저 살바리스의 이야기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속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이야기라고 하는데 작가 김언수가 자신의 상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살바리스가 책으로 펴낸 이야기 속 마을 주민은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희화화 되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반박할 수는 없다. 생존자는 살바리스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살바리스의 이야기가 책이 되는데 30년이 걸렸다는 점과, 그의 이야기 속 마을 주민들이 모두 뒤틀려 있다는 점이다. 30년이 걸렸다는 것은 살바리스의 작업이 고통스러웠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주민들이 뒤틀려 있다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과 진실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묻는다. 도대체, 루저 실바리스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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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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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단체 여행을 떠나는 네 사람은 저마다의 아픔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 이소베는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며 "나......반드시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찾아요......날 찾아요......약속해요, 약속해요" 라는 말을 남기자 못내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 가정을 소홀히 하고 아내의 소중함을 몰랐던 이소베는 아내와의 소소했던 일상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환생에 관해 알아보던 중 인도의 어느 마을에 자신이 전생에 일본에 살았다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마쓰코는 대학 시절 <모이라 Moira>라는 소설에 빠져 그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산다. 그녀는 오쓰라는 가톨릭 신자를 모이라처럼 장난으로 유혹하여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 한다. 그녀는 졸업 후 적당한 남편을 찾아 결혼하지만 알 수 없는 공허감에 <테레즈 데케이루 Thérèse Desqueyroux>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결국 자신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신혼여행지인 프랑스에서 자신이 버린 오쓰가 신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그를 만난다. 그리고 지금, 그 오쓰가 인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쓰코는 그를 찾아서 인도로 떠난다.

기구치는 미얀마에서 퇴각하던 도중 극도의 굶주림과 전염병에 죽을 위기를 맞는다. 말라리아에 걸린 그를 전우인 쓰카다가 끝까지 함께 해준 덕에 그는 살아남지만, 쓰카다는 전후 일본에 돌아와 술로 괴로움을 달래다가 결국 죽고 만다. 쓰카다는 죽기 전 자신이 전우의 시체를 먹었고 그 전우의 아내와 아이를 본 일로 괴로워했음을 고백한다. 쓰카다를 돕던 가톨릭 자원봉사자 가스통은 비행기가 조난당했을 때 자신의 몸을 먹고 모두 살아남아달라고 했던 부상자 이야기를 해주며 그를 위로한다. 기구치는 자신의 전우 쓰카다를 위해 인도의 절에 가서 명복을 빌어주려 한다.

동화 작가인 누마다는 여러차례 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구관조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 놓는다. 수술 도중 심장이 멈추기까지 했던 누마다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지만, 그의 목숨을 대신 하기라도 한듯이 구관조가 죽고 만다. 누마다는 인도에 가서 자연보호구역을 둘러보고 할 수 있다면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자연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은 마침내 바라나시의 갠지즈강으로 가게 된다. 이소베는 자신이 찾던 여자아이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말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곳 점쟁이를 찾아가고, 점쟁이가 알려준 곳에는 똑같은 이름의 아이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 이소베는 어느 순간 아내가 자신의 내부에 환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기구치는 자신이 그곳에서 말라리아와 증세가 비슷한 질병에 다시 걸리고 꿈 속에서 가스통이 쓰카다를 끌어안고 있는 꿈을 꾼다. 그는 쓰카다가 가스통의 위로로 편안히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누마다는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풀어주고,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바라나시와 도쿄에서 새들은 신나게 노래한다는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동화를 쓰게되리라 생각한다. 미쓰코는 오쓰가 바라나시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예수님을 찾으며 이단시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쓰는 바라나시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창녀들의 시체를 옮기며 만약에 예수님이 이곳에 있었더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수상인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해 어수선한 상황에서 시신 촬영을 금지하는 힌두교도의 터부를 무시하고 여행의 일원인 산조가 카메라를 꺼내다가 성난 힌두교인들에게 쫓기자 오쓰는 그들을 막아서다 폭행당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이미 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한명에게 마더 테레사 수녀회의 수녀들이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미쓰코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지 묻고, 수녀는 그것밖에 이 세계에서 믿을 게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미쓰코는 급히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어 오쓰의 용태를 물어달라고 가이드에게 부탁한다. 가이드는 오쓰가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고 전해준다.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작품으로 작가의 나이 일흔에 발표되었다. 대표작인 <침묵>에서 인간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렸던 작가는 이번에는 좀더 보편적인 신의 모습을 탐구한다. 소설에서는 힌두교, 불교, 가톨릭 등 여러 종교를 통해 인간이 구원을 탐색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신의 본성은 결국 사랑임을 이야기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오쓰는 작가 자신의 종교관을 반영한 인물이다. 오쓰는 프랑스의 신학교에서 자신의 범신론적 견해 때문에 선배 수도사들에게 이단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인도에서도 힌두교 신자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갠지즈강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강으로 옮겨주는 행위로 백안시 된다. 오쓰는 미쓰코에게 그리스도를 무엇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며 양파라 불러도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버리라는 미쓰코의 말에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쓰코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고뇌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쓰는 끊임없이 유럽의 합리적인 신이 아니라 동양적인 어머니 같은 동양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추구하였고, 그런 그의 모습이 범신론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오쓰는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하며, 그가 했을 법한 일을 하며 후회하지 않는다.

 

 

얼마 전 이런 글을 읽었다. '기독교도는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를 가톨릭이라 생각하고, 가톨릭교도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를 불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10여년간 기독교도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례는 통계적으로 많으나, 가톨릭교도가 기독교도로 개종한 사례는 드물다' 라는 글이었다. 가톨릭은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타종교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엔도 슈사쿠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소설 속에서 힌두교, 불교, 가톨릭이 동등한 수준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가 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가톨릭 신부인 오쓰가 <마하트마 간디 어록집>을 읽는 대목에서 간디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나는 흰두교도로서 본능적으로 모든 종교가 많건 적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는 똑같은 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종교건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여 등장하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서 53,2-4의 일부분이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비참하고 초라하도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버렸고

마치 멸시당하는 자인 듯,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

 

엔도 슈사쿠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어쩐지 '그렇구나 너희들이 그토록 슬픈데, 바다는 너무도 푸르구나' 하고 답해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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