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도 단체 여행을 떠나는 네 사람은 저마다의 아픔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 이소베는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며 "나......반드시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찾아요......날 찾아요......약속해요, 약속해요" 라는 말을 남기자 못내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 가정을 소홀히 하고 아내의 소중함을 몰랐던 이소베는 아내와의 소소했던 일상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환생에 관해 알아보던 중 인도의 어느 마을에 자신이 전생에 일본에 살았다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마쓰코는 대학 시절 <모이라 Moira>라는 소설에 빠져 그 주인공과 같은 삶을 산다. 그녀는 오쓰라는 가톨릭 신자를 모이라처럼 장난으로 유혹하여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 한다. 그녀는 졸업 후 적당한 남편을 찾아 결혼하지만 알 수 없는 공허감에 <테레즈 데케이루 Thérèse Desqueyroux>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결국 자신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신혼여행지인 프랑스에서 자신이 버린 오쓰가 신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그를 만난다. 그리고 지금, 그 오쓰가 인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쓰코는 그를 찾아서 인도로 떠난다.

기구치는 미얀마에서 퇴각하던 도중 극도의 굶주림과 전염병에 죽을 위기를 맞는다. 말라리아에 걸린 그를 전우인 쓰카다가 끝까지 함께 해준 덕에 그는 살아남지만, 쓰카다는 전후 일본에 돌아와 술로 괴로움을 달래다가 결국 죽고 만다. 쓰카다는 죽기 전 자신이 전우의 시체를 먹었고 그 전우의 아내와 아이를 본 일로 괴로워했음을 고백한다. 쓰카다를 돕던 가톨릭 자원봉사자 가스통은 비행기가 조난당했을 때 자신의 몸을 먹고 모두 살아남아달라고 했던 부상자 이야기를 해주며 그를 위로한다. 기구치는 자신의 전우 쓰카다를 위해 인도의 절에 가서 명복을 빌어주려 한다.

동화 작가인 누마다는 여러차례 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구관조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 놓는다. 수술 도중 심장이 멈추기까지 했던 누마다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지만, 그의 목숨을 대신 하기라도 한듯이 구관조가 죽고 만다. 누마다는 인도에 가서 자연보호구역을 둘러보고 할 수 있다면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자연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은 마침내 바라나시의 갠지즈강으로 가게 된다. 이소베는 자신이 찾던 여자아이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말에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곳 점쟁이를 찾아가고, 점쟁이가 알려준 곳에는 똑같은 이름의 아이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다. 이소베는 어느 순간 아내가 자신의 내부에 환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기구치는 자신이 그곳에서 말라리아와 증세가 비슷한 질병에 다시 걸리고 꿈 속에서 가스통이 쓰카다를 끌어안고 있는 꿈을 꾼다. 그는 쓰카다가 가스통의 위로로 편안히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누마다는 구관조를 한 마리 사서 풀어주고,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바라나시와 도쿄에서 새들은 신나게 노래한다는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동화를 쓰게되리라 생각한다. 미쓰코는 오쓰가 바라나시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예수님을 찾으며 이단시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쓰는 바라나시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창녀들의 시체를 옮기며 만약에 예수님이 이곳에 있었더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수상인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해 어수선한 상황에서 시신 촬영을 금지하는 힌두교도의 터부를 무시하고 여행의 일원인 산조가 카메라를 꺼내다가 성난 힌두교인들에게 쫓기자 오쓰는 그들을 막아서다 폭행당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이미 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한명에게 마더 테레사 수녀회의 수녀들이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미쓰코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지 묻고, 수녀는 그것밖에 이 세계에서 믿을 게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미쓰코는 급히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어 오쓰의 용태를 물어달라고 가이드에게 부탁한다. 가이드는 오쓰가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고 전해준다.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작품으로 작가의 나이 일흔에 발표되었다. 대표작인 <침묵>에서 인간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렸던 작가는 이번에는 좀더 보편적인 신의 모습을 탐구한다. 소설에서는 힌두교, 불교, 가톨릭 등 여러 종교를 통해 인간이 구원을 탐색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신의 본성은 결국 사랑임을 이야기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오쓰는 작가 자신의 종교관을 반영한 인물이다. 오쓰는 프랑스의 신학교에서 자신의 범신론적 견해 때문에 선배 수도사들에게 이단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인도에서도 힌두교 신자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갠지즈강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강으로 옮겨주는 행위로 백안시 된다. 오쓰는 미쓰코에게 그리스도를 무엇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며 양파라 불러도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버리라는 미쓰코의 말에 "내가 신을 버리려고 해도......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쓰코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고뇌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쓰는 끊임없이 유럽의 합리적인 신이 아니라 동양적인 어머니 같은 동양적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추구하였고, 그런 그의 모습이 범신론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오쓰는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하며, 그가 했을 법한 일을 하며 후회하지 않는다.

 

 

얼마 전 이런 글을 읽었다. '기독교도는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를 가톨릭이라 생각하고, 가톨릭교도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를 불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10여년간 기독교도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례는 통계적으로 많으나, 가톨릭교도가 기독교도로 개종한 사례는 드물다' 라는 글이었다. 가톨릭은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타종교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엔도 슈사쿠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소설 속에서 힌두교, 불교, 가톨릭이 동등한 수준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가 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가톨릭 신부인 오쓰가 <마하트마 간디 어록집>을 읽는 대목에서 간디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나는 흰두교도로서 본능적으로 모든 종교가 많건 적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는 똑같은 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종교건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여러 차례 반복하여 등장하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서 53,2-4의 일부분이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니, 비참하고 초라하도다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겨, 버렸고

마치 멸시당하는 자인 듯,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

 

엔도 슈사쿠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어쩐지 '그렇구나 너희들이 그토록 슬픈데, 바다는 너무도 푸르구나' 하고 답해줄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