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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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5월 8일,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 이 폭발은 아름다운 도시 상피에르를 불과 2분 만에 쓸어버렸다. 그런데 그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니, 루저 실바리스라는 죄수였다. 도시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멕시코로 건너간 후 삼십년을 은둔해 살며 '상피에르 사람들'이란 책을 조금씩 써서 마침내 출판하는데, 책 속의 상피에르 사람들은 모두 기묘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실바리스가 왜 그런 식으로 써내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인공 '나'는 Y 공기업의 부속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딱히 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사정은 부장, 과장, 계장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는데 범선 모형 만들기나 무협지로 소일하거나 사우나에 가서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13호 캐비닛을 발견한다. 4자리 번호로 된 자물쇠를 단순 무식하게 하나씩 대입하여 연 나는 거기에 들어 있는 파일을 읽기 시작한다. 거기에 보관된 자료는 '심토머'에 관한 자료들인데, 종은 진화할 필요가 없는 동안은 거의 변화하지 않다가 바뀐 환경을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갑자기 변종하는데 기존 인간의 종과 새로 태어날 신인류라는 종의 중간지에 있는 징후를 가진 인간을 '심토머' 라고 한다.

한편 13호 캐비닛의 파일을 읽었다는 사실을 권박사에게 들킨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13호 캐비닛의 자료를 정리하고 심토머들을 상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손가락 끝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의 기억을 조작하여 현재의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는 메모리모자이커가 있다. 시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가버리는 타임스키퍼, 겨울잠 자듯 긴 잠에 빠져들어가는 토포러, 고양이로 변하고 싶어하는 사람 등 갖가지 증상의 심토머들을 상담하던 '나'에게 어느 날 기업의 K라는 자가 접근한다.

K는 '나'에게 13호 캐비닛의 파일 중 은행나무가 손가락 끝에서 자라나는 심토머에 관한 연구 자료를 20억에 사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팔고 싶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있기나 한건지 알 수가 없었고 권박사는 나에게 13호 캐비닛을 계속 지킨다면 매달 100만원을 지불하겠다는 한가한 제안이나 할 뿐이다.

권박사가 암으로 죽고, 연구 자료의 소재를 캐내기 위해 기업이 파견한 인물은 나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하는 고문을 가한다. 손정은의 집으로 피신한 나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전가옥을 요구하고 섬으로 떠난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고 구성은 억지스럽기도 하다. 심토머들의 병렬식 나열에 일관성이 없어서 소설 중반부는 조금 지루하다. 손정은의 역할이 애매하고, 후반부의 엽기적인 고문과 도피는 작가의 넘쳐나는 아이디어가 심토머들의 등장까지였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철수사용설명서>와 같은 조악한 소설은 아니다. 무엇보다 작가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이 곳곳에 느껴지고 기교에 치우쳐 말장난을 하려 하지 않으며 작가의 소설관이 일관되게 소설을 관통하고 있다.

루저 살바리스의 이야기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속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이야기라고 하는데 작가 김언수가 자신의 상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다. 살바리스가 책으로 펴낸 이야기 속 마을 주민은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희화화 되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반박할 수는 없다. 생존자는 살바리스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살바리스의 이야기가 책이 되는데 30년이 걸렸다는 점과, 그의 이야기 속 마을 주민들이 모두 뒤틀려 있다는 점이다. 30년이 걸렸다는 것은 살바리스의 작업이 고통스러웠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주민들이 뒤틀려 있다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과 진실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묻는다. 도대체, 루저 실바리스는, 왜?

 

http://blog.naver.com/rainsky94/80159046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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