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환상문학전집 20
헨리 라이더 해거드 지음, 이영욱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케임브리지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일하는 루드윅 호레이스 홀리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여성들과 거리를 두고 진리 탐구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철궤와 함께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유언의 내용은 자신의 아들 레오 빈시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과, 빈시가 스물 다섯이 되는 해에 철궤를 열어 그 안에 담긴 빈시 가문의 유지를 실행해달라는 것이었다.

빈시는 아름답고 수려한 외모의 청년으로 자라났고, 홀리는 그를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어느덧 빈시가 스물 다섯이 되자 둘은 철궤를 연다. 그 속에는 도편과 양피지들이 들어있었고 거기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씌여 있었다.

 

이시스의 사제 칼리크라테스는 파라오의 왕족 아메르타스를 사랑한 탓에 신에 대한 서약을 깨뜨리고 함께 아프리카로 도망친다. 그곳에는 이방인의 머리에 항이리를 씌워 죽이는 족속이 있었는데 그들을 다스리는 여왕은 불멸의 생명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었다. 여왕은 칼리크라테스에게 한눈에 반해 만약 그가 아메르타스를 죽이고 자신에게 온다면 불멸의 힘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하지만 칼리크라테스가 이를 거부하자 여왕은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고, 아메르타스를 추방한다. 아메르타스는 아이를 낳는데 그 아이가 바로 빈시의 오랜 선조이다. 아메르타스는 아이에게 불멸의 여왕을 찾아가 복수를 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빈시의 선조들은 불멸의 여왕을 죽이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를 도편에 남겼다. 도편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거나, 의지가 부족하여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빈시 가문의 유언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레오는 도편과 양피지에 기록된 것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홀리와 레오, 그리고 하인 조브는 불멸의 여왕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한다.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그들이 타고간 다우선이 침몰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일행은 아프리카의 부족들에게 사로잡히는데, 그들이 바로 이방인의 머리에 항아리를 씌워 죽이는 족속임에 분명해 보였다.

아마하가 부족의 족장 빌랄리는 여왕이 그들을 해치지 말고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말한다. 부족은 모계 중심 사회였는데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을 발견하면 키스를 하고, 남성이 이를 거부하지 않으면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고 했다. 아름다운 우스테인이 레오에게 키스를 하고, 레오가 그들의 관습을 잘 알지 못해 거부하지 않는다. 우스테인은 레오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아마하가 부족의 식인 관습 때문에 레오 일행은 위기를 맞는다. 아마하가 부족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레오가 상처를 입게 되고, 여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열병까지 얻게 된다.

홀리가 여왕을 먼저 알현한다. 여왕은 자신의 이름이 아샤이며 2천년을 넘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었는데 홀리는 자신도 모르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 베일을 벗어달라고 간청한다. 여왕은 베일을 벗은 자신의 얼굴을 본 남성들은 이룰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심장이 갉아먹힐 것이라 했고, 과연 그녀의 말대로 되었다. 홀리는 여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것에 괴로와한다.

열병으로 신열에 들뜬 레오를 치료하기 위해 온 아샤는 레오의 얼굴을 본 순간 희열에 달뜬 표정으로 그가 바로 칼리크라테스의 환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방부처리된 시체를 보여주는데 시체의 얼굴은 정확히 레오의 얼굴이었다. 아샤는 시체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며 한 줌 재로 화하도록 만들고 레오를 치료한다.

레오를 헌신적으로 간병하던 우스테인이 아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이를 본 레오가 아샤를 비난하지만 그녀가 베일을 벗자 레오 역시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고 만다.

아샤가 레오에게 영원한 삶을 주겠다며 그들을 험준한 산맥의 비밀스러운 통로로 데리고 간다. 신비스러운 불꽃이 타오르는 동굴에 이른 그녀는 불을 쏘이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며 직접 불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불 속을 나온 그녀는 점차 온 몸이 늙어가기 시작하더니 작게 쪼그라들어 결국 죽고 만다. 영원한 삶을 주는 불을 두 번 쏘이면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불의 속성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오와 홀리는 아샤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심장을 베인 채 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고 남은 평생 동안 아샤에 대한 기억을 떨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1887년에 발표된 <그녀(She : A History of Adventure)>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아주 기묘하면서도, 숨은 의미로 가득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정글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해거드를 '비유와 상징, 그리고 한 가지를 다른 하나에 반영하는 데 대단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 외에도 C.S.루이스, D.H.로렌스, 그레이엄 그린, J.R.R.톨킨, 조셉 콘레드 등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암흑의 핵심>은 <그녀>의 분위기를 온전히 차용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남성이 성년이 되기 전 품게 되는 여성에 대한 욕망은 그 욕망의 강력함 때문에 완전무결한 이미지를 갖게 되며, 자신이 감히 그러한 완전무결함을 취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상상 속의 여성은 상냥하고, 아름다우며, 세속적인 오염과 무관하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사람' 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 속의 신격화된 그 무엇이다. 신격화된 그 무엇을 취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경고음을 울려댄다. 그들은 여성을 두려워하고, 다가설 수 없으며, 환상 속에서만 관계를 맺는다.

아샤는 그러한 남성 욕망의 현현이다. 미지의 대륙인 아프리카는 바로 다른 성(性)에 대한 남성의 무지함을 비유하고, 그곳의 여왕인 아샤는 남성 욕망의 대상을 상징한다. 불멸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아샤는 남성을 무릎 꿇게 만들고,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욕망하게 만든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의 욕망은 진정한 욕망이 아니고, 기껏해야 욕구의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남성 욕망이 실현 단계에 접어들면 이번에는 아샤의 이미지가 깨어진다는데 있다. 금기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모든 환상은 깨어진다. 레오가 아샤의 구애를 받아들인 직후 그녀가 2천년 세월을 온 몸에 아로 세긴 채 죽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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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최수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한 사내가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여름이 막 시작된 시기에 낙엽이 이리저리 쓸리고 있다. 그는 낙엽들을 자세히 살피다가 그것들이 매미임을 인지한다. 그는 매미들이 그리는 작은 원들에 의해 포위되고, 함정에 빠졌으며, 비로소 자신이 매미들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간인 듯도 했고 매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매미들의 울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고, 자신이 한 마리의 매미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사내는 매미가 되기 직전의 하루를 떠올린다. 그는 한 모텔에서 기억상실자로 깨어난다. 문신이 있는 여관 주인과 단속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주인의 딸인 듯한 여자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난다. 여자아이는 곧 다른 청소년들의 무리에 섞여 사라지고, 뒤쫓던 사내는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그는 주민등록증의 주소를 통해 자신이 살던 집이 경기도의 신도시임을 확인하고, 통장 잔고를 통해 중간 정도의 소득 수준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낸다.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남긴 남자와 여자를 만나 자신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술집 '아우라'의 여주인과 관계를 맺는다. 환상 속에서 그는 여주인의 남편이었고, 남편이 곧 그의 아들이기도 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지하도에서 그는 은행에서 난동을 부리던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그를 매미의 세계로 인도한다. 노인은 매미의 세계를 사내가 원했고, 그런 사내의 욕망을 매미들이 감지하여 노인을 인도자로 삼아 그를 데려오게 했다고 말한다. 노인이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애벌래만 남고, 사내는 애벌래를 돌로 내리친다. 그 순간 시간의 화살이 날아와 사내의 이마에 박히고 시간이 정지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섰던 것인지, 이미 자신이 지은 죄를 찾아나선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내는 매미가 되었다.

 

그리고, 또 사내가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주의를 둘러보고, 자신이 매미의 세계에 갖혀 있음을 깨닫게 되며, 자신이 한 마리의 매미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93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얼음의 도가니>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과 화해를 꾀하며 <매미>를 읽는다. 화해는 어려워 보인다. 

한 사내가 매미가 된다.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매미>에서는 '변신'이 아니라 '변태'에 가깝다. 그 사내는 매미가 되기 직전 만 하루를 인간으로 살게 되는데, 그나마도 기억을 잃은 채로이다. 따라서 사내의 일평생이 곧 만 하루 동안 펼쳐진다. 장자의 나비처럼 그는 자신이 매미인지, 매미가 자신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중언부언하기 시작한다. 매미가 되기 직전 사내의 의식은 일견 의미 없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스토리를 기대한 독법은 즉시 수정되어야 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다. 기억이라는 것은 일종의 저장이다. 그런데 단지 저장만 된다고 해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양질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때에 저장으로서의 기억이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애초에 저장되는 기억의 편린들에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무언가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해야 옳다는 마음가짐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기억상실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기억상실 이후 사내는 만 하루를

꼬박 살아낸다. 그 하루의 반복이 곧 그 사내의 평생일 것이다. 그런데 그 하루가 반복되는 동안 어떤 유의미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고, 통찰력을 지닌 듯한 상태에 빠져 들다가도 매미의 울음 소리와 환상으로 불가지론적인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런데 작가는 매미가 된 사내의 웅얼거림을 맨마지막에 다시 반복해 놓음으로서 사내가 기억상실 상태의 하루를 무한 반복하도록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의 깊이가 얼마만큼 깊은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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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지음, 안정효 옮김 / 청년정신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씰리는 14살에 아버지에게 강간 당해 두 번씩이나 아이를 낳는다.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어머니가 죽고, 씰리는 앨버트 에게 팔려가듯 시집 간다. 앨버트는 사실 씰리의 여동생 네티를 원했지만 아버지가 네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씰리를 암소 한마리와 함께 내준 것이다. 씰리는 앨버트의 전 아내가 낳은 아이들을 기르며 짐승처럼 학대받는다. 씰리는 네티 역시 자신과 같은 꼴을 당할 것을 염려해 네티를 불러들인다. 이번에는 앨버트가 네티를 집적인다. 뜻을 이루지 못한 앨버트가 네티를 쫓아낸다. 씰리는 네티에게 마을에서 유일하게 돈을 가진 흑인 목사를 찾아가라고 한다. 씰리의 사라진 두 아이들은 목사의 양자로 들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슈그 에이버리라는 가수가 마을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앨버트는 갖은 치장을 다하고 슈그 에이버리의 공연을 보러 간다. 얼마 후 슈그 에이버리가 못된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자 앨버트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앨버트는 슈그와 연인 사이였으나 결혼이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었다. 결혼한 후에도 둘은 불륜 관계를 가졌었고, 이제는 씰리가 있는 집으로 슈그를 들인 것이다. 씰리는 슈그에게 질투심을 느끼기 보다는 그녀를 동경한다. 처음에는 씰리를 하녀처럼 대하던 슈그도 씰리의 헌신적인 태도에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학대받는 그녀의 편에 선다. 몸이 다 낳은 슈그는 씰리에게 성적인 쾌락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둘은 앨버트가 감추어 둔 네티의 편지를 발견한다.

네티는 목사 부부와 함께 아프리카의 세네갈로 선교 활동을 떠났고, 그곳에서 씰리의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네티는 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편지에 담아 보내왔었는데 앨버트가 편지를 숨겨두고 전해주지 않은 것이다. 씰리는 앨버트에 대한 격한 살의를 느낀다. 그녀는 앨버트를 버리고 슈그를 따라나선다.

씰리가 취미삼아 만든 바지가 인기를 얻어 공장을 차리기에 이른다. 얼마 후 아버지가 죽는다. 아버지라 부르던 사람이 사실은 의붓아버지였고, 집은 원래부터 씰리와 네티의 소유였음이 밝혀진다. 

집을 얻은 기쁨도 잠시, 슈그가 나이어린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 씰리를 떠난다. 그리고 네티와 아이들이 탄 배가 독일군의 어뢰에 침몰당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하지만 네티의 편지는 계속 전해져왔고, 씰리 역시 계속 답장을 한다.

앨버트는 씰리가 떠난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는 전보다 사려깊고, 전보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된다. 앨버트는 씰리와 다시 합하기를 원하지만 씰리가 원치 않는다.

슈그가 돌아온다. 그리고, 네티와 아이들 역시 돌아온다. 아이들은 씰리들을 늙었다고 생각하지만, 씰리는 자신들이 그렇게 젊은 기분을 느꼈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더 컬러 퍼플>은 사회적 지위로 따지자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흑인 여성을 다루고 있다. 씰리의 아버지는 단지 백인보다 돈을 많이 버는 가게를 가졌다는 이유로 백인들에게 팔다리가 잘린 채 화형당한다. 어머니는 그때문에 미쳐버린다. 씰리는 겨우 열네살에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당했으며, 남편에게는 상시적인 구타에 시달렸고, 성적인 면에서는 남편 욕구의 분출을 받아 내는 직업여성 수준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들과의 연대의식 속에서 씰리는 차츰 삶의 성찰을 하나씩 얻게 되고 마침내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가기에 이른다. 그 과정이 부단한 투쟁의 과정은 아니었지만, 그런 이유로 독자에게는 오히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네티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의문을 여러차례 던진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외양 묘사에 따르면 '머리가 양털처럼 곱슬거리'고, 예수님이 태어난 지역이 아프리카 부근인 것을 볼 때 예수님은 흑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백인들을 통해 세계적으로 확산된 탓으로 예수님이 마치 백인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백인을 '벌거벗은 자'로 부르는데, 아담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한 것은 우의적으로 읽혀야 하리라는 것이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관점들이다.

 

안정효가 번역한 <더 컬러 퍼플>은 다른 번역본이 나오기가 어려워 보인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씰리가 흑인 토속 영어(black folk English), 혹은 엉터리 영어로 쓴 초반부의 문장들을 안정효는 '문장의 해체' 방법을 고안하여 번역하였는데 역자가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안정효는 자신의 소설을 직접 영문으로 번역하여 미국에서 출판할만큼 번역자로서 역량이 뛰어난 작가이고, <더 컬러 퍼플>의 번역 역시 유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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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리는 날
김한수 지음 / 창비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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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성장(1988년, 창작과비평 겨울호)

 

창진의 아버지는 전화기 수리공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생계를 이어가려 하지만 빚만 늘어가고 급기야 자식 학비마저 대지 못하자 술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처증 때문에 아내를 구타하기 시작한다. 아내가 집을 나가 식모살이로 들어가자 마음을 다잡아 먹고 다시 일을 시작하지만 가난의 수렁은 그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고 또다시 술을 먹고 돌아온 아내를 때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창진은 아버지에게 패배자라며 악을 쓰고 학교를 때려 치운다. 아버지는 유서를 남긴 채 실종된다. 공장에 들어간 창진은 어떻게든 학업을 이어가려 하지만 대학교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기계처럼 일하던 창진은 어느 날 자신의 얼굴에서 패배자라고 비난했던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사장이 눈물을 흘리며 회사가 적자라며 노동자들의 이해와 희생을 호소하던 날, 창진은 사장의 통화내용을 듣게 된다. 사장은 노동자들을 멋지게 속여넘긴 자신의 기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창진은 마루봉을 주워들어 사장의 머리를 내려친다. 창진이 사고를 친 날, 집이 강제 철거 당한다. 보상비는 사장과의 합의금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이사가는 날 창진은 짐과 함께 트럭에 몸을 부린다. 눈발이 거세지자 창진은 세상에 죽은 것은 없다.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며 웃는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뒤덮이고 있었다. 

 

o 봄비 내리는 날(1990년, 문예중앙 가을호)

 

만삭인 아내가 한 장의 통지서를 받아들고 울적한 심사를 감추지 못한다. 통지서는 입주안내문이었다. 만석과 아내 영란은 강제 철거를 당하면서 입주권을 받았지만 입주에 필요한 보증금을 구하지 못해 입주권을 삼백만원에 투기꾼에게 팔았었다. 그런데 이제 입주안내문이 날아왔으니 백만원이 없어 내 집 마련의 꿈을 날려버린 부부에게는 씁쓸한 심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입주권은 이제 프리미엄이 붙어 천만원에도 거래된다 했다. 투기꾼들은 재개발 예정지에 하룻밤 사이 무허가 주택을 여러채씩 지어 나갔고 심지어는 동사무소 옆에도 지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는 입주권을 사고, 자신들이 지은 유령 주택에서도 입주권을 뽑아내어 열 채 이상을 소유한 후 팔아치웠다. 주공과 투기꾼들만 배가 부를 뿐이었다.

입주권을 사간 자가 만석에게 오십만원을 내밀었다. 대리 입주할 때 말썽을 부리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만석은 부탁을 뿌리치고 입주권을 되찾겠다고 마음 먹는다. 어짜피 입주권을 사고 판 사실이 알려지면 둘 다 처벌 받을 것이고, 자신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심사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주에 필요한 돈은 결국 아무도 빌려주려하지 않는다. 만석은 남의 집이 되어버린 아파트에 남의 짐을 싣고 이사를 간다.

만석은 프레스기에 팔이 잘린 강대석 형에게 대리입주의 대가로 받은 돈을 주어 포장마차라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대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구걸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자살하고 만다. 그날 봄비는 한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거세게 내린다.

 

o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1992년, 신작중편소설집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

 

한때 건달 생활을 했던 덕배는 손을 씻고 공장에 들어가 기술을 배운다. 4년여를 착실히 일한 끝에 반장이 된다. 그가 사는 집 주인은 황영감님이라는 분인데 남원댁이라는 이와 늘그막에 함께 살다가 지금은 뇌출혈로 운신을 못했다. 영감의 아들들은 검사에 사장에 출세들을 했다고 하는데 찾아와보는  법도 없는 불효자들이었다.

그 집에는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 평생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아이들을 먹여살리려고 고생만 직사하게 하는 복길이네, 장가를 들어보려고 서울에 와서 공장에 나가는 정구씨, 그리고 무당 보라네와 이제 사장님이 되어 형편이 펴지자 남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은비네, 그리고 수상쩍은 연하남과 사는 현주네 등이 함께 살고 있었다.

휴가비 때문에 사장과 면담을 한 덕배는 사장이 연마기를 한 대 사면 하청을 주겠노라는 약속에 동료들을 배신하고 현민을 쫓아내는 데 앞장서기까지 한다. 현민이 쫓겨나면서 보낸 눈빛이 덕배의 마음에 아로세겨져 못내 부끄러워진다. 현민은 형사들에게 팔이 꺾여 연행된다.

황영감이 죽자 아들들이 찾아와 남원댁을 쫓아내려 하고 얼마 후 남원댁이 자살한다. 정구씨는 술집 아가씨에게 연정을 품지만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복길이네는 자궁암에 걸리고 만다. 현주네는 동생이라 부르며 쉬쉬하던 연하남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연마기가 들어오기로 한 날 덕배는 전화를 걸어 기계 들여오는 날을 일을 며칠 미룬다. 그는 현민을 면회가기로 한다.

 

김한수의 초기 중편 모음집으로 노동자의 운명이 되물림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 <성장>, 주택재개발과 투기꾼들의 잔치 이면에 피눈물을 뿌리는 도시 빈민을 그린 <봄비 내리는 날>, 한 지붕을 이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과 아픔을 그린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이 실려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성장>은 계절적 배경이 겨울이고, <봄비 내리는 날>은 봄, 그리고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은 여름이니, 결실을 맺는 가을은 빠진 셈이다.

<성장>은 그의 데뷔작인만큼 거칠고 직선적이다. 인물들의 생각과 대화 이외의 소설적 장치들이 빈약하여 마치 무대 설명을 뺀 희곡을 읽는 느낌을 준다. 소설적인 완성도는 90년에 발표된 <봄비...>와 92년에 발표된 <그 무더웠던...> 쪽으로 갈 수록 높아진다.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까지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많이 내렸다. 이 책은 2008년도 겨울에 인천중앙도서관 1층 책꽂이에서 뽑아온 책이다.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고 책꽂이에 줄줄이 꽂아놓은 책 중에는 폐기처분해야 할 책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유독 이 책이 눈에 띄어 들고온 것이다. 지금도 그 책꽂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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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네가 남긴 것 사계절 1318 문고 25
지그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한스에게 가족들이 아르네의 유품을 정리하라고 주문한다. 아르네가 남긴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한스는 아르네를 떠올린다.

 

아르네의 가족이 막대한 빚 때문에 모두 자살하고, 살아남은 아르네는 한스의 아버지가 맡아 기르게 된다. 아르네는 다른 나라 언어에 재능이 있었고, 솔직한 성품에 사려깊은 아이였다. 그러나 아르네의 그런 성품이 아이들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아르네는 비트케에게 애정을 느꼈고 아이들과 섞이고 싶어했지만 아이들은 그럴수록 아르네를 밀어내기만 한다.

버려진 배를 수리해 자신들의 배로 삼기로 결정한 아이들은 아르네가 큰 돈을 내어 수리를 돕자 어쩔 수 없이 아르네를 자신들의 동아리에 끼워준다. 하지만 아르네의 실수로 배가 가라앉아 버리자 아이들은 아르네를 다시 소외시킨다.

어느 날 아이들이 아르네에게 친밀하게 굴자 아르네는 마냥 기뻐한다. 아이들은 아르네를 이용해 폐선처리장에서 물품을 훔쳐낼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이 과정에 아르네의 친구이자 폐선처리장 경비인 칼룩씨가 다치게 된다. 아르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모든 사실을 실토하고 아이들은 아르네를 무시한다. 아르네가 혼자 타고 나간 배는 빈 채로 발견된다.

 

한스의 동생 라르스가 정리된 유품을 생전의 아르네가 놓아 두었던 자리에 놓는다. 한스는 라르스가 하는 행동이 아르네가 언젠가는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자신의 마음과 같기에 내버려둔다.

 

아르네가 가장 재능을 보인 것은 언어학이었다. 뿐만 아니라 매듭을 지어 문자를 나타내는 것에도 흥미가 있었고,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도 탁월했다. 아르네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체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동아리에는 끼지 못한다. 아르네의 솔직함은 아이들에게 낯설었고, 책임감은 비난의 구실을 줄 뿐이었다. 아르네의 자살은 곧 진솔함과 성실함, 그리고 책임감 등의 미덕이 사람들 사이에 처할 곳을 찾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힌다.

아르네가 돌아오길 바라서 유품을 치우지 않는 것은 아르네를 괴롭히던 라르스이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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