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최수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한 사내가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여름이 막 시작된 시기에 낙엽이 이리저리 쓸리고 있다. 그는 낙엽들을 자세히 살피다가 그것들이 매미임을 인지한다. 그는 매미들이 그리는 작은 원들에 의해 포위되고, 함정에 빠졌으며, 비로소 자신이 매미들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간인 듯도 했고 매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매미들의 울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고, 자신이 한 마리의 매미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사내는 매미가 되기 직전의 하루를 떠올린다. 그는 한 모텔에서 기억상실자로 깨어난다. 문신이 있는 여관 주인과 단속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주인의 딸인 듯한 여자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난다. 여자아이는 곧 다른 청소년들의 무리에 섞여 사라지고, 뒤쫓던 사내는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그는 주민등록증의 주소를 통해 자신이 살던 집이 경기도의 신도시임을 확인하고, 통장 잔고를 통해 중간 정도의 소득 수준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낸다.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남긴 남자와 여자를 만나 자신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술집 '아우라'의 여주인과 관계를 맺는다. 환상 속에서 그는 여주인의 남편이었고, 남편이 곧 그의 아들이기도 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지하도에서 그는 은행에서 난동을 부리던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그를 매미의 세계로 인도한다. 노인은 매미의 세계를 사내가 원했고, 그런 사내의 욕망을 매미들이 감지하여 노인을 인도자로 삼아 그를 데려오게 했다고 말한다. 노인이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애벌래만 남고, 사내는 애벌래를 돌로 내리친다. 그 순간 시간의 화살이 날아와 사내의 이마에 박히고 시간이 정지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섰던 것인지, 이미 자신이 지은 죄를 찾아나선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내는 매미가 되었다.

 

그리고, 또 사내가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주의를 둘러보고, 자신이 매미의 세계에 갖혀 있음을 깨닫게 되며, 자신이 한 마리의 매미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93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얼음의 도가니>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과 화해를 꾀하며 <매미>를 읽는다. 화해는 어려워 보인다. 

한 사내가 매미가 된다.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매미>에서는 '변신'이 아니라 '변태'에 가깝다. 그 사내는 매미가 되기 직전 만 하루를 인간으로 살게 되는데, 그나마도 기억을 잃은 채로이다. 따라서 사내의 일평생이 곧 만 하루 동안 펼쳐진다. 장자의 나비처럼 그는 자신이 매미인지, 매미가 자신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중언부언하기 시작한다. 매미가 되기 직전 사내의 의식은 일견 의미 없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스토리를 기대한 독법은 즉시 수정되어야 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다. 기억이라는 것은 일종의 저장이다. 그런데 단지 저장만 된다고 해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양질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때에 저장으로서의 기억이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애초에 저장되는 기억의 편린들에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무언가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해야 옳다는 마음가짐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기억상실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기억상실 이후 사내는 만 하루를

꼬박 살아낸다. 그 하루의 반복이 곧 그 사내의 평생일 것이다. 그런데 그 하루가 반복되는 동안 어떤 유의미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고, 통찰력을 지닌 듯한 상태에 빠져 들다가도 매미의 울음 소리와 환상으로 불가지론적인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런데 작가는 매미가 된 사내의 웅얼거림을 맨마지막에 다시 반복해 놓음으로서 사내가 기억상실 상태의 하루를 무한 반복하도록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의 깊이가 얼마만큼 깊은지 알 수 없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0189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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