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사소했던 일 VivaVivo (비바비보) 37
왕수펀 지음, 조윤진 옮김 / 뜨인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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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7학년 1반 교실에서 린샤오치가 큰 소리로 "일본에서 사 온 금색 볼펜이 왜 안 보이지?"라고 외친다. 그러자 장쉐가 "어라, 천융허의 필통에 그거랑 똑같은 펜이 들어 있는데?" 라고 말했다. 천융허는 아무 말 없이 벌게진 얼굴로 일어나더니 린샤오치 책상 앞으로 걸어가 볼펜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은 조용해졌다.

잠시 후 반장 장페이페이가 "만약 천융허가 그 볼펜을 훔쳤다면 어째서 장물을 필통 안에 넣어 두었겠어?"라고 말해 정적은 깨졌다. 장페이페이는 천융허가 도둑이 아니라고 말한 것 같았지만, '장물'이라는 표현은 천융허가 도둑이라는 연상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은 꼬리를 이었다. 수요일에 리뷩쉰이 500위안을 잃어버렸다고 한 것이다. 이 주일 뒤에는 저우유춘이 500위안이 충전된 버스카드를 잃어버렸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차이리리가 300위안을 잃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페이페이가 학급비 100위안이 빈다고 말했다. 천융허가 도둑으로 몰리는 분위기가 조성되던 시점에 천융허가 왕 선생님께 이렇게 말한다. "제 돈 1,000위안이 없어졌어요"

린샤오치는 잦은 이사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 어렵자 물건에 집착하고 허언을 일삼았다. 그녀가 최근 집착하는 물건은 금색 볼펜. 장쉐는 그 볼펜을 허락 없이 빌려 쓰다 얼떨결에 천융허의 필통에 넣어버린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지만 장쉐는 천융허를 위해 명확하게 해명의 말을 해주지 않았고, 반장 장페이페이는 절친 장쉐가 천융허를 좋아하는데도 그가 쌀쌀맞게 굴었다는 이유로 사건을 키워버린다.

도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때다 하고 뤼뷩쉰은 500위안을 게임아이템 사는 데 써버린 후 부모에게 도둑맞았다고 거짓말하고, 저우유춘은 장페이페이의 사주를 받아 버스카드를 잃어버렸다고 선생님께 말한다.

차이리리 역시 회식비로 모은 300위안을 엄마가 가져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도둑맞았다고 선언한다. 여자아이들이 거는 장난에 진절머리가 나 쌀쌀맞게 대했다가 오해를 사 도둑으로 몰리는 천융허 역시 1,000위안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사건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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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독자에게 맡긴 뒷이야기를 맡기고 조용히 물러난다. 아이들을 위한 성장소설이고, 관계의 소중함과 다양한 시각의 중요성을 제시해주려는 작가의 선량한 의도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소 섬뜩한 결말을 떠올려 본다. 집단 따돌림이 시작되는 폭력적 전개나, 누군가의 자살로 끝나는 비극적 결말 같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작 <방과 후>에서 살인 이유는 자위행위 장면을 들켰다는 어이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학폭과 괴롭힘의 가해자가 둘도 없는 절친이었 듯, <처음엔 사소했던 일>에서도 천융허를 제일 먼저 외면하고 그가 도둑으로 몰리는 것을 고소해하는 것은 절친 뤄추안이었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그것이 내면의 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황 때문일지라도 미성숙한 아이들의 행동이 만드는 비극은 어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소했던 일들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보여주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진실을 밝히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종종 인간의 편견과 욕망 때문임을 깨닫는다. 눈으로 본 것이 사실에 가까울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아동문학작가 린즈링은 이렇게 말한다.

각도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사건의 전모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사각지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 발견되지 못한 것은 '생리적 각도'가 아니라 '심리적 각도'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이나 경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삶의 시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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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의 품격
신노 다케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윌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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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빙하기에 당당히 다이코 투어리스트 취직에 성공한 엔도 다케시는 본사에서 경력을 쌓아 성공가도를 달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공항으로 전보 되면서 급격히 우울해진다. 공항 업무는 경력이 될 수 없다는 인식과, 매출을 만들지 못하는 현장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6년 사귄 여자친구도 이별을 통보해와 엔도는 죽을 맛이다. 생일을 지나면 이제 서른. 업무는 서툴고, 상사는 의욕이 없고, 계약직과 정규직간의 갈등, 현업을 무시하는 본사의 부당한 대접까지, 뭐 하나 수월할 것 없는 공항 생활을 엔도는 잘 해쳐나갈 수 있을까.

신노 다케시는 1965년 도쿄 출생으로 직장을 잘 다니다 갑자기 그만두고 노숙생활을 3년간 하다 <8월의 마르크스>를 써서 1999년 제45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그야말로 별쭝맞은 작가다. 주로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공항의 품격>은 그가 여행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 재밌는 얘기들을 엮은 소설이다. 제139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은 실패했다. 후속편으로 <연애의 품격>이 있다.

에피소드들은 공항과 여행사의 속사정을 바탕으로 재미나게 전개된다.

웃어, 웃어 아포양

재입국 비자가 없는 브라질 국적의 일본계 소녀가 수상쩍은 남성 둘과 출국을 하려 한다. 그녀는 출국 후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선배 이마이즈미가 그녀의 여권을 찢어버려 출국을 못하게 만들고, 험악하게 들이대는 조폭들에게 엔도는 '유령' 밀항자 조직원이 그랬다고 떠넘겨 버린다.

패밀리 비즈니스

하늘하늘씨라고 불리는 노사카씨의 샌딩에 문제가 생겼다. 오후반의 까다로운 슈퍼바이저 호리우치가 자신의 어머니 같은 분이라며 노사카씨를 부탁하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떠나지 못할 상황에서도 태연해 보인다. 알고보니 그녀는 1년에 2~3번 출발하지 못할 상황이 되면 자신을 데리러 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온타임

축구를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깜빡하고 여권을 두고 왔다. 부모는 여동생만 데리고 출국해버린다. 남겨진 아이를 할머니에게 인계해야할 임무를 맡게 된 엔도. 호감을 품고 있는 고가에게 보여주려던 활주로 유도등 점멸 점검 장면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어린시절 불쾌한 기억이 남지 않도록 마음을 쓴다.

생쥐와 탐정

사전수속 제도가 없어졌다. 그말인 스태프가 남게된다는 얘기. 구조조정의 찬바람이 불면서 평온했던 사무실에 불편한 기류가 형성되고, 사무실 내 단말기로 항공 예약이 취소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취소로 이득을 얻는 사람이 누군지 범인을 밝혀내려는 엔도에게 이마이즈미는 '생쥐의 짓이니 범인 색출을 그만 두라'고 말한다. 실수는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범인으로 특정되면 관계는 깨져버리는 것.

황금돼지

정년을 눈 앞에 둔 스미타 소장의 후임으로 만년과장 대리 야스지마가 내정된다. 현장과 현장 책임자 자리를 우습게 보는 본사에 대해 스미타 소장은 '마음에 안 드는 윗사람을 쥐어박고 회사를 그만두는 꿈'을 일부나마 실현한다.

불완전 여행

좋은 감정을 품고있던 고가가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되어 헤어지게 된 엔도의 기분은 한껏 다운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시국에 NO-REC 사태가 계속 일어난다. 연달아 일어나는 NO-REC는 누군가가 마음먹고 조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신혼여행 부부의 여행이 NO-REC 상태라는 게 확인되자 현장은 패닉에 빠지고 만다. 가까스로 수습하고 고가의 배웅까지 겨우 마친 엔도는 자신이 현장에 배치될 당시 경멸해 마지 않던 바로 그 '아포양'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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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밤
임영태 지음 / 문이당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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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을평에서 >

그해 가을, '나'는 을평으로 사흘간의 출장 여행을 갔다. 그곳은 출장 때마다 만나는 지방 소도시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출장지에서 할 일이란 의원급 병원들에 판매한 건강보험 청구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나'는 당시 잘나가는 개발부를 마다하고 교육부에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열정을 허랑하게 여기고, 부질없음의 인식이 주는 어떤 초극의 심사, 그 무중력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내'가 교육할 사람은 50대 원장에 비해 10여 년은 아래로 보이는 원장 부인이었다. 그녀는 애교스러웠고, 교육 내내 방실방실 웃었으며, 은근히 '나'에게 추파를 던졌다.

교육 마지막 날 원장 부인이 제안한 식사 자리에 사무장이 찾아왔다. 그는 원장 부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난, 당신 없으면 못 살아요. 차라리 날 죽여요.'라고 말했다. 다음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부인이 사무장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부드럽게 만져 주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붙안고 있을 것만 같았다.

< 이슬비 내리는 봄날 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컴퓨터에 메달려 마케팅 자료를 뒤적이던 승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대학 선배 황이었다. 황은 아는 후배 하나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같이 마셔주면 안 되겠냐는, 다소 뜬금없는 부탁을 해왔다. 뭐에 홀렸는지 승호는 부탁대로 남자를 만나 술을 마시기로 한다. 남자를 만난 승호는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자가 엉뚱한 말을 꺼낸다. "내가 지금 사람을 죽이고 오는 길이라면 믿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아는 어떤 선배, 매우 섬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매번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내기 어려워하는 그를 남자는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선배라는 사람 집에 같이 가보겠냐고 했다. 승호는 남자의 말이 진실일리 없다고 생각했고, 호기심이 일었으므로 따라가보기로 한다.

선배가 살았던 곳이라는 곳에 도착한 뒤에도 남자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승호는 남자에게 이해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친구가 생긴 것도 같은 기분을 느끼며 승호는 남자와 헤어진다. 그리고 문득, 남자가 죽였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뒤돌아 미친듯이 뛰어가 지하방으로 갔을 때 남자는 이미 방범창 창틀에 길게 매달려 있었다.

승호의 귓가에 '이해하겠어요? 이해하겠어요?' 라고 묻던 남자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 전곡에서 술을 마셨다 >

'나'는 소설책을 네 권 펴낸 중견 작가다. 이 정도면 뭔가 도사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 과거 '내'가 생각하던 작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난해 말 전곡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글에 세 번 등장했다. 그렇다고 애틋한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고 관계의 끈이 이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닐 당시 '나'는 모범생이었고, 그는 그림자 같은 처지의 외톨박이었다. 그는 육체가 다부졌던 편이었고, 싸움을 잘했다.

'나'는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갔다. 전곡의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왔고, 외로웠던 나는 감상적인 마음이 되어 정성껏 답장을 했다. 편지들 사이에 그의 것도 있었다. '나'와 그는 학교 다닐 때보다 한층 애틋한 심사를 서로 나누며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면서도 고향에서 서로 마주치는 것은 극구 피했다. '나'와 그는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친밀한 관계였다.

어쨌거나 다시 찾은 전곡에서 나는 우연히 길거리 현수막에 '전곡초등학교 제1회 동창 모임'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늘봄회관' 이라는 곳을 호기심에 들러 본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둘은 동창회가 열리는 식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따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여섯 살에 소년원을 다녀온 이야기, 아는 여자가 경쟁 조직원에게 윤간을 당한 뒤 자살한 이야기, 지금은 사람을 찾아 칼침을 놓거나 겁을 주는 일이 호구지책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도 소설이 되는지 물었다.

그와 헤어진 뒤 '나'는 다시 동창회가 열리고 있는 식당으로 돌아온다. 식당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사내가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고, 곧이어 경찰차가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날 '나'는 억병으로 취했고, 다음 날 깨어나 보니 노트북 화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어떤 것들에 감동받지? 나는 무슨 노래들을 부르지? 나는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지?'

<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

어느 거리를 지나다 문득 스무 살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여자는 '나' 혼자였다. 우리는 석철의 둘째 형이 신혼집으로 장만해 두었다가 갑자기 해외 발령이 나서 빈집이 된 곳에 모여 놀았다.

체육전문대 유도부 1학년생인 석철이 운동을 하고 있고, 광호는 안방에서 쾌활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시인 지망생인 진수가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다. 그런 모습들이 떠오른다.

술을 마시다가, 설겆이 내기 탁구를 치다가, 치기가 엿보이는 자작시를 낭독하다가, 그러다가 막연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광호는 무장 탈영병 수색 작전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석철은 유도장을 차렸다가 건물주와 시비가 붙어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런 소식을 전하는 진수의 쓸쓸한 전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스무 살 시절의 환했던 시절을 떠올렸고, 내 나이가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 무서운 밤 >

새벽 세시, 어두운 밤길을 '나'와 친구가 걷고 있다. 친구는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아'라고 말했다.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시시한 행동들을 했다. 삼사관학교 면접 때 너무 떨어서 떨어진 이야기, 투명 모자를 파는 직업을 갖게 된 이야기, 모델 하우스 경비가 된 이야기, 7년 사귄 여자가 사랑하냐고 묻자 '모르겠어'라고 답했다가 차인 이야기.

그러다 다방에 들어갔다. 한 여자가 몹시도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잠시 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창밖으로 저를 봐주세요. 제가 완전히 안 보일 때까지 쭉 봐주세요'. 여자는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다방에서 나갔고, 잠시 뒤 질주하는 트럭으로 몸을 날렸다. 트럭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고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무서워! 하고 그때 친구가 말했다.

< 서울, 1994년 여름 >

그날, '나'는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들과 술을 마신 뒤 24시간 편의점 앞에서 박이라는 사내를 만났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으므로 '나'는 비디오 가게를 경영하는 이야기, 슬픈 영화를 보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감정 수습이 안 되어 곤란한 이야기, 들어온 손님의 외모에 따라 눈에 띈 바퀴벌레의 생사 여탈권을 행사하려 했다는 따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그러다 '나'는 비디오 가게를 늦게까지 지키고 있을 아내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전화는 매우 혼잡했다. 한 아가씨가 선뜻 자신의 휴대전화를 물건 고르는 동안 사용하라고 빌려준다. 그리고 박에게도 전화할 곳이 있으면 사용하라고 권한다. 박은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식으로 누군가와 통화했다. 나는 통화 상대방이 동업자가 아니냐는 추리를 박에게 들려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전화의 주인 여자가 빌려준 사실을 깜빡 있고 자리를 떴다가 찾으러 오겠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여자는 나타났고, 셋은 술을 마시게 된다. 여자는 아메리카 유학생으로 속칭 '오렌지'였다. 취중에 셋은 노래방을 간다. 노래방에서 '나'는 남행열차를 불렀고, 호남선이든 영남선이든, 지금 빗물이 흐르는 차창가에 앉아 있는 거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얼마 후 셋은 노래방을 나왔다. 휴대전화는 어디선가 잃어 버렸다. 여관 네온 간판도 꺼져가는 시각이었다.

< 포장마차 >

새벽 두시에, 낯선 뒷거리의 쓸쓸한 어둠 속에서, 빠듯한 택시비를 셈하며 망설이다가 '나'는 포장마차로 들어선다. 주인은 건장한 체격의 수굿한 청년이었고, '나'는 왠지 그 청년과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며 술잔을 기울였다.

잠깐 요의를 느껴서 처리를 해야할 때 '나'는 주인이 도망갔다고 생각할까봐 염려했으나 그는 역시 '수굿한' 청년답게 무심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더욱 더 청년에게 호감이 간다.

몹시 추운 그 날, '나'는 네시 가까운 시각에 포장마차를 나섰다. 심야 버스가 끊겼을 거라는 생각에 암담했다. 그래도 심야 버스 정류장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어 포장마차 쪽으로 되돌아가다가, '나'는 듣는다.

수굿한 청년이 마중 나온 어린 동거녀에게 진상 손님, 즉 어떤 씨발놈이, 술 한 병 시켜 놓고 계속 죽쳐서 재수 옴 붙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이 뒤돌아서자 들킬까봐 황급히 골목길에 세워 둔 석유통 뒤로 숨는다. '나는 석유통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 돌아눕는 자리 >

병호는 열셋 되던 해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매일 같이 술에 취해 지냈다. 어머니는 물장수 사내를 비롯해 여러 남자와 붙어 먹었다.

갑수 소개로 도자기 전시장 짓는 일을 얻는다. 읍내로 나가 커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딱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시간 정도 커피를 마시면서 앉아 있다 오는 것이 다였다.

어느 날, 도자기 공장 여자와 읍내에 같이가게 되었다. 여자는 평소에 말이 없었지만 읍내에 함께 가게 되어선지 병호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 읍내에 나간 여자가 돌아오지 않았다. 놈씨가 주말마다 내려와 놈 풀고 용돈까지 얻어쓰다가 차버린 모양이었다.

공사 책임자와 싸우고 병호는 일터를 떠난다. 버스정류장에서 여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뒤따른다. 여자는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여관 간판이 달린 건물 화단에 걸터앉아 손가방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때 문득 어머니는 자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자의 굽은 등이 잠깐 가볍게 출렁거렸고 곧이어 좀 더 어깨가 내려갔다. 골목은 무거운 정적이었다.

< 그해 여름 이야기 >

아버지가 이웃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온 그해 '나'는 처음 자위를 했고, '새나라 전기'에 취업했다. 공고 전기과 졸업반이었다. 인문계, 아니 상고 보다도 못한 처지였지만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들은 학생이라며 공고생들을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남자 공원들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나'는 공장에서 정화라는, 얌전한 아가씨에게 마음을 두게 된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 주면서 홀로 이런저런 상상을 키워갔다.

사측과 근로조건으로 대립하다 단체 행동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화는 생산과 공원들을 도와주기로 한 학생들에 대해 좋게 이야기했고, '나'는 쑥스러워 한다. 하지만 과장의 분열 책동에 말려든 학생들은 결정적인 순간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음 날 정화는 나를 차갑게 대했고, 나는 그녀의 집 부근까지 뒤따라 갔다가 우연히 남자 공원과 정화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정화는 그 공원과 사귀는 사이였고, 공원은 우리를 '그 배신자 새끼들, 교복 입고 깝죽대는 놈'이라고 멸시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때쯤 고양이는 사라져 버렸다. 그해 여름, 고양이를 키우던 일과 자위행위를 배운 일 말고 내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아껴서 읽는 작가들이 있다. 이문구, 그리고 임영태.

읽기 전까지 몹시 망설이고, 읽고 나면 책 표지와 책 등을 쓰다듬어 본 뒤 책꽂이에 꽂아놓고 미소 짓는다. 아직 몇 권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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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죽이기 죽이기 시리즈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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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빌이 앨리스에게 뜬금 없이 암호를 정하자고 제안한다. 암호를 왜 정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빌은 당연하다는 듯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나는 이미 적이 아니'라는 앨리스의 항변에도, 도마뱀 빌이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계속하자 앨리스는 포기하고 암호를 정해자고 한다. 도마뱀 빌이 "스나크는" 이라고 말하자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부점이었다"고 말한다. (루이스 캐럴의 시 스나크 사냥의 맨 마지막 행인 For the Snark was a Boojum, you see)

도마뱀 빌은 깜짝 놀란다.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다. 앨리스의 주머니 속에서 잠을 자던 겨울잠쥐를 잠깐 의심해 봤지만 역시 둘은 이 암호에 대해 오늘 처음 말하는 것이었다.

혼란에 빠진 둘에게 왕과 시종, 말들이 허둥대며 지나갔다. 험프티 덤프티가 담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미치광이 모자장수와 3월 토끼가 험프티 덤프티는 살해 당했고, 이것은 살인사건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잠에서 깨어난 구리스가와 아리는 자신이 최근들어 똑같은 세계에 관한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꿈에 관한 상념에 빠져 있던 아리는 문득 학교에 늦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햄스터에게 먹이를 준 뒤 대학 연구실로 향한다.

연구실은 묘하게 어수선했다. 누군가 나카노시마 연구실의 오지 씨가 옥상 가장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동글동글한 체형 때문에 달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사람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실험실 사용 때문에 이모리와 얘기하다 이모리가 "스나크는" 이라고 말하고, 아리가 "부점이었다" 라고 말하면서 세계가 확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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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야스미는 1962년 교토 출생으로 오사카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 1995년 <완구수리자>로 제 2회 호러소설대상 단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으며, 2012년 <천국과 지옥>으로 세이운상(星雲賞)을 수상했고, 2013년 메르헨 죽이기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본작 <앨리스 죽이기>를 발표했다. 시리즈는 클라라, 도로시, 팅커벨로 이어지는데 안타깝게도 작가가 2020년 11월 23일 암으로 사망하여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앨리스 죽이기>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스나크 사냥>을 기본 텍스트로 비틀기, 간섭하기, 교차편집하기 등을 통해 호러 미스터리물로 다시 태어난 작품이다. 루이스 캐럴 텍스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중심으로 훨씬 흥미로운 독서가 될 수 있다.

소설에서 앨리스는 험프티 덤프티 살해범으로 몰린다. 이유는 흰토끼가 정원에서 앨리스를 봤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상한 나라'와 '지구'가 꿈으로 연결되어 있어 꿈에서 죽으면 지구에서도 죽는다는 점이다. 꿈 속에서 누명을 벗지 못하면, 여왕의 '목을 쳐라' 명령에 희생될 것이 분명하다. 앨리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7일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사건은 계속된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그리핀이 굴을 먹다 목이 막혀 죽고, 지구에서는 시노자키 교수가 상한 굴을 먹고 식중독으로 죽는다. 다음으로 흰토끼가 부점에 의해(스나크의 일종으로 부점을 보면 사라진다) 사라지고, 지구에서는 아리의 1년 선배 다나카 리오가 괴한의 칼에 찔려 사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상한 나라에서 빌이 밴더스내치(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괴물)에게 하반신이 뜯어먹혀 사망하고, 지구에서는 이모리가 만취한 상태에서 들개에게 안면을 뜯어먹혀 사망한다.

아리는 빌이 사망 직전 남긴 다잉 메시지 "공작 부인이 범인일 리가 없다"에서 추론하여 히로야마 부교수가 사실은 공작부인이 아니라 메리 앤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 흰토끼가 앨리스를 범인으로 착각한 것은 시력이 좋지 않아 메리 앤과 앨리스를 착각한 것.

앨리스는 메리 앤에 의해 꿈 속에서 살해 당하지만 사실 앨리스 역시 지구의 아리가 아니었다. 꿈속의 앨리스와 대응되는 것은 지구의 햄스터였고, 꿈속의 겨울잠쥐가 사실은 지구의 아리였던 것.

소소한 반전에 이어 더 큰 반전이 이어지는데,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이 본체이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죄다 붉은왕이 꾸는 꿈 속의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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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주다
와타야 리사 지음, 양윤옥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유우의 아버지 토마와 어머니 미키코는 프랑스 유학 중 만나 사랑에 빠졌다. 어린 나이의 사랑이 그렇 듯,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의 사랑이 식었다. 토마는 이별을 통보했지만, 미키코가 메달렸다. 얼마 후 미키코가 유우를 임신하게 되자 토마는 어쩔 수 없이 미키코와 결혼한다.

유우는 프랑스 혼혈인 아버지 피를 물려 받아 귀엽고 깜찍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의류 통신판매 카탈로그 모델을 하게 된 유우는 어린 나이에 '스타치즈'의 평생 모델로 발탁 되며 연애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녀의 성장에 맞추어 스타치즈 CM을 매해 두 편 찍는다는 기획은 잔잔한 성공을 거두었고, 점차 성장하는 유우의 평범하면서도 반짝거리는 삶이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다. 유우의 성장하는 건강한 모습이 국민 여동생으로서의 이미지에 들어 맞았던 것이다.

대규모 소속사가 유우를 픽업하고 유우는 한층 빛나는 길을 걷게 된다. 배우와 가수, 와이드쇼의 게스트를 넘나 들며 착실히 인기를 쌓아가는 유우의 앞날은 평탄해 보였다.

고3이 되자 기획사는 유우가 보통 학생들처럼 입시에 도전해 대학에 합격한다는 스토리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뒤늦게 공부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사람에게 꿈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깨가 뻣뻣해지던 어느 날, 유우는 우연히 TV에서 본 마사아키라는 스무살 짜리 댄서에게 반하게 된다. 그에게 빠져들어 사귀게 되고, 호텔을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분위기에 휩쓸려 성행위를 동영상으로 남기게 되고, 결국 영상이 유출되어 유우는 연예계에서 퇴출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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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어쩌면 와타야 리사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와타야 리사는 17세 되던 해 <인스톨>로 제38회 문예상을 최연소 수상했고, 이후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권위의 아쿠타가와상 최연소 수상자가 된다.

유우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이름없이 잊혀질 것을 두려워한 것처럼, 작가 역시 문학이라는 세계에서 너무 화려하게 데뷔했기에 자신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꼈을 법 하다.

'꿈을 준다'는 것의 꿈은 언제까지고 '타인의 꿈'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주는 쪽에서는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379p)

유우가 연예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내뱉은 말이지만, 최연소 문학상 수상자 타이틀에 짓눌린 와타야 리사 자신의 한탄으로도 읽힌다.

내면에 차고 넘치는 것들을 써내며 해방감을 맛 보고, 그 괄과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는 오직 기쁨만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본말이 전도 되어 두 번의 최연소 수상 타이틀이 어깨를 짓누르고, 다음에 써낼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독자, 출판사, 평단의 관심이 집중되자 이전처럼 자유분방한 이야기를 써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이후 3년 만에 내 놓은 <꿈을 주다>는 그래서, 와타야 리사 스타일의 재기발랄함과 깜찍함이 덜 한 작품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622696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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