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밤
임영태 지음 / 문이당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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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을평에서 >

그해 가을, '나'는 을평으로 사흘간의 출장 여행을 갔다. 그곳은 출장 때마다 만나는 지방 소도시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출장지에서 할 일이란 의원급 병원들에 판매한 건강보험 청구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나'는 당시 잘나가는 개발부를 마다하고 교육부에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열정을 허랑하게 여기고, 부질없음의 인식이 주는 어떤 초극의 심사, 그 무중력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내'가 교육할 사람은 50대 원장에 비해 10여 년은 아래로 보이는 원장 부인이었다. 그녀는 애교스러웠고, 교육 내내 방실방실 웃었으며, 은근히 '나'에게 추파를 던졌다.

교육 마지막 날 원장 부인이 제안한 식사 자리에 사무장이 찾아왔다. 그는 원장 부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난, 당신 없으면 못 살아요. 차라리 날 죽여요.'라고 말했다. 다음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부인이 사무장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부드럽게 만져 주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붙안고 있을 것만 같았다.

< 이슬비 내리는 봄날 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컴퓨터에 메달려 마케팅 자료를 뒤적이던 승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대학 선배 황이었다. 황은 아는 후배 하나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같이 마셔주면 안 되겠냐는, 다소 뜬금없는 부탁을 해왔다. 뭐에 홀렸는지 승호는 부탁대로 남자를 만나 술을 마시기로 한다. 남자를 만난 승호는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자가 엉뚱한 말을 꺼낸다. "내가 지금 사람을 죽이고 오는 길이라면 믿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아는 어떤 선배, 매우 섬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매번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내기 어려워하는 그를 남자는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선배라는 사람 집에 같이 가보겠냐고 했다. 승호는 남자의 말이 진실일리 없다고 생각했고, 호기심이 일었으므로 따라가보기로 한다.

선배가 살았던 곳이라는 곳에 도착한 뒤에도 남자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승호는 남자에게 이해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친구가 생긴 것도 같은 기분을 느끼며 승호는 남자와 헤어진다. 그리고 문득, 남자가 죽였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뒤돌아 미친듯이 뛰어가 지하방으로 갔을 때 남자는 이미 방범창 창틀에 길게 매달려 있었다.

승호의 귓가에 '이해하겠어요? 이해하겠어요?' 라고 묻던 남자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 전곡에서 술을 마셨다 >

'나'는 소설책을 네 권 펴낸 중견 작가다. 이 정도면 뭔가 도사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 과거 '내'가 생각하던 작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난해 말 전곡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글에 세 번 등장했다. 그렇다고 애틋한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고 관계의 끈이 이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닐 당시 '나'는 모범생이었고, 그는 그림자 같은 처지의 외톨박이었다. 그는 육체가 다부졌던 편이었고, 싸움을 잘했다.

'나'는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갔다. 전곡의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왔고, 외로웠던 나는 감상적인 마음이 되어 정성껏 답장을 했다. 편지들 사이에 그의 것도 있었다. '나'와 그는 학교 다닐 때보다 한층 애틋한 심사를 서로 나누며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면서도 고향에서 서로 마주치는 것은 극구 피했다. '나'와 그는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친밀한 관계였다.

어쨌거나 다시 찾은 전곡에서 나는 우연히 길거리 현수막에 '전곡초등학교 제1회 동창 모임'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늘봄회관' 이라는 곳을 호기심에 들러 본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둘은 동창회가 열리는 식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따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여섯 살에 소년원을 다녀온 이야기, 아는 여자가 경쟁 조직원에게 윤간을 당한 뒤 자살한 이야기, 지금은 사람을 찾아 칼침을 놓거나 겁을 주는 일이 호구지책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도 소설이 되는지 물었다.

그와 헤어진 뒤 '나'는 다시 동창회가 열리고 있는 식당으로 돌아온다. 식당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사내가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고, 곧이어 경찰차가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날 '나'는 억병으로 취했고, 다음 날 깨어나 보니 노트북 화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어떤 것들에 감동받지? 나는 무슨 노래들을 부르지? 나는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지?'

<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

어느 거리를 지나다 문득 스무 살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여자는 '나' 혼자였다. 우리는 석철의 둘째 형이 신혼집으로 장만해 두었다가 갑자기 해외 발령이 나서 빈집이 된 곳에 모여 놀았다.

체육전문대 유도부 1학년생인 석철이 운동을 하고 있고, 광호는 안방에서 쾌활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시인 지망생인 진수가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다. 그런 모습들이 떠오른다.

술을 마시다가, 설겆이 내기 탁구를 치다가, 치기가 엿보이는 자작시를 낭독하다가, 그러다가 막연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광호는 무장 탈영병 수색 작전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석철은 유도장을 차렸다가 건물주와 시비가 붙어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런 소식을 전하는 진수의 쓸쓸한 전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스무 살 시절의 환했던 시절을 떠올렸고, 내 나이가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 무서운 밤 >

새벽 세시, 어두운 밤길을 '나'와 친구가 걷고 있다. 친구는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아'라고 말했다.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시시한 행동들을 했다. 삼사관학교 면접 때 너무 떨어서 떨어진 이야기, 투명 모자를 파는 직업을 갖게 된 이야기, 모델 하우스 경비가 된 이야기, 7년 사귄 여자가 사랑하냐고 묻자 '모르겠어'라고 답했다가 차인 이야기.

그러다 다방에 들어갔다. 한 여자가 몹시도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잠시 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창밖으로 저를 봐주세요. 제가 완전히 안 보일 때까지 쭉 봐주세요'. 여자는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다방에서 나갔고, 잠시 뒤 질주하는 트럭으로 몸을 날렸다. 트럭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고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무서워! 하고 그때 친구가 말했다.

< 서울, 1994년 여름 >

그날, '나'는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들과 술을 마신 뒤 24시간 편의점 앞에서 박이라는 사내를 만났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으므로 '나'는 비디오 가게를 경영하는 이야기, 슬픈 영화를 보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감정 수습이 안 되어 곤란한 이야기, 들어온 손님의 외모에 따라 눈에 띈 바퀴벌레의 생사 여탈권을 행사하려 했다는 따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그러다 '나'는 비디오 가게를 늦게까지 지키고 있을 아내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전화는 매우 혼잡했다. 한 아가씨가 선뜻 자신의 휴대전화를 물건 고르는 동안 사용하라고 빌려준다. 그리고 박에게도 전화할 곳이 있으면 사용하라고 권한다. 박은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식으로 누군가와 통화했다. 나는 통화 상대방이 동업자가 아니냐는 추리를 박에게 들려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전화의 주인 여자가 빌려준 사실을 깜빡 있고 자리를 떴다가 찾으러 오겠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여자는 나타났고, 셋은 술을 마시게 된다. 여자는 아메리카 유학생으로 속칭 '오렌지'였다. 취중에 셋은 노래방을 간다. 노래방에서 '나'는 남행열차를 불렀고, 호남선이든 영남선이든, 지금 빗물이 흐르는 차창가에 앉아 있는 거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얼마 후 셋은 노래방을 나왔다. 휴대전화는 어디선가 잃어 버렸다. 여관 네온 간판도 꺼져가는 시각이었다.

< 포장마차 >

새벽 두시에, 낯선 뒷거리의 쓸쓸한 어둠 속에서, 빠듯한 택시비를 셈하며 망설이다가 '나'는 포장마차로 들어선다. 주인은 건장한 체격의 수굿한 청년이었고, '나'는 왠지 그 청년과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며 술잔을 기울였다.

잠깐 요의를 느껴서 처리를 해야할 때 '나'는 주인이 도망갔다고 생각할까봐 염려했으나 그는 역시 '수굿한' 청년답게 무심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더욱 더 청년에게 호감이 간다.

몹시 추운 그 날, '나'는 네시 가까운 시각에 포장마차를 나섰다. 심야 버스가 끊겼을 거라는 생각에 암담했다. 그래도 심야 버스 정류장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어 포장마차 쪽으로 되돌아가다가, '나'는 듣는다.

수굿한 청년이 마중 나온 어린 동거녀에게 진상 손님, 즉 어떤 씨발놈이, 술 한 병 시켜 놓고 계속 죽쳐서 재수 옴 붙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이 뒤돌아서자 들킬까봐 황급히 골목길에 세워 둔 석유통 뒤로 숨는다. '나는 석유통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 돌아눕는 자리 >

병호는 열셋 되던 해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매일 같이 술에 취해 지냈다. 어머니는 물장수 사내를 비롯해 여러 남자와 붙어 먹었다.

갑수 소개로 도자기 전시장 짓는 일을 얻는다. 읍내로 나가 커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딱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시간 정도 커피를 마시면서 앉아 있다 오는 것이 다였다.

어느 날, 도자기 공장 여자와 읍내에 같이가게 되었다. 여자는 평소에 말이 없었지만 읍내에 함께 가게 되어선지 병호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 읍내에 나간 여자가 돌아오지 않았다. 놈씨가 주말마다 내려와 놈 풀고 용돈까지 얻어쓰다가 차버린 모양이었다.

공사 책임자와 싸우고 병호는 일터를 떠난다. 버스정류장에서 여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뒤따른다. 여자는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여관 간판이 달린 건물 화단에 걸터앉아 손가방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때 문득 어머니는 자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자의 굽은 등이 잠깐 가볍게 출렁거렸고 곧이어 좀 더 어깨가 내려갔다. 골목은 무거운 정적이었다.

< 그해 여름 이야기 >

아버지가 이웃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온 그해 '나'는 처음 자위를 했고, '새나라 전기'에 취업했다. 공고 전기과 졸업반이었다. 인문계, 아니 상고 보다도 못한 처지였지만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들은 학생이라며 공고생들을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남자 공원들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나'는 공장에서 정화라는, 얌전한 아가씨에게 마음을 두게 된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 주면서 홀로 이런저런 상상을 키워갔다.

사측과 근로조건으로 대립하다 단체 행동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화는 생산과 공원들을 도와주기로 한 학생들에 대해 좋게 이야기했고, '나'는 쑥스러워 한다. 하지만 과장의 분열 책동에 말려든 학생들은 결정적인 순간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음 날 정화는 나를 차갑게 대했고, 나는 그녀의 집 부근까지 뒤따라 갔다가 우연히 남자 공원과 정화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정화는 그 공원과 사귀는 사이였고, 공원은 우리를 '그 배신자 새끼들, 교복 입고 깝죽대는 놈'이라고 멸시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때쯤 고양이는 사라져 버렸다. 그해 여름, 고양이를 키우던 일과 자위행위를 배운 일 말고 내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아껴서 읽는 작가들이 있다. 이문구, 그리고 임영태.

읽기 전까지 몹시 망설이고, 읽고 나면 책 표지와 책 등을 쓰다듬어 본 뒤 책꽂이에 꽂아놓고 미소 짓는다. 아직 몇 권 더 남았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62863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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