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밤
임영태 지음 / 문이당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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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평에서 >

그해 가을, '나'는 을평으로 사흘간의 출장 여행을 갔다. 그곳은 출장 때마다 만나는 지방 소도시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출장지에서 할 일이란 의원급 병원들에 판매한 건강보험 청구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나'는 당시 잘나가는 개발부를 마다하고 교육부에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열정을 허랑하게 여기고, 부질없음의 인식이 주는 어떤 초극의 심사, 그 무중력의 평화를 맛보고 있었다.

'내'가 교육할 사람은 50대 원장에 비해 10여 년은 아래로 보이는 원장 부인이었다. 그녀는 애교스러웠고, 교육 내내 방실방실 웃었으며, 은근히 '나'에게 추파를 던졌다.

교육 마지막 날 원장 부인이 제안한 식사 자리에 사무장이 찾아왔다. 그는 원장 부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난, 당신 없으면 못 살아요. 차라리 날 죽여요.'라고 말했다. 다음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부인이 사무장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부드럽게 만져 주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붙안고 있을 것만 같았다.

< 이슬비 내리는 봄날 밤 >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컴퓨터에 메달려 마케팅 자료를 뒤적이던 승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대학 선배 황이었다. 황은 아는 후배 하나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같이 마셔주면 안 되겠냐는, 다소 뜬금없는 부탁을 해왔다. 뭐에 홀렸는지 승호는 부탁대로 남자를 만나 술을 마시기로 한다. 남자를 만난 승호는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자가 엉뚱한 말을 꺼낸다. "내가 지금 사람을 죽이고 오는 길이라면 믿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아는 어떤 선배, 매우 섬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매번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내기 어려워하는 그를 남자는 죽였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선배라는 사람 집에 같이 가보겠냐고 했다. 승호는 남자의 말이 진실일리 없다고 생각했고, 호기심이 일었으므로 따라가보기로 한다.

선배가 살았던 곳이라는 곳에 도착한 뒤에도 남자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승호는 남자에게 이해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친구가 생긴 것도 같은 기분을 느끼며 승호는 남자와 헤어진다. 그리고 문득, 남자가 죽였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뒤돌아 미친듯이 뛰어가 지하방으로 갔을 때 남자는 이미 방범창 창틀에 길게 매달려 있었다.

승호의 귓가에 '이해하겠어요? 이해하겠어요?' 라고 묻던 남자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 전곡에서 술을 마셨다 >

'나'는 소설책을 네 권 펴낸 중견 작가다. 이 정도면 뭔가 도사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 과거 '내'가 생각하던 작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난해 말 전곡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글에 세 번 등장했다. 그렇다고 애틋한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고 관계의 끈이 이어졌던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닐 당시 '나'는 모범생이었고, 그는 그림자 같은 처지의 외톨박이었다. 그는 육체가 다부졌던 편이었고, 싸움을 잘했다.

'나'는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갔다. 전곡의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왔고, 외로웠던 나는 감상적인 마음이 되어 정성껏 답장을 했다. 편지들 사이에 그의 것도 있었다. '나'와 그는 학교 다닐 때보다 한층 애틋한 심사를 서로 나누며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러면서도 고향에서 서로 마주치는 것은 극구 피했다. '나'와 그는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 친밀한 관계였다.

어쨌거나 다시 찾은 전곡에서 나는 우연히 길거리 현수막에 '전곡초등학교 제1회 동창 모임'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늘봄회관' 이라는 곳을 호기심에 들러 본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둘은 동창회가 열리는 식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따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여섯 살에 소년원을 다녀온 이야기, 아는 여자가 경쟁 조직원에게 윤간을 당한 뒤 자살한 이야기, 지금은 사람을 찾아 칼침을 놓거나 겁을 주는 일이 호구지책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도 소설이 되는지 물었다.

그와 헤어진 뒤 '나'는 다시 동창회가 열리고 있는 식당으로 돌아온다. 식당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사내가 옆구리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고, 곧이어 경찰차가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날 '나'는 억병으로 취했고, 다음 날 깨어나 보니 노트북 화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어떤 것들에 감동받지? 나는 무슨 노래들을 부르지? 나는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지?'

<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

어느 거리를 지나다 문득 스무 살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여자는 '나' 혼자였다. 우리는 석철의 둘째 형이 신혼집으로 장만해 두었다가 갑자기 해외 발령이 나서 빈집이 된 곳에 모여 놀았다.

체육전문대 유도부 1학년생인 석철이 운동을 하고 있고, 광호는 안방에서 쾌활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시인 지망생인 진수가 릴케의 시집을 읽고 있다. 그런 모습들이 떠오른다.

술을 마시다가, 설겆이 내기 탁구를 치다가, 치기가 엿보이는 자작시를 낭독하다가, 그러다가 막연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광호는 무장 탈영병 수색 작전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석철은 유도장을 차렸다가 건물주와 시비가 붙어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런 소식을 전하는 진수의 쓸쓸한 전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스무 살 시절의 환했던 시절을 떠올렸고, 내 나이가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 무서운 밤 >

새벽 세시, 어두운 밤길을 '나'와 친구가 걷고 있다. 친구는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아'라고 말했다. 시시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시시한 행동들을 했다. 삼사관학교 면접 때 너무 떨어서 떨어진 이야기, 투명 모자를 파는 직업을 갖게 된 이야기, 모델 하우스 경비가 된 이야기, 7년 사귄 여자가 사랑하냐고 묻자 '모르겠어'라고 답했다가 차인 이야기.

그러다 다방에 들어갔다. 한 여자가 몹시도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잠시 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창밖으로 저를 봐주세요. 제가 완전히 안 보일 때까지 쭉 봐주세요'. 여자는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다방에서 나갔고, 잠시 뒤 질주하는 트럭으로 몸을 날렸다. 트럭은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고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무서워! 하고 그때 친구가 말했다.

< 서울, 1994년 여름 >

그날, '나'는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들과 술을 마신 뒤 24시간 편의점 앞에서 박이라는 사내를 만났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으므로 '나'는 비디오 가게를 경영하는 이야기, 슬픈 영화를 보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감정 수습이 안 되어 곤란한 이야기, 들어온 손님의 외모에 따라 눈에 띈 바퀴벌레의 생사 여탈권을 행사하려 했다는 따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그러다 '나'는 비디오 가게를 늦게까지 지키고 있을 아내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전화는 매우 혼잡했다. 한 아가씨가 선뜻 자신의 휴대전화를 물건 고르는 동안 사용하라고 빌려준다. 그리고 박에게도 전화할 곳이 있으면 사용하라고 권한다. 박은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식으로 누군가와 통화했다. 나는 통화 상대방이 동업자가 아니냐는 추리를 박에게 들려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전화의 주인 여자가 빌려준 사실을 깜빡 있고 자리를 떴다가 찾으러 오겠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여자는 나타났고, 셋은 술을 마시게 된다. 여자는 아메리카 유학생으로 속칭 '오렌지'였다. 취중에 셋은 노래방을 간다. 노래방에서 '나'는 남행열차를 불렀고, 호남선이든 영남선이든, 지금 빗물이 흐르는 차창가에 앉아 있는 거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얼마 후 셋은 노래방을 나왔다. 휴대전화는 어디선가 잃어 버렸다. 여관 네온 간판도 꺼져가는 시각이었다.

< 포장마차 >

새벽 두시에, 낯선 뒷거리의 쓸쓸한 어둠 속에서, 빠듯한 택시비를 셈하며 망설이다가 '나'는 포장마차로 들어선다. 주인은 건장한 체격의 수굿한 청년이었고, '나'는 왠지 그 청년과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며 술잔을 기울였다.

잠깐 요의를 느껴서 처리를 해야할 때 '나'는 주인이 도망갔다고 생각할까봐 염려했으나 그는 역시 '수굿한' 청년답게 무심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더욱 더 청년에게 호감이 간다.

몹시 추운 그 날, '나'는 네시 가까운 시각에 포장마차를 나섰다. 심야 버스가 끊겼을 거라는 생각에 암담했다. 그래도 심야 버스 정류장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어 포장마차 쪽으로 되돌아가다가, '나'는 듣는다.

수굿한 청년이 마중 나온 어린 동거녀에게 진상 손님, 즉 어떤 씨발놈이, 술 한 병 시켜 놓고 계속 죽쳐서 재수 옴 붙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이 뒤돌아서자 들킬까봐 황급히 골목길에 세워 둔 석유통 뒤로 숨는다. '나는 석유통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 돌아눕는 자리 >

병호는 열셋 되던 해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매일 같이 술에 취해 지냈다. 어머니는 물장수 사내를 비롯해 여러 남자와 붙어 먹었다.

갑수 소개로 도자기 전시장 짓는 일을 얻는다. 읍내로 나가 커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딱히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시간 정도 커피를 마시면서 앉아 있다 오는 것이 다였다.

어느 날, 도자기 공장 여자와 읍내에 같이가게 되었다. 여자는 평소에 말이 없었지만 읍내에 함께 가게 되어선지 병호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 읍내에 나간 여자가 돌아오지 않았다. 놈씨가 주말마다 내려와 놈 풀고 용돈까지 얻어쓰다가 차버린 모양이었다.

공사 책임자와 싸우고 병호는 일터를 떠난다. 버스정류장에서 여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뒤따른다. 여자는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여관 간판이 달린 건물 화단에 걸터앉아 손가방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때 문득 어머니는 자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자의 굽은 등이 잠깐 가볍게 출렁거렸고 곧이어 좀 더 어깨가 내려갔다. 골목은 무거운 정적이었다.

< 그해 여름 이야기 >

아버지가 이웃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온 그해 '나'는 처음 자위를 했고, '새나라 전기'에 취업했다. 공고 전기과 졸업반이었다. 인문계, 아니 상고 보다도 못한 처지였지만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들은 학생이라며 공고생들을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남자 공원들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나'는 공장에서 정화라는, 얌전한 아가씨에게 마음을 두게 된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 주면서 홀로 이런저런 상상을 키워갔다.

사측과 근로조건으로 대립하다 단체 행동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화는 생산과 공원들을 도와주기로 한 학생들에 대해 좋게 이야기했고, '나'는 쑥스러워 한다. 하지만 과장의 분열 책동에 말려든 학생들은 결정적인 순간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음 날 정화는 나를 차갑게 대했고, 나는 그녀의 집 부근까지 뒤따라 갔다가 우연히 남자 공원과 정화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정화는 그 공원과 사귀는 사이였고, 공원은 우리를 '그 배신자 새끼들, 교복 입고 깝죽대는 놈'이라고 멸시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때쯤 고양이는 사라져 버렸다. 그해 여름, 고양이를 키우던 일과 자위행위를 배운 일 말고 내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아껴서 읽는 작가들이 있다. 이문구, 그리고 임영태.

읽기 전까지 몹시 망설이고, 읽고 나면 책 표지와 책 등을 쓰다듬어 본 뒤 책꽂이에 꽂아놓고 미소 짓는다. 아직 몇 권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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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죽이기 죽이기 시리즈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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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빌이 앨리스에게 뜬금 없이 암호를 정하자고 제안한다. 암호를 왜 정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빌은 당연하다는 듯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나는 이미 적이 아니'라는 앨리스의 항변에도, 도마뱀 빌이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계속하자 앨리스는 포기하고 암호를 정해자고 한다. 도마뱀 빌이 "스나크는" 이라고 말하자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부점이었다"고 말한다. (루이스 캐럴의 시 스나크 사냥의 맨 마지막 행인 For the Snark was a Boojum, you see)

도마뱀 빌은 깜짝 놀란다.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다. 앨리스의 주머니 속에서 잠을 자던 겨울잠쥐를 잠깐 의심해 봤지만 역시 둘은 이 암호에 대해 오늘 처음 말하는 것이었다.

혼란에 빠진 둘에게 왕과 시종, 말들이 허둥대며 지나갔다. 험프티 덤프티가 담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미치광이 모자장수와 3월 토끼가 험프티 덤프티는 살해 당했고, 이것은 살인사건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잠에서 깨어난 구리스가와 아리는 자신이 최근들어 똑같은 세계에 관한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꿈에 관한 상념에 빠져 있던 아리는 문득 학교에 늦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햄스터에게 먹이를 준 뒤 대학 연구실로 향한다.

연구실은 묘하게 어수선했다. 누군가 나카노시마 연구실의 오지 씨가 옥상 가장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동글동글한 체형 때문에 달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사람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리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실험실 사용 때문에 이모리와 얘기하다 이모리가 "스나크는" 이라고 말하고, 아리가 "부점이었다" 라고 말하면서 세계가 확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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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야스미는 1962년 교토 출생으로 오사카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 1995년 <완구수리자>로 제 2회 호러소설대상 단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으며, 2012년 <천국과 지옥>으로 세이운상(星雲賞)을 수상했고, 2013년 메르헨 죽이기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본작 <앨리스 죽이기>를 발표했다. 시리즈는 클라라, 도로시, 팅커벨로 이어지는데 안타깝게도 작가가 2020년 11월 23일 암으로 사망하여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앨리스 죽이기>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스나크 사냥>을 기본 텍스트로 비틀기, 간섭하기, 교차편집하기 등을 통해 호러 미스터리물로 다시 태어난 작품이다. 루이스 캐럴 텍스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중심으로 훨씬 흥미로운 독서가 될 수 있다.

소설에서 앨리스는 험프티 덤프티 살해범으로 몰린다. 이유는 흰토끼가 정원에서 앨리스를 봤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상한 나라'와 '지구'가 꿈으로 연결되어 있어 꿈에서 죽으면 지구에서도 죽는다는 점이다. 꿈 속에서 누명을 벗지 못하면, 여왕의 '목을 쳐라' 명령에 희생될 것이 분명하다. 앨리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7일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사건은 계속된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그리핀이 굴을 먹다 목이 막혀 죽고, 지구에서는 시노자키 교수가 상한 굴을 먹고 식중독으로 죽는다. 다음으로 흰토끼가 부점에 의해(스나크의 일종으로 부점을 보면 사라진다) 사라지고, 지구에서는 아리의 1년 선배 다나카 리오가 괴한의 칼에 찔려 사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상한 나라에서 빌이 밴더스내치(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괴물)에게 하반신이 뜯어먹혀 사망하고, 지구에서는 이모리가 만취한 상태에서 들개에게 안면을 뜯어먹혀 사망한다.

아리는 빌이 사망 직전 남긴 다잉 메시지 "공작 부인이 범인일 리가 없다"에서 추론하여 히로야마 부교수가 사실은 공작부인이 아니라 메리 앤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 흰토끼가 앨리스를 범인으로 착각한 것은 시력이 좋지 않아 메리 앤과 앨리스를 착각한 것.

앨리스는 메리 앤에 의해 꿈 속에서 살해 당하지만 사실 앨리스 역시 지구의 아리가 아니었다. 꿈속의 앨리스와 대응되는 것은 지구의 햄스터였고, 꿈속의 겨울잠쥐가 사실은 지구의 아리였던 것.

소소한 반전에 이어 더 큰 반전이 이어지는데,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이 본체이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죄다 붉은왕이 꾸는 꿈 속의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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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주다
와타야 리사 지음, 양윤옥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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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의 아버지 토마와 어머니 미키코는 프랑스 유학 중 만나 사랑에 빠졌다. 어린 나이의 사랑이 그렇 듯,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의 사랑이 식었다. 토마는 이별을 통보했지만, 미키코가 메달렸다. 얼마 후 미키코가 유우를 임신하게 되자 토마는 어쩔 수 없이 미키코와 결혼한다.

유우는 프랑스 혼혈인 아버지 피를 물려 받아 귀엽고 깜찍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의류 통신판매 카탈로그 모델을 하게 된 유우는 어린 나이에 '스타치즈'의 평생 모델로 발탁 되며 연애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녀의 성장에 맞추어 스타치즈 CM을 매해 두 편 찍는다는 기획은 잔잔한 성공을 거두었고, 점차 성장하는 유우의 평범하면서도 반짝거리는 삶이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다. 유우의 성장하는 건강한 모습이 국민 여동생으로서의 이미지에 들어 맞았던 것이다.

대규모 소속사가 유우를 픽업하고 유우는 한층 빛나는 길을 걷게 된다. 배우와 가수, 와이드쇼의 게스트를 넘나 들며 착실히 인기를 쌓아가는 유우의 앞날은 평탄해 보였다.

고3이 되자 기획사는 유우가 보통 학생들처럼 입시에 도전해 대학에 합격한다는 스토리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뒤늦게 공부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사람에게 꿈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깨가 뻣뻣해지던 어느 날, 유우는 우연히 TV에서 본 마사아키라는 스무살 짜리 댄서에게 반하게 된다. 그에게 빠져들어 사귀게 되고, 호텔을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분위기에 휩쓸려 성행위를 동영상으로 남기게 되고, 결국 영상이 유출되어 유우는 연예계에서 퇴출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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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어쩌면 와타야 리사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와타야 리사는 17세 되던 해 <인스톨>로 제38회 문예상을 최연소 수상했고, 이후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권위의 아쿠타가와상 최연소 수상자가 된다.

유우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이름없이 잊혀질 것을 두려워한 것처럼, 작가 역시 문학이라는 세계에서 너무 화려하게 데뷔했기에 자신의 미래에 불안감을 느꼈을 법 하다.

'꿈을 준다'는 것의 꿈은 언제까지고 '타인의 꿈'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주는 쪽에서는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379p)

유우가 연예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내뱉은 말이지만, 최연소 문학상 수상자 타이틀에 짓눌린 와타야 리사 자신의 한탄으로도 읽힌다.

내면에 차고 넘치는 것들을 써내며 해방감을 맛 보고, 그 괄과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는 오직 기쁨만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본말이 전도 되어 두 번의 최연소 수상 타이틀이 어깨를 짓누르고, 다음에 써낼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독자, 출판사, 평단의 관심이 집중되자 이전처럼 자유분방한 이야기를 써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이후 3년 만에 내 놓은 <꿈을 주다>는 그래서, 와타야 리사 스타일의 재기발랄함과 깜찍함이 덜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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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귀도 살인사건
전건우 지음 / 북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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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귀도는 조선시대 귀양지로 이렇다 할 물산이 나지 않는 척박한 섬이었다. 이 섬에 선비 하나가 역모죄로 귀양을 왔다. 선비는 뜻밖에도 섬에 애정을 갖고 생활했다. 그는 섬의 부를 늘리고 백성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산에서 물길을 끌어오는 한편, 염전을 일구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비에게 감읍하며 고마와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의금부 도사가 들이닥쳤다. 도사는 선비가 또 다시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도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선비를 처형하여 역모와 관계 없음을 증명하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주저했지만 박가라는 자가 나섰다. 선비는 박가의 도끼질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리고 "불귀도에 발을 들여놓은 자 피를 토하고 죽으리라!"는 저주를 남긴다.

그 불귀도에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 외지인들이 방문한다. 동생 유현이 섬노예로 끌려갔을 거라 짐작하여 찾으러 나선 유선, 섬 생활을 취재한다고 했지만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 보이는 PD 정우와 리포터 현정, 낚시꾼이라고 자처하는 사내 셋, 그리고 열혈순경 동주와 세상에 닳고 닳은 그의 상관 만철.

태풍이 거세져 섬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직후부터 시체가 발견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발견된 여성의 시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어쩐지 쉬쉬하는 태도를 보인다. 순경인 동주는 사건을 정식으로 처리하려 하지만 이장을 위시한 마을 사람들과 상급자 만철은 사건을 덮으려 한다.

하지만 이후 마을 원로 두만의 석연치 않은 자살, 제초제 메소밀에 의한 대량 살해 시도와 일부 주민의 사망, 동네 건달 강두의 죽음 등 사건이 잇따르자 마을 사람들은 그 옛날 불귀도에서 한을 품고 죽어간 선비가 산발귀가 되어 모든 마을 주민을 몰살하려는 것이라며 패닉에 빠진다.

고립된 섬에서 여전히 계급사회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섬 사람들의 비밀은 무엇일까? 사람이 죽어갈 때마다 옛날 그 양반의 죽음과 산발귀를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25년 전 마을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권가 가족의 이야기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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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건우는 2008년 <선잠>으로 데뷔한 후 공포, 미스터리 장르 소설을 쉴 새 없이 생산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익숙하지만 너무 재미있어 끝까지 읽게 되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집중" 하고 있다고 밝히는데, 장르 소설가로서 자림매김이 확고하다.

<불귀도 살인사건> 역시 요코미조 세이시의 아류작이라 해도 할 말 없을 정도의 익숙한 컨셉과 전개를 보여준다.

범인은 25년 전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던 전가의 아들로 현재는 PD가 된 정우이다. 마을 사람들이 대마초를 재배하는 것에 반대하다 부모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데 대한 복수극인데, 소소한 반전이라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유선의 동생을 사주하여 물에 메소밀을 타게 했다는 점 정도다.

오디오북으로 장거리 운전할 때 시간 떼우기에 괜찮을 법한 작품이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62126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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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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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마쓰 에이스케는 문학평론가로 1969년생이다. 게이오대학 불문학과를 졸했고, <오키 야스오와 그 시대, 구도의 문학>으로 제14회 미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는 2015년 1월 8일부터 6월 25일까지 매주 목요일 니혼게이자신문 석간에 25회에 걸쳐 게재된 글들이다.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과 소회, 시와 소설로 부터 건져낸 슬픔에 관한 상념 등을 따뜻한 필치로 써내려간 이 에세이는 <무소유>, 이승우의 <생의 이면> 등을 일본에 소개한 김순희가 번역했다.

우리가 말을 하려는 것은 전하고 싶은 뭔가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온몸에 충만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말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9p)

인생에는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그러므로 슬퍼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12p)

인생의 기로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강렬했다 하더라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나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19p)

무언가에 대해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마음속에 무지의 방을 만들어야 한다.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탐구를 계속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29p)

진정으로 타인과 공감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혼자라고 느꼈을 때 비로소 타인이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38p)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답변에 안주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진정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47p)

태연한 듯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헤아릴 수 없는 비통함이 숨겨져 있다..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오히려 눈물을 흘리면서 울지 않을지도 모른다...슬픔을 겪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58p)

인생의 의미는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소박한 말이지만 우리는 매번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머리로만 생각하기에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65p)

읽는다는 것은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글로된 말은 언제나 읽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생명을 부여받기 때문이다...읽는다는 것은 말을 탄생시키는 일이다.(94p)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헤어지는 내 영혼보다

나 없이 침상에서 잠들어야 할 그대가 더 슬프다(106p, 고금와카집 中)

* 병이 든 아내가 남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죽는 자신보다, 남겨질 남편의 슬픔을 걱정한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게 아니다. 반대로 글을 쓰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발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글자로 옮기는 행위라기보다 쓰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인생의 참뜻'을 인식하게 되는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165p)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620095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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