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김사과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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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와 수정은 P시에 살고 있다. 이들의 여유로운 중산층 부모는 자녀가 체제에 안정적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고액의 사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나름 융통성도 발휘하고 있어 미나와 수정은 담배를 피우고 노래방에서 맘에 드는 남자애들과 술을 마시는 정도의 여가는 즐기고 있다. '시발'을 문장에 섞어 쓰는 빈도도 또래 아이들에 비해 과하거나 덜하지 않은, 말하자면 '부잣집 아이' 라고 통칭해도 큰 문제가 없는 정도이다.


그런 이들의 단조로운 생활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이 생겼다. 미나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절친 박지예가 투신자살한 것이다. 

미나는 박지예와 최근 연락이 뜸했지만 친했던 친구의 자살이 일종의 파문을 던졌던 것인지 시험에 불성실하게 응하고 며칠간 학교를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선글라스를 끼고 어머니와 나타난 미나는 자퇴서를 내고 대안학교로 전학을 가버린다. 


미나의 이런 행동 변화에 당황한 것은 수정이었다. 수정은 한동안 수학문제를 전투적으로 푸는 등, 자신이 얼마나 체제에 적합한 인간인지 확인함으로써 위기를 넘기려 했지만 처리되지 못한 울분은 중첩되어 쌓여갔다. 도대체 미나가 박지예라는 루저의 죽음에 그토록 공감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나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다. 미나는 무려 칼 융의 책을 읽었다. 그래서 수정은 미나 대신, 말을 듣지 않는 고양이를 시간을 들여 괴롭히다 벽에 죽을 때 까지 반복해서 내던져 죽여버린다.


수정은 미나의 오빠 민호에게 미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뒤 민호의 무관심을 등에 없고 미나를 찾아가 살해한다. 미나는 수정에게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는지 묻지만 수정은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애초에 그걸 알았다면 미나를 죽였겠는가 말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으니 죽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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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가 떠오르는 문체를 구사하지만 무게감은 없다. 철학의 부재를 의도적 유치함으로 치장하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실존주의의 조잡한 변용이 이 작품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전부이다. 

세계에 대한 애정 없음이 내뿜는 자기파괴적 독기가 고양이를 난도질 하고 미나를 살해한다. 


언젠가 부터 소설이 쉽게 쉽게 쓰여지고, 평론가들이 뱀 지나간 자리를 설명한다.

그래서 강유정은 이 작품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神의 탄생기' 라면서도(세상에!), '자신이 상식적인 인간'이고, 앗제나 지젝이나 융과 같은 유럽의 이름을 당대 지식인의 필수교양이라고 여긴다면(한마디로 걔네들에 대해서 잘 안다면) 당장 이 책을 무시하라고 책 말미에 적어놓았다. 공모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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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섬 미도리의 책장 2
곤도 후미에 지음, 권영주 옮김 / 시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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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사이의 복제품 판화가 걸려 있는 찻집 <호쿠사이야>를 운영하는 아야메는 함께 일하는 나쓰코, 나쓰코의 애인 무코, 그리고 '토끼 군' 이라 불리는 다나카 등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세토 내해의 S섬에 놀러가기로 한다.

추가로 참가하게 된 사람은 총 4명으로 '토끼 군'의 애인 시즈카와, 역시 '토끼 군'의 절친 모리타, 그리고 시인 야지마 도리코와 그의 아내 나나코였다.

여기서 야지마 도리코는 주인공 아야메와 불륜 관계였고, 모리타 역시 시즈카를 맴돌고 있어서 묘한 두 개의 삼각형이 존재했다.


S섬의 별장에 도착한 일행은 짐을 풀고, 여행에서 으레 먹기 마련인 카레를 만들어 먹는다. 다소 들뜬 분위기와 함께 감도는 음침한 기운은 그 섬이 과거 신흥종교 <오안네스의 아들> 성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종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종교적 극치로 보았기 때문에 자살 소동을 일으켜 물의를 빚었던 종교였다.


그날 밤, 아야메는 불륜남 야지마와의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뒤숭숭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토끼 군'과 묘한 분위기가 되어 새벽까지 함께 있게 된다. 새벽 즈음 나나코의 방에 어떤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둘은 목격하게 되지만, 그때는 별 생각 없이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나코가 칼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다. 방 안은 밀실이었고, 그녀의 심장은 사라진 상태였다. 일행은 충격에 빠지고, 곧이어 밀실살인이 연쇄살인으로 진화한다.

차례로 무쿠 군이 살해된 뒤 불에 타고, 토끼 군이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급기야 아야메 역시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해 머리를 크게 다치고, 마지막으로 도리코는 자살한다.


일행은 범인을 아야메로 지목하고, 아야메 역시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시인한다. 다만 그녀가 정신이상 상태에서 모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인정되어 감옥행만은 면한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갇힌 그녀에게 모리타가 찾아오면서 사건의 진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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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곤도 후미에의 데뷔작이자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이다. 미스터리 평론가 다카키 히로시는 이 작품을 렌조 미키히코의 <회귀천 정사>와 비교하며 평을 하는데, 사실 작품의 품격이나 완성도에서 <회귀천 정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얼어붙은 섬>에서 판화가 호쿠사이나 가부키 아케가라스의 인용, 그리고 <오안네스의 아들>이라는 신흥 종교 등은 모두 분위기를 조성하는 소품으로 쓰일 뿐이다.

반면 <회귀천 정사>는 인용된 작품이 스토리에 정밀하게 녹아들어 감동을 배가시키는 장치로 작동하고, 마침내 이야기의 변용이 새로운 원작으로 재탄생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얼어붙은 섬>의 낯선 섬과 안개, 그리고 보트 열쇠의 분실로 완벽한 폐쇄공간이라는 설정 만으로도 미스터리 팬들은 설랠 수 있겠으나, 다소 완성도가 떨어지는 결말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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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씨의 최후
스칼렛 토마스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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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에어리얼의 본래 직업은 기자였는데 우연히 솔 벌렘 교수와 만나 토머스 E.류머스라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류머스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고, 그가 쓴 작품 <Y씨의 최후> 역시 희귀본이어서 둘은 금새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에어리얼은 벌렘 교수의 연구실로 들어가 박사 과정을 밟게 되는데, 문제는 교수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학 연구동 하나가 무너져 어수선한 상황이 반복된다. 

기분 전환 겸 에어리얼은 집에 가는 길에 중고서점에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동안 애타게 찾던 <Y씨의 최후>를 손에 넣게 된다. 책은 저주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읽은 사람은 모두 죽거나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에어리얼은 책을 탐독하기 시작하는데, Y씨가 정체불명의 물약을 먹은 뒤 타인의 의식(트로포스피어)에 들어가는 내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물약의 조제법을 찾아내 트로포스피어에 들어가는데 성공한 에어리얼은 자신이 상대편의 기억을 공유함은 물론 생각의 일부를 조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한 사람(혹은 개체)의 트로포스피어에서 다른 사람의 트로포스피어로 이동도 할 수 있어 사실상 시공을 여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트로포스피어로 이동하는데 성공한 뒤로 정체 불명의 남성 두 명과 그들이 데리고 다니는 키드가 에어리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에어리얼은 이들을 피해 트로포스피어를 여행하면서 대폭발 이론과 창조론, 천체물리학과 신의 문제, 현상학과 후설, 데리다와 차연, 하이데거와 시간, 샤르트르와 실존, 보드리야르와 시뮬라르크 등 현대 철학과 과학에 관한 사유들을 펼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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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쿼크와 전가가 0과 1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만약 생각이 물질이라면 모든 것이 실재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데리다의 차연,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 만약 생각이 물질이라면 모든 것이 실재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방정식을 거꾸로 뒤집으면, 즉 물질이 실제로 생각이라면 그렇다면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게 된다. 이 두 가지 발상이 동시에 사실일 수 있을까? 이 부등식이 '에너지는 질량이다.'와 똑같은 방식으로 유효할 수 있을까?


민음사는 책 판매량을 의식해서인지 '저주받은 책', '매트릭스와 인셉션을 능가하는 지적 추리소설' 따위의 문구로 현혹하는데, 여기 현혹되서 책을 읽는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런 류의 소설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에어리얼이 끊임없이 진행하는 사고실험(실제로는 없는 장치나 조건을 머릿속에서 상정하여 진행하는 실험)을 약간의 관심과 검색을 통해 따라가다 보면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특히 양자역학과 불확정성의 원리, 뉴톤의 세계관에 반하는 상대적 세계관 등에 대한 기초 지식을 먼저 습득한 뒤 읽어보길 권한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62779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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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최인석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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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화자가 삼청교육대 피해자인 심우영 노인을 취재하면서 시작된다. 심우영 노인에게는 말 못하는 부인이 있었는데, 맑은 외모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심우영 노인은 자신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다면서, 어느 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려 그리 보인다 했다. 그들을 취재할 당시만 해도 궁금한 것은 삼청교육대였는데, 취재는 한 달을 넘기게 되었다.

이것은 심우영과 주영순, 그리고 '열고야' 라는 나라와 그곳에서 온 윤작은년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심우영의 아버지는 도둑이었는데 어느 날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축대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홀로 된 우영의 어머니는 술에 의존하다 우영을 고아원에 맡기고 도망쳤다.

고아원 원장은 국가에서 지원한 물품을 자기 잇속을 채우는 데 사용했고, 특히 의약품은 마누라가 운영하는 약국으로 빼돌려 재판매했다. 원장의 처남이 총무였는데, 수시로 아이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가했다.

참다 못한 우영은 여자친구 영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1년여 남긴 어느 날, 원장의 책상에 똥을 누고 해방촌으로 도망친다.

고아원 선배 병식이형이 일하는 방직공장에 찾아간 우영은 뜻밖에도 따뜻한 밥을 대접 받는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자가 갓 지은 쌀밥과 김치찌개를 내왔다. 바로 이 여자가 밥어미로 불리는 윤작은년이다.

 처음 얼마간 병식이형과 순금이누나의 방에서 신세를 지던 우영은 미군부대 나이트클럽 주티에 취직한다. 거기서 우영이 하는 일이란 미군들이 소변을 누는 사이 구두를 닦고 바지를 털어주는 따위의 일이었다. 그 댓가로 1달러 정도의 팁을 받았는데, 1년을 모으면 우리나라 돈으로 30만원 가량 되었다. 1~2년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우영은 병식이형의 만류와 치욕감에도 불구하고 미군 나이트클럽 일에 열중했다. 나아가 미군과 관계를 만들어 PX 물품을 빼다 파는 일에도 뛰어 들었다. 

얼마 뒤, 우영은 벌어들인 돈으로 가죽잠바를 사입고 영순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영순은 우영의 변화를 그다지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실망한 우영은 대마초와 오입질에 빠져들지만 영순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뭔가 사정이 달라지리라 생각했다.

영순의 졸업식 날, 우영은 한껏 빼입고 학교로 찾아간다. 하지만 영순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소문 해 보니 영순의 아비가 고아원에 찾아왔었다고 했다.

다시 물어물어 아비와 영순이 산다는 곳으로 가보니 주변 사람들은 영순아비가 돈을 떼먹고 도망가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그 즈음, 병식은 다니던 방직공장 사정이 어려워져 문을 닫자 집에서 술 마시는 일에 골몰한다. 툭하면 순금도 때렸다. 순금은 우영에게 추파를 던진다. 고아원에서 제일 예뻤던 순금. 우영은 그녀와 정을 통하고 만다.

순금은 우영과 정을 통한 후부터 우영을 졸라댔다. 미군부대 클럽에 일자리를 얻어 직접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우영은 내키지 않아 번번히 거절했지만 순금은 자력으로 클럽 주티에 일자리를 얻는다. 그 뒤 순금은 뭐에 홀린 듯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몸까지 파는 지경에 이른다. 자연 우영과의 관계도 수많은 관계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우영에겐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우영의 사업이 날로 번창해 창고 겸 집이 필요하게 되자 망해버린 방직공장이 생각난다. 가보니 거기에는 밥어미 작은년이가 여전히 살고 있었다. 작은년이는 언제든 들어와 살아도 좋다며 우영을 반긴다. 그녀는 밥을 정성껏 차려주었고, 집을 깨끗하게 건사했다. 우영이 간혹 감사의 뜻으로 돈을 건내면 작은년이는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그녀는 가진 것이 거의 없었고,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필요로 하면 조건 없이 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도.

우영은 그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열고야'라는 나라에서 왔는데, 그곳은 북쪽으로 오십년, 동쪽으로 칠십년, 다시 북쪽으로 백십년 걸어야 나온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거기는 피나 쇠붙이, 목숨과 쇠붙이가 부딪는 일이 없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도 않으며 천막촌이나 판잣집도 없다고 했다. 오줌싸는 동안 바지를 털어주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우영은 그녀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가는 방법은 어딘지 모르게 감동을 주는 면이 있었다.


다시 영순이 나타난 것은 나이트클럽 권상무와 함께였다. 영순은 사기꾼 아비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져 미군부대까지 흘러든 것이었다. 멜라니로 이름을 바꾼 영순은 스트립쇼에 나갔고 권상무의 잠자리 수발을 들었다. 눈이 뒤집혀 권상무에게 대든 우영은 흠씬 두들겨 맞은 후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다. 작은년이가 우영을 구해내 간호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우영은 고아원 후배 상주를 사주해 권상무를 살해하도록 한다. 혼혈인데다 고아원에 버려져 세상에 대한 악만 남은 상주는 기꺼이 우영의 부탁을 들어준다. 권상무가 죽자 나이트클럽은 조상무가 이어받고, 우영은 옛 거래선을 다시 회복한다.

그 사이 제브라 스타로 이름을 바꾼 영순은 미군과 동거하며 PX 물품을 떼다 팔아 제법 돈을 모은다. 그러나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순이 우영과 작은년이를 초대한 자리에서 사고가 일어난다. 영순의 아비가 돈을 빼앗아 가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넘어져 사망한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에게 작은년이가 여기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심지어 오지도 않았다고 선언한다. 작은년이는 치상죄로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작은년이가 감옥에 간 사이, 우영은 그녀가 파던 우물을 판다. 그녀는 우물을 파내려가 지구 반대편으로 가면, 세상이 열고야 처럼 바뀔거라고 했다. 그 말이 상징적인 말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모르지만 우물을 파다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가끔 영순이 찾아왔다. 하지만 둘은 예전처럼 몸을 섞을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사건들도 몇 가지 일어난다. 미국으로 간 히피 앤소니 커시의 어머니가 보낸 초청장이 도착한다. 우영은 막대한 가치의 그 초청장을 상주에게 준다. 하지만 상주는 미국 갈 팔자가 못 되었다. 순금이 초청장을 훔쳐다 팔았기 때문이다.

순금의 끝도 좋지 않았다. 미군과 화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대검에 찔려 죽은 것이다. 박정희는 한미행정협정에 따른 타협 끝에 수사권과 재판권을 포기한다. 범인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아무도 처벌 받지 않는다. 오직 순금의 남편, 병식이형이 분신자살했을 뿐이다.


윤작은년이 출소한다. 우영과 영순, 작은년이는 작은 밥집을 열어 소박하게 살기로 한다. 하지만 권상무의 부하 송준태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을 찾아온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상주의 팔다리를 절단냈다는 것이었다. 우영이 우물을 파고 있는 사이 찾아온 송준태는 작은년이를 고문하여 우영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했다. 작은년이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모진 폭행을 다 받아낸다. 이틀 뒤 그녀가 죽는다. 그 사건으로 우영은 백발이 되고, 영순은 목소리를 잃는다. 거대한 용 한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용이 작은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 우영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다. 출소한 우영은 영순과 함께 보육원 한켠에 보금자리를 꾸며 작은년이를 떠올리며 남은 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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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 열고야에서 온 작은년이의 임무는 '열심히 살아가는 것' 이다. 열심히 살아가다 목숨을 바쳐야 할 사정이 생기면, 목숨을 내놓는 것. 이것이 열고야에서 온 스파이들의 임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예수가 십자가에 메달리고, 전봉준이 함거에 실려가 목을 내놓은 것. 작은년이는 그들이 스파이였다고 말한다. 지금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훨씬 사람다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이곳에서 잠시 살다간 그 행위가 곧 간첩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수많은 아름다운 간첩들이 잠시 머물다 간 이곳 남한 땅에 토착왜구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이 최근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이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어쩌면 우리가 대어주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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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이들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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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정월 초하루 0시 3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 술집에서 소동이 일어나 조셉 리카도가 피살된다. 그는 1995년에 태어났고, 인간 존재 중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가 태어났던 1995년 이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기에, 1995년은 '오메가 해'로 명명되었다. 40년 내로 인류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예정이다.

 인류는 '보편적 권태(ennui universel)' 라는 병에 시달리는 중이다. 어린이 놀이터는 철거되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얼굴에 색칠을 한' 오메가들이 사람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종종 벌어지고, 국립보안경찰은 범죄자를 잡으면 곧바로 Man 섬으로 이동시켜 영구 격리시켰다. 

엄마노릇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좌절된 모성에 대한 갈망으로 어떤 사람들은 인형에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테오도어 페이런은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이자 철학박사로 올해 쉰 하나이다. 부주의로 아이를 치어 숨지게 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아내와 헤어져 혼자 산다.

그는 또 센 리파이어트와 사촌지간이기도 하다. 잉글랜드 총통이자 독재자인 바로 그 센 리파이어트 말이다. 테어도어 페이런은 한 때 센의 권유로 평의회 참관인 겸 자문역을 했지만, 지금은 그 일을 관두고 역사를 가르친다. 


어느 날, 왼손이 불구인 여성 줄리언이 테어도어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불구였기 때문에 마흔 다섯 미만 여성이라면 6개월에 한번씩 받아야 하는 굴욕적인 건강진단(난자를 생성할 수 있는지)을 면제 받았다. 그녀는 잉글랜드와 브리튼 곳곳에서 그릇된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일들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한때 평의회 성원이었던 테어도어가 센과 얘기하여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남편 롤프를 비롯한 다섯 명이 동아리를 이뤄 뜻을 함께 하고 있다고 했다. 테어도어는 줄리언에 대한 호감으로 그녀의 제안을 승낙하지만, 센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총통은 15년 전에 선출되었는데 그 뒤로는 선거가 치뤄지지 않았다. 그는 국립보안경찰 그레나디어를 자신의 주위에 배치하고 독재자가 되어 정액검사제도를 실시하고 지방의회 의장을 선출하지 못하게 했다. 부인과 검진을 강제로 실시했고, 무엇보다도 콰이터스 제도를 만들어 시행했다. Quietus는 생명활동의 유예 및 중지를 뜻했다. 콰이터스는 사실상 단체 학살임에도 불구하고 외형은 자발적인 자살의 양태를 띠었다. 


예상대로 센은 테어도어의 제안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건 '누가 테어도어에게 그러한 발언을 하도록 부추겼나' 였다. 


테어도어는 제안이 좌절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줄리언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룹 리더인 롤프, 조산원 출신의 미리엄, 사제 루크, 소년같은 외모의 가스코뉴를 만난다. 그들은 테어도어의 얘기를 전해듣고 실망한다. 

얼마 뒤 그들은 행동에 나선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는 일이었다. 총선을 실시할 것, 체류자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할 것, 콰이터스를 철폐할 것, 맨섬 유형제도를 폐지할 것, 강제적 신체검사를 당장 중단할 것 등을 내건 전단지는 시내 곳곳에 뿌려진다. 서명란엔 '다섯 마리 물고기'라고 씌여 있었다.

줄리언에게 호감을 품은 테어도어는 '당신만이라도 무모한 짓을 그만두라' 고 권유하지만 실패한 뒤 6개월간 유럽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온 테어도어에게 날아든 소식은 가스코뉴가 잡혀갔다는 것과 '다섯 마리 물고기'가 콰이터스 예정지의 부잔교를 폭파하는 등 과격한 행동에 돌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줄리앤을 만난 테어도어는 그녀가 임신중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를 낳을 때 까지 피신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4주간 머무를 수 있는 은신처가 필요했다. 

테어도어는 가스코뉴가 빠진 '다섯 마리 물고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롤프와 다툼을 반복하고, 롤프 역시 기존 권력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레나디어를 피해 도망치던 이들 앞에 '얼굴에 색칠을 한' 오메가들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루크가 희생된다. 줄리언은 서럽게 울면서 자신의 뱃 속에 있는 아이는 루크의 아이였다고 고백한다. 루크 역시 줄리언과 마찬가지로 건강진단을 면제받은 부류였다. 그는 간질 환자였다.

아이 아버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롤프가 사라진다. 그는 줄리언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일러바침으로써 조그만 권력이라도 얻게 되길 꿈꾸며 총통에게 갔을 터였다.


도주가 계속되고, 그 과정에서 미리엄이 사망한다. 마침내 그레나디어와 센이 테어도어와 줄리언 앞에 나타난다. 테어도어는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센을 사살한다.  

센이 죽고, 아이는 이미 태어났다. 테어도어는 센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자신의 손가락에 끼운다. 언젠가 때가 되면 뺄 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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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고딕풍으로 그려내는 추리소설의 대가 P.D.제임스가 말년인 1992년에 발표한 <The Children of Men> 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우리나라에는 1994년 동아일보사가 <콰이터스>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최근엔 아작 출판사에서 <사람의 아이들>이라는 원제로 다시 출간되었다. 


인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임이 되어 버린다는 가까운 미래 이야기인데, 곰곰 생각해 보면 허무함이 밀려든다. 수천년에 걸쳐 이룬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40년 내로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 분명한 상황이라... 따지고 보면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매일 반복 하는 행동들도 따지고 보면 다음 세대를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다음 세대가 없다면 인간은 무엇에 집중하게 될 것인가? P.D.제임스가 내놓는 대답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권력에 집착함으로써 남은 삶을 최대한 추악하게 덧칠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종말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국적에 따라 체류자를 차별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차별하며, 45세 이상과 이하를 차별한다. 노동력을 활용해 만들어내야 할 대단할 것도 없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콰이터스라는 이름으로 단체 학살 당하고, 독재자는 자신의 주위에 더 많은 국가경찰을 배치한다. 

주인공은 그런 종말의 시대에 '오늘을 이해하고 내일을 대면하기 위하여 어제를 해석하는 학문' 인 역사를 가르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게다가 아이를 낳아봐야 소용이 없다며 건강검진을 면제받은 장애인 줄리언과 루크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일체의 차별에 대해 가공할 냉소를 날리는 P.D.제임스의 디스토피아 이야기는 작가가 추리소설에서 외도한 단 한편의 작품이며, 2006년 알폰소 쿠아론 감독, 클라이브 오웬과 줄리안 무어 주연 영화로 제작되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161022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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