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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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소련에 침공당한 체코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보여주며 역사와 인간, 사랑에 대한 담론들을 이야기한다. 소설의 도입부는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는 작품의 초입을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바에 할애한다. 영원성과 일회성, 무거움과 가벼움.

 

외과의사 토마시는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도 그리워 하지 않는다. 그는 독신으로 맘에 맞는 여성과 얽매임 없이 성교하며 사는 것이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테레자라는 여인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녀는 마치 신화 속 '바구니에 담겨져 물에 떠내려온 아이' 처럼 나타난다. 토마시는 테레자와 성교 뿐 아니라 함께 잠을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테레자와 함께 한다고 해서 토마시의 바람기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비나와의 관계는 더욱 끊기가 어려웠다. 토마시는 성교와 사랑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테레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녀의 질투심은 그녀를 피폐하게 만든다. 그녀는 카레닌이라는 개에게 애정을 쏟는다.

그런 시기에 소련이 체코를 침공한다. 테레자는 소련군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만행을 기록하고자 한다. 얼마 후 토마시가 스위스 취리히의 괜찮은 병원에 일자리를 얻게 되자 둘은 스위스로 떠난다. 그러나 토마시는 그곳에서도 사비나와 관계를 맺으며 부적절한 행각을 이어가고, 마침내 테레자가 혼자서 체코로 떠나버린다.

토마시는 스위스에 그대로 남아서 안정된 직업과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것인지, 아니면 테레자를 뒤따라가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은 테레자를 선택한다. 되돌아온 체코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도로 이름이 소련식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작가가 자신의 거실에서 나눈 개인적인 대화가 도청된 후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벽에도 비밀경찰들의 눈과 귀가 있는 사회로 변질된 것이다.  토마시 역시 신문에 발표한 글 때문에 곤란에 처한다. 그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왕 신화에 빗대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버려진 갓난 아이를 발견한 왕이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간다. 왕이 아이를 키운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 산 속 오솔길에서 여행 중이던 낯모르는 왕을 만나는데 말다툼 끝에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인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그런데 그가 죽인 왕이 사실은 자기의 아버지였고, 자신이 동침한 여자가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영원히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난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던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몰랐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에게는 죄가 없는가?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오를 나중에야 알았지만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됨으로서 속죄의 길을 택한다. 토마시는 체코 검사들이 러시아 비밀경찰들에게 기만당했고 자신들도 속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과가 없어지는지를 <오이디푸스 신화>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다.

 

즉각 토마시는 체제전복 세력으로 분류되어 온갖 회유와 협박이 이어지고, 토마시는 스스로 외과의사 자리를 내려놓고 유리창 닦이가 된다. 하지만 유리창 닦이가 된 그는 더욱 반체제 인사처럼 여겨졌고,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 역시 토마시를 그런 이유로 존경하고 그에게서 인정받으려 한다. 하지만 토마시는 반체제 인사연 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반체제 인사로서 서명에 동참하는 따위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과의사로서 그들을 수술했을을 때였다며 그들과도 선을 긋는다. 그의 여성편력도 계속된다. 비밀경찰의 간계가 테레자에게까지 미치자(혹은 테레자가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사회 분위기가 되자) 그들은 시골로 내려간다. 그 이면에는 시골로 가게 되면 토마시가 더 이상 여자들과의 질펀한 정사를 이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테레자의 속셈도 있었다.

시골에서의 전원적인 생활을 해나가던 어느 날 카레닌이 암에 걸려 죽고 토마시와 테레자도 트럭 사고로 사망한다. 토마시의 아들은 토마시의 묘비명에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라는 비문을 세긴다. 토마시는 결고 그런 비문을 원치 않았을 것이고, 그 사실은 아들 역시 알고 있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위와 같지만 소설에서는 사비나와 프란츠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할애되어 있다. 사비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서 일탈된 예술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로움을 엿본 이후 끝내 정치와 국가를 외면하는 인물이고, 프란츠는 사비나에 매료된 인물로 그녀를 위한 반공산주의(그렇다고 친자본주의는 아니다)적 활동에 참여하다 어이없게도 노상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인물이다.

 

1982년에 체코어로 발표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에서 출간 금지가 되었고 1984년 쿤데라가 참여한 프랑스어판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었다. 1996년에 민음사에서 간행된 송동준의 번역서를 읽었는데 당시에는 책 자체가 무척이나 난해하고 반동적으로 느껴졌었다. 소설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 본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프라하의 봄>은 사실상 원작과 무관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번에 이재룡 번역본으로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 보다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프란츠의 죽음과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프란츠가 '대장정'에 참가하는 과정은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이다. 제국주의 미국을 사실상 패퇴시킨 베트남이 아이러니하게도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베트남의 비인도적인 침략 행위에 항의하며 의사들이 캄보디아에 의료 봉사를 위해 떠나는데 의사 수 보다도 기자들이 더 많고 심지어 유명 스타마저 참가한다. 그들은 의료 봉사를 통해 몇 명을 구출하는가 보다 자신들이 그러한 대장정 행렬에서 어떤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지는가가 더욱 중요한 인물들이다.(밥 딜런은 이런 류의 이미지 메이킹에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이다) 프란츠의 죽음은 이런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엉뚱하게도 노상 강도를 당해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죽고 만다.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토마시에게 진보적 인사들의 서명에 동참하라고 말하지만 기자 자신도 그 서명이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마시는 개인적인 이유로 참가하지 않는다.

 

레닌이 구체화시킨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의 요체는 결정 전 토론의 자유와, 결정 후 행동의 일치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토론의 자유 단계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이다. 누가 토론을 끝낼 결정권을 갖는가? 토론을 끝내고 행동의 단계로 돌입하는 적절한 시점은 누가 판단하는가? 그 판단이 다수결에 의한다면 토론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상 형식적인 장치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통한 행동에 진저리를 친 작가가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이문열은 그러한 행동에 대해 '홍위군'이라며 질색 팔색을 했고(그런 의미에서 이문열을 보수우파로 단순히 분류하기가 저어된다. 그는 언제나 보수우익이 제안하는 장관 자리를 신경질적으로 거절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공투의 수업 반대 투쟁에 대해 수업 받을 권리는 묵살되는 것이냐고 항변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역사 속에서 개인이 단 한번 밖에 삶의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토마시는 사비나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테레자를 선택한다. 그런데 인생에서의 선택은 바둑에서 잘못 둔 수를 물리듯 되돌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생은 너무나 부조리하다.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부조리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불가역성을 가진 개인의 삶은 그렇다면 우연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닐까? 테레자에게서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강을 떠내려온 바구니 속의 아이'와 같은 필연성을 느낀 토마시는 어느 날 문득 테레자와의 만남이 사실은 여섯 번의 우연 끝에 이루어진 결과는 아닌지 의심한다.

개인의 선택이 이러할 진대 역사 속 개인의 임무와 역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소련에 침공당한 체코의 개인이라면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도식이 가능한 것일까?

작가는 끊임 없이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이 반동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1996년의 '나'였다면, 지금의 '나'는 그런 의문들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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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임무를 마치고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
하인리히 뵐 지음, 정찬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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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은 마을 비르글라르의 가구수선공 요한 그룰과 그의 아들이자 연방군 병사인 게오르크 그룰이 연방군 지프를 방화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재판이 열린다. 그들은 구류 기간 동안 가혹한 대접을 받지도 않았고 심지어 식사를 날라다 주는 아가씨는 게오르크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순순한 태도로 자신들의 범행을 시인했고 재판과정에도 협조적이었다. 증인으로 소환된 마을 주민들은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시골 법정은 사건의 핵심에서 벗어난 증언들로 시장터를 방불케 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게오르크 그룰이 사실은 이미 제대했어야 옳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가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얻은 휴가가 잘못 계산되었으므로 연방군 지프를 불태울 당시에는 이미 민간인이었어야 맞다는 것이다.

신부와 경제학자, 집달관 등이 차례로 어수선한 증언을 계속한다. 경제학자의 증언으로 요한 그룰이 왜 파산에 처하게 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한 그룰은 잘못된 조세 정책 때문에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의 날카로운 분석은 곧 판사에 의해 제지되고 만다.

지프를 태운 행위가 차츰 예술적 행위가 아니었는가 하는 방향으로 재판이 진행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교수가 증언을 한다. 그는 그룰 부자가 지프를 태운 행위가 하나의 '해프닝'이었고, 그 행위를 충분히 예술행위로 볼 수 있다고 증언한다. 점차 사건이 축소되는 분위기 속에서 검사가 마침내 '못해먹겠다'면서 뒤로 나자빠지기까지 하지만 결국 그룰 부자는 6주간의 구류와 벌금형이라는 가벼운 처벌만을 받게 된다.

 

요한 그룰은 전쟁에 참가하여 적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빼돌린 가구 수선에 골몰했고, 그의 아들 게오르크 그룰 역시 자동차 점검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동차 운행 킬로수를 조작하는 일이 주임무였다. 잘못된 조세 정책으로 그룰 부자는 소득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뜯겨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룰 부자가 군용 지프를 불태우자 국가는 그룰 부자의 행위가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행위가 예술적 표현인양 포장하여 얼렁뚱땅 재판을 처리하고 만다. 먼저 날짜 계산이 잘못 되었다며 게오르크가 사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라고 우기고, 그들이 군용 지프를 태운 행동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예술적 표현의 한 형태라고 어거지를 쓰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예술 행위의 소재를 적법한 절차를 통해 입수하도록 충고하며 가벼운 처벌로 재판은 마무리되는데, 이러한 블랙코미디를 통해 작가는 예술작품을 통한 저항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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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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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군 장영실이 쫓겨나고 박연이 봉상시에서 쫓겨난 뒤,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에서 집현전 학사 장성수가 시체로 발견된다. 말단 겸사복 채윤이 사건을 맡는다. 

주자소에서 또 다른 학사 윤필이 사망하자 사건은 벙어리 무수리 소이를 둘러싼 치정 때문인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죽음은 계속 이어진다. 세번째 희생자는 허담으로 집현전에서 쇠몽둥이에 맞아 사망한다. 네번째 희생자는 정초 대감으로 경회루에서 사망한다.

채윤은 사망한 학사들이 활자의 주조나 지도 제작과 같이 잡학과 관련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과 팔뚝에 일정한 형식의 문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살해한 방법에 오행설이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그러나 채윤의 조사는 벽에 막히고, 비서고에서 사라진 <고군통서>가 살인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한편, 벙어리 소이가 거듭되는 살인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그녀에 대한 연정이 깊어간다.

성삼문이 다섯번째 희생자가 되기 직전 채윤이 구출한다. 그리고 <고군통서>의 비밀이 밝혀진다. <고군통서>에는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주적인 조선을 건설할 것을 요지로 하는 내용이 씌여 있었으며, 저자는 다름 아닌 세종이었다. 따라서 그 책이 경학파의 손에 들어갈 경우 세종을 위협할 무기가 될 것이었고, 명나라에 전달될 경우에는 격물치지를 주장하는 세종의 뜻이 꺾이게 될 것이 자명했다.

격물치지를 위한 최종 작업으로 세종은 조선의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고 있었다. 새로운 글이 창제될 경우 경학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은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었다. 최만리 등의 경학파와 정인지 등의 실용학파 간의 팽팽한 기싸움이 <고군통서>의 행방에 달려 있었다.

마침내 살인범들의 손길이 세종에게까지 미치고 살아남은 끄나풀이 배후는 최만리라고 토설한다. 최만리는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듯 했고, 사건은 명약관화하게 정리되는 듯 하는데... 채윤은 모진 고문 속에서 진범은 최만리가 아니라며 다른 이를 지목한다.

 

지지난 해에 <바람의 화원>을 재미있게 읽었다. 어린이 그림그리기 대회 예선 통과 작품을 뽑아 보고 해야 했는데, 수원 인근에서는 적당한 장소와 심사위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부득이 서울체신청에 위탁을 맡기고 하릴없이 포스트타워 11층의 호젓한 장소에서 읽었다. 역사의 팩트 사이에 작가가 개입하여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권한을 마음껏 누린 작품이었다.

반면 <뿌리깊은 나무>는 약간 실망스럽다. 시전 상인 윤길주과 심종수를 엮는 부분이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면이 있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 시기에나 이루어질 법한 커넥션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세종 시기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아닌가 싶다. 실존 인물들과 가공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못한다. 역사를 다시 쓸 수는 없으니 가공인물들에 죄다 악역을 맡겨야 했을 것이고 상상력의 제한이 가해졌을 것이다. 채윤과 소이만이 유독 현대적인 인물로 처리되어 그 점 역시 버성기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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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환상문학전집 20
헨리 라이더 해거드 지음, 이영욱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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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일하는 루드윅 호레이스 홀리는 못생긴 외모 때문에 여성들과 거리를 두고 진리 탐구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철궤와 함께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유언의 내용은 자신의 아들 레오 빈시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과, 빈시가 스물 다섯이 되는 해에 철궤를 열어 그 안에 담긴 빈시 가문의 유지를 실행해달라는 것이었다.

빈시는 아름답고 수려한 외모의 청년으로 자라났고, 홀리는 그를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어느덧 빈시가 스물 다섯이 되자 둘은 철궤를 연다. 그 속에는 도편과 양피지들이 들어있었고 거기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씌여 있었다.

 

이시스의 사제 칼리크라테스는 파라오의 왕족 아메르타스를 사랑한 탓에 신에 대한 서약을 깨뜨리고 함께 아프리카로 도망친다. 그곳에는 이방인의 머리에 항이리를 씌워 죽이는 족속이 있었는데 그들을 다스리는 여왕은 불멸의 생명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었다. 여왕은 칼리크라테스에게 한눈에 반해 만약 그가 아메르타스를 죽이고 자신에게 온다면 불멸의 힘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하지만 칼리크라테스가 이를 거부하자 여왕은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고, 아메르타스를 추방한다. 아메르타스는 아이를 낳는데 그 아이가 바로 빈시의 오랜 선조이다. 아메르타스는 아이에게 불멸의 여왕을 찾아가 복수를 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빈시의 선조들은 불멸의 여왕을 죽이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를 도편에 남겼다. 도편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거나, 의지가 부족하여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빈시 가문의 유언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레오는 도편과 양피지에 기록된 것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홀리와 레오, 그리고 하인 조브는 불멸의 여왕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한다.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그들이 타고간 다우선이 침몰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일행은 아프리카의 부족들에게 사로잡히는데, 그들이 바로 이방인의 머리에 항아리를 씌워 죽이는 족속임에 분명해 보였다.

아마하가 부족의 족장 빌랄리는 여왕이 그들을 해치지 말고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말한다. 부족은 모계 중심 사회였는데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을 발견하면 키스를 하고, 남성이 이를 거부하지 않으면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고 했다. 아름다운 우스테인이 레오에게 키스를 하고, 레오가 그들의 관습을 잘 알지 못해 거부하지 않는다. 우스테인은 레오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아마하가 부족의 식인 관습 때문에 레오 일행은 위기를 맞는다. 아마하가 부족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레오가 상처를 입게 되고, 여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열병까지 얻게 된다.

홀리가 여왕을 먼저 알현한다. 여왕은 자신의 이름이 아샤이며 2천년을 넘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었는데 홀리는 자신도 모르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 베일을 벗어달라고 간청한다. 여왕은 베일을 벗은 자신의 얼굴을 본 남성들은 이룰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심장이 갉아먹힐 것이라 했고, 과연 그녀의 말대로 되었다. 홀리는 여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것에 괴로와한다.

열병으로 신열에 들뜬 레오를 치료하기 위해 온 아샤는 레오의 얼굴을 본 순간 희열에 달뜬 표정으로 그가 바로 칼리크라테스의 환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방부처리된 시체를 보여주는데 시체의 얼굴은 정확히 레오의 얼굴이었다. 아샤는 시체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며 한 줌 재로 화하도록 만들고 레오를 치료한다.

레오를 헌신적으로 간병하던 우스테인이 아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이를 본 레오가 아샤를 비난하지만 그녀가 베일을 벗자 레오 역시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고 만다.

아샤가 레오에게 영원한 삶을 주겠다며 그들을 험준한 산맥의 비밀스러운 통로로 데리고 간다. 신비스러운 불꽃이 타오르는 동굴에 이른 그녀는 불을 쏘이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며 직접 불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불 속을 나온 그녀는 점차 온 몸이 늙어가기 시작하더니 작게 쪼그라들어 결국 죽고 만다. 영원한 삶을 주는 불을 두 번 쏘이면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불의 속성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오와 홀리는 아샤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심장을 베인 채 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고 남은 평생 동안 아샤에 대한 기억을 떨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1887년에 발표된 <그녀(She : A History of Adventure)>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아주 기묘하면서도, 숨은 의미로 가득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정글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해거드를 '비유와 상징, 그리고 한 가지를 다른 하나에 반영하는 데 대단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 외에도 C.S.루이스, D.H.로렌스, 그레이엄 그린, J.R.R.톨킨, 조셉 콘레드 등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암흑의 핵심>은 <그녀>의 분위기를 온전히 차용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남성이 성년이 되기 전 품게 되는 여성에 대한 욕망은 그 욕망의 강력함 때문에 완전무결한 이미지를 갖게 되며, 자신이 감히 그러한 완전무결함을 취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상상 속의 여성은 상냥하고, 아름다우며, 세속적인 오염과 무관하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사람' 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 속의 신격화된 그 무엇이다. 신격화된 그 무엇을 취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경고음을 울려댄다. 그들은 여성을 두려워하고, 다가설 수 없으며, 환상 속에서만 관계를 맺는다.

아샤는 그러한 남성 욕망의 현현이다. 미지의 대륙인 아프리카는 바로 다른 성(性)에 대한 남성의 무지함을 비유하고, 그곳의 여왕인 아샤는 남성 욕망의 대상을 상징한다. 불멸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아샤는 남성을 무릎 꿇게 만들고,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욕망하게 만든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의 욕망은 진정한 욕망이 아니고, 기껏해야 욕구의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남성 욕망이 실현 단계에 접어들면 이번에는 아샤의 이미지가 깨어진다는데 있다. 금기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모든 환상은 깨어진다. 레오가 아샤의 구애를 받아들인 직후 그녀가 2천년 세월을 온 몸에 아로 세긴 채 죽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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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최수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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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여름이 막 시작된 시기에 낙엽이 이리저리 쓸리고 있다. 그는 낙엽들을 자세히 살피다가 그것들이 매미임을 인지한다. 그는 매미들이 그리는 작은 원들에 의해 포위되고, 함정에 빠졌으며, 비로소 자신이 매미들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인간인 듯도 했고 매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매미들의 울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왔고, 자신이 한 마리의 매미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사내는 매미가 되기 직전의 하루를 떠올린다. 그는 한 모텔에서 기억상실자로 깨어난다. 문신이 있는 여관 주인과 단속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주인의 딸인 듯한 여자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난다. 여자아이는 곧 다른 청소년들의 무리에 섞여 사라지고, 뒤쫓던 사내는 아이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그는 주민등록증의 주소를 통해 자신이 살던 집이 경기도의 신도시임을 확인하고, 통장 잔고를 통해 중간 정도의 소득 수준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낸다.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남긴 남자와 여자를 만나 자신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술집 '아우라'의 여주인과 관계를 맺는다. 환상 속에서 그는 여주인의 남편이었고, 남편이 곧 그의 아들이기도 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지하도에서 그는 은행에서 난동을 부리던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그를 매미의 세계로 인도한다. 노인은 매미의 세계를 사내가 원했고, 그런 사내의 욕망을 매미들이 감지하여 노인을 인도자로 삼아 그를 데려오게 했다고 말한다. 노인이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애벌래만 남고, 사내는 애벌래를 돌로 내리친다. 그 순간 시간의 화살이 날아와 사내의 이마에 박히고 시간이 정지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섰던 것인지, 이미 자신이 지은 죄를 찾아나선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내는 매미가 되었다.

 

그리고, 또 사내가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주의를 둘러보고, 자신이 매미의 세계에 갖혀 있음을 깨닫게 되며, 자신이 한 마리의 매미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93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얼음의 도가니>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과 화해를 꾀하며 <매미>를 읽는다. 화해는 어려워 보인다. 

한 사내가 매미가 된다.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매미>에서는 '변신'이 아니라 '변태'에 가깝다. 그 사내는 매미가 되기 직전 만 하루를 인간으로 살게 되는데, 그나마도 기억을 잃은 채로이다. 따라서 사내의 일평생이 곧 만 하루 동안 펼쳐진다. 장자의 나비처럼 그는 자신이 매미인지, 매미가 자신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중언부언하기 시작한다. 매미가 되기 직전 사내의 의식은 일견 의미 없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스토리를 기대한 독법은 즉시 수정되어야 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다. 기억이라는 것은 일종의 저장이다. 그런데 단지 저장만 된다고 해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양질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기대할 때에 저장으로서의 기억이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애초에 저장되는 기억의 편린들에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무언가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해야 옳다는 마음가짐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기억상실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기억상실 이후 사내는 만 하루를

꼬박 살아낸다. 그 하루의 반복이 곧 그 사내의 평생일 것이다. 그런데 그 하루가 반복되는 동안 어떤 유의미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고, 통찰력을 지닌 듯한 상태에 빠져 들다가도 매미의 울음 소리와 환상으로 불가지론적인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런데 작가는 매미가 된 사내의 웅얼거림을 맨마지막에 다시 반복해 놓음으로서 사내가 기억상실 상태의 하루를 무한 반복하도록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의 깊이가 얼마만큼 깊은지 알 수 없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0189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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