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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작가는 소련에 침공당한 체코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보여주며 역사와 인간, 사랑에 대한 담론들을 이야기한다. 소설의 도입부는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는 작품의 초입을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바에 할애한다. 영원성과 일회성, 무거움과 가벼움.
외과의사 토마시는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도 그리워 하지 않는다. 그는 독신으로 맘에 맞는 여성과 얽매임 없이 성교하며 사는 것이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테레자라는 여인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녀는 마치 신화 속 '바구니에 담겨져 물에 떠내려온 아이' 처럼 나타난다. 토마시는 테레자와 성교 뿐 아니라 함께 잠을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테레자와 함께 한다고 해서 토마시의 바람기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비나와의 관계는 더욱 끊기가 어려웠다. 토마시는 성교와 사랑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테레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녀의 질투심은 그녀를 피폐하게 만든다. 그녀는 카레닌이라는 개에게 애정을 쏟는다.
그런 시기에 소련이 체코를 침공한다. 테레자는 소련군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만행을 기록하고자 한다. 얼마 후 토마시가 스위스 취리히의 괜찮은 병원에 일자리를 얻게 되자 둘은 스위스로 떠난다. 그러나 토마시는 그곳에서도 사비나와 관계를 맺으며 부적절한 행각을 이어가고, 마침내 테레자가 혼자서 체코로 떠나버린다.
토마시는 스위스에 그대로 남아서 안정된 직업과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것인지, 아니면 테레자를 뒤따라가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은 테레자를 선택한다. 되돌아온 체코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도로 이름이 소련식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작가가 자신의 거실에서 나눈 개인적인 대화가 도청된 후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벽에도 비밀경찰들의 눈과 귀가 있는 사회로 변질된 것이다. 토마시 역시 신문에 발표한 글 때문에 곤란에 처한다. 그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왕 신화에 빗대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버려진 갓난 아이를 발견한 왕이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간다. 왕이 아이를 키운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 산 속 오솔길에서 여행 중이던 낯모르는 왕을 만나는데 말다툼 끝에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인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그런데 그가 죽인 왕이 사실은 자기의 아버지였고, 자신이 동침한 여자가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영원히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난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던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몰랐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에게는 죄가 없는가?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오를 나중에야 알았지만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됨으로서 속죄의 길을 택한다. 토마시는 체코 검사들이 러시아 비밀경찰들에게 기만당했고 자신들도 속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과가 없어지는지를 <오이디푸스 신화>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다.
즉각 토마시는 체제전복 세력으로 분류되어 온갖 회유와 협박이 이어지고, 토마시는 스스로 외과의사 자리를 내려놓고 유리창 닦이가 된다. 하지만 유리창 닦이가 된 그는 더욱 반체제 인사처럼 여겨졌고,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 역시 토마시를 그런 이유로 존경하고 그에게서 인정받으려 한다. 하지만 토마시는 반체제 인사연 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반체제 인사로서 서명에 동참하는 따위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과의사로서 그들을 수술했을을 때였다며 그들과도 선을 긋는다. 그의 여성편력도 계속된다. 비밀경찰의 간계가 테레자에게까지 미치자(혹은 테레자가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사회 분위기가 되자) 그들은 시골로 내려간다. 그 이면에는 시골로 가게 되면 토마시가 더 이상 여자들과의 질펀한 정사를 이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테레자의 속셈도 있었다.
시골에서의 전원적인 생활을 해나가던 어느 날 카레닌이 암에 걸려 죽고 토마시와 테레자도 트럭 사고로 사망한다. 토마시의 아들은 토마시의 묘비명에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라는 비문을 세긴다. 토마시는 결고 그런 비문을 원치 않았을 것이고, 그 사실은 아들 역시 알고 있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위와 같지만 소설에서는 사비나와 프란츠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할애되어 있다. 사비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서 일탈된 예술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로움을 엿본 이후 끝내 정치와 국가를 외면하는 인물이고, 프란츠는 사비나에 매료된 인물로 그녀를 위한 반공산주의(그렇다고 친자본주의는 아니다)적 활동에 참여하다 어이없게도 노상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인물이다.
1982년에 체코어로 발표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에서 출간 금지가 되었고 1984년 쿤데라가 참여한 프랑스어판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었다. 1996년에 민음사에서 간행된 송동준의 번역서를 읽었는데 당시에는 책 자체가 무척이나 난해하고 반동적으로 느껴졌었다. 소설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 본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프라하의 봄>은 사실상 원작과 무관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번에 이재룡 번역본으로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 보다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프란츠의 죽음과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프란츠가 '대장정'에 참가하는 과정은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이다. 제국주의 미국을 사실상 패퇴시킨 베트남이 아이러니하게도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베트남의 비인도적인 침략 행위에 항의하며 의사들이 캄보디아에 의료 봉사를 위해 떠나는데 의사 수 보다도 기자들이 더 많고 심지어 유명 스타마저 참가한다. 그들은 의료 봉사를 통해 몇 명을 구출하는가 보다 자신들이 그러한 대장정 행렬에서 어떤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지는가가 더욱 중요한 인물들이다.(밥 딜런은 이런 류의 이미지 메이킹에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이다) 프란츠의 죽음은 이런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엉뚱하게도 노상 강도를 당해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죽고 만다.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토마시에게 진보적 인사들의 서명에 동참하라고 말하지만 기자 자신도 그 서명이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마시는 개인적인 이유로 참가하지 않는다.
레닌이 구체화시킨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의 요체는 결정 전 토론의 자유와, 결정 후 행동의 일치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토론의 자유 단계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이다. 누가 토론을 끝낼 결정권을 갖는가? 토론을 끝내고 행동의 단계로 돌입하는 적절한 시점은 누가 판단하는가? 그 판단이 다수결에 의한다면 토론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상 형식적인 장치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통한 행동에 진저리를 친 작가가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이문열은 그러한 행동에 대해 '홍위군'이라며 질색 팔색을 했고(그런 의미에서 이문열을 보수우파로 단순히 분류하기가 저어된다. 그는 언제나 보수우익이 제안하는 장관 자리를 신경질적으로 거절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공투의 수업 반대 투쟁에 대해 수업 받을 권리는 묵살되는 것이냐고 항변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역사 속에서 개인이 단 한번 밖에 삶의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토마시는 사비나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테레자를 선택한다. 그런데 인생에서의 선택은 바둑에서 잘못 둔 수를 물리듯 되돌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생은 너무나 부조리하다.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부조리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불가역성을 가진 개인의 삶은 그렇다면 우연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닐까? 테레자에게서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강을 떠내려온 바구니 속의 아이'와 같은 필연성을 느낀 토마시는 어느 날 문득 테레자와의 만남이 사실은 여섯 번의 우연 끝에 이루어진 결과는 아닌지 의심한다.
개인의 선택이 이러할 진대 역사 속 개인의 임무와 역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소련에 침공당한 체코의 개인이라면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도식이 가능한 것일까?
작가는 끊임 없이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이 반동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1996년의 '나'였다면, 지금의 '나'는 그런 의문들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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