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
마르시아스 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떨림>은 마르시아스 심으로 창씨개명한 심상대가 섹스를 소재로 엮어낸 여덟 편의 연작 소설집이다. 마르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로 아테네가 버린 피리를 얻어 일가를 이룬 후 아폴로에게 도전했다가 패하여 가죽이 벗겨진다. 심상대가 마르시아스라는 이름을 취한 후 공공연히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을 미(美)와 예술의 담지자로 자처하는 사뭇 도도한 행태라 하겠다. 

연작소설 <떨림>은 작가가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될 화자를 내세우는데 사드에 비견될만한 이 난봉꾼이 화장실 벽 낙서 수준의 개연성으로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아름다움이라든가 떨림, 또는 젊은 날에 느꼈던 까닭 모를 울증에 대해 '썰'을 푸는 것이다. 그 '썰'이 꽤나 독자의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바가 있어 소설은 술술 읽히고 심미주의자를 자처하는 작가의 탐미적 성향이 사춘기적 감수성에 어필하는 바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탐미적 성향은 오스카 와일드 이래 새로운 것이 아니다. 거칠고 순발력 있는 입담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사실은 화장실 낙서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 발현된 그저그런 '코사지'에 불과하다는 혐의는 못내 지울 수가 없는 것은 어찌된 이유인가. 

 

소설의 화자는 심상대의 분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강원도에서 반항기 어린 학창 생활을 보내며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주인공이 상황에 떠밀려 일시 화류계에 몸담다가 군대에 다녀와, 중간 생략, 그리하여 소설가가 된 주인공은 결혼을 하는데 결혼의 그 폭력적인 속성을 견디지 못하여 다섯살 난 아이가 있지만 이혼하였고, 때때로 대학강의나 문화원 창작강의를 나가기도 하며 목하 여자를 '따먹거나 따먹히거나' 하고 있다. 

그가 '따먹거나 따먹히거나' 하는 상대는 미성년자 자매일 때도 있고 육십세가 넘는 고상한 유부녀일 때도 있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그가 '따먹거나 따먹힌' 여자들과의 관계를 나름의 진정성으로 꾸려 나간다는 사실과 그 속에서 미추의 전연 새로운 기준을 발견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절름발이 여자와 관계를 맺거나 매독에 걸려 머리가 모두 빠져버린 친구 어머니의 눈을 보다가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여성과 관계 맺는 것과 동일한 층위에서 다루어진다. 

이 대목에서 이제 심상대가 엮어낸 <떨림>이 사실 화장실 낙서와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적절히 리믹스한 '독자적' 상부구조로서의 도색소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심상대가 추구하는 미(美)와 예술관은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런 매력 없이 타락한 인물이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이 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아름다운 사물을 오직 '아름다움'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 뿐이다.

 

심상대는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모름지기 남녀간의 성애에서 찾아야 한다. 여덟 편의 성애 이야기 속에서 관계 맺기의 개연성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아름다움이 나에게는 마광수 식의 '나는 OOO가 좋다'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발문에서 심상대를 우리 시대의 귀한 재능이라고 전제한 뒤, 광주의 처절한 기억과 그 피비린내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던 사람들(항상 더 급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만 마음을 내주었던)에 밀려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환상과 현실 사이의 얇은 막을 회칼로 저미는 것처럼 파고 들어가는 문체와 체험과 기억과 문학이 맺는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탁월한 탐구를 풀어내는 업적을 추켜세운다. 과연 온당한 한탄인가. 

심상대는 미성년자를 '따먹기' 전에 여자에게 남자 성기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라고 부르게 한다. 장정일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시위 도중 운동권이 여자와 관계를 맺는 상황을 설정한 후 운동권의 입에서 파쇼 타토를 외치도록 한다. 자신들이 참여하지 못한 진보의 흐름에 침을 뱉고 비아냥 거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독학자들의 패거리짓기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과 비겁한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나는 '여전히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라고 외치는 리얼리즘 지상론자는 아니다. 그러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현실에 환상을 덧칠하고 마침내 매니큐어 칠한 여자의 손톱에서 미를 찾는 부류와는 아직까지도 타협할 수가 없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양심의 문제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97266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푸라기 여자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4
까뜨린느 아를레 지음, 송홍빈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매일같이 신문 구혼 광고란을 보며 신데렐라가 될 것을 꿈꾸던 힐데가르데 마에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광고가 있었다. 막대한 유산을 가진 남자가 함부르크 출신이고 가족과 친지가 없는 여성을 베필로 맞고 싶다는 광고를 신문에 실은 것이다. 힐데가르데는 자신에게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보낸다. 힐데가르데는 솔직담백하게 자신이 안락한 삶을 원한다고 편지에 적었는데 그 점이 좋게 생각되었는지 만나고 싶다는 답장이 온다.

힐데가르데의 눈 앞에 나타난 남자는 60대의 점잖은 신사였다. 그는 자신이 세계적인 갑부 칼 리치몬드의 비서이고 이름은 앤턴 콜프라고 했다. 서로간에 솔직한 대화가 몇 마디 오고간 끝에 앤턴 콜프는 속내를 털어놓는데, 그 내용이 사뭇 충격적이었다. 힐데가르데가 칼 리치몬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앤턴 콜프의 도움을 받아 그와 결혼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고, 20만 달러를 앤턴 콜프에게 사례비조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힐데가르데는 애초에 정상적인 결혼일리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앤턴 콜프는 힐데가르데가 결혼 후에 자신을 팽 시킬 것을 우려가 있으므로 몇 가지 안전장치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첫번째는 힐데가르데가 자신의 양녀가 될 것이고 두번째는 20만달러 짜리 횡선수표를 의미 있는 문구와 함께 자신의 뉴욕 주소로 보내는 것이었다. 첫번째 안전장치는 힐데가르데가 결혼한 후 앤턴 콜프가 그녀에게 집적인다며 '팽'시킬 것을 차단할 목적이었고, 두번째 안전장치는 20만달러의 지급을 거절할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자존심 강한 불구의 칼 리치몬드는 앤턴 콜프의 훈수대로 행동하는 힐데가르데에게 반해 청혼하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 했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린 후 입항 하기 하루 전, 칼 리치몬드가 급사하고 만다. 앤턴 콜프는 새로 작성한 유서가 아직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칼 리치몬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  자신들은 한 푼도 받지 못한다며 그의 죽음을 숨기자고 제안한다. 힐데가르데는 칼 리치몬드의 시체를 잠이 든 것처럼 휠체어에 태워 집으로 옮기고 하루를 버티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운전사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친다.

칼 리치몬드의 사망 사실을 은폐한 죄를 추궁받던 힐데가르데에게 새로운 죄목이 추가된다. 바로 칼 리치몬드의 살해죄였다. 부검 결과 그는 살해당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힐데가르데는 앤턴 콜프가 곤경에 빠진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경찰들은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한다.

유서를 새로 등록하기 위해 앤턴 콜프가 시간을 늦추자고 했다는 그녀의 말에 경찰들은 새로운 유서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말한다. 또 앤턴 콜프가 양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앤턴 콜프가 친부로 버젓이 등록되어 있는데도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혼동에 빠진 그녀를 찾아온 앤턴 콜프가 그녀를 이용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 하나 알려준다.

앤턴 콜프는 힐데가르데가 폭격당한 도시 함부르크 출신의 고아라는 것에 착안해 함부르크 관청의 서류를 위조하여 그녀가 자신의 친딸인 것처럼 서류를 꾸미고, 칼 리치몬드를 살해한 후에 유서를 등록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그녀로 하여금 시체를 옮기게 만든다. 그외에도 앤턴 콜프는 여러가지 조작을 가해 힐데가르데가 유산을 노리고 칼 리치몬드를 살해한 것처럼 꾸민다. 그녀가 교수형에 처해지면 그녀가 물려받은 모든 재산은 아버지인 자신에게 자동으로 넘어올 것이었다. 힐데가르데는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면 할수록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비단 양말의 튼튼함에 의지해 생을 마감하고 만다.

 

1956년에 발표된 <지푸라기 여자(La Femme de Paille)>는 불어의 'Homme de Paille'에서 따온 것으로 미끼가 된 여자를 뜻한다고 한다.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보통 범인이 밝혀지고 그가 처벌 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소설에서는 범인에게 걸려든 가련한 여인이 스스로 자살함으로서 막을 내린다. 

1964년에 배질 디어든 감독, 숀 코네리와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주연한 영화 <Woman of Straw>에서는 관중들의 정서를 감안하여 해피 앤드로 수정되어 제작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95627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율사 이청준 문학전집 장편소설 3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나'는 잡지사 편집 사원으로 일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율'에 만족하고 있는데, 이 '조율'이라 말이 그들 사이에만 통용되는 일종의 은어이다.  

글쟁이들 여럿이 <기적>이라는 다방에 모여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활발히 나누면서 정작 글은 쓰지 못하는 것을 본 한 시인이 '연주는 못하고 악기만 녹슬까봐 조율만하는 조율사들'이라고 비아냥댄 사건에서 연원한 말인 것이다. 

얼마 후 평론가 지훈이 '지식인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남쪽으로 잡았다면 그쪽으로 가도록 배를 유도해야 한다. 서쪽으로 가려는 세력이 있을 때에는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이 남쪽이라는 이유로 그쪽으로만 배를 저으며 알리바이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배를 저어야 할 것이다' 라는 요지의 글을 발표한다. 마치 조율사들에게 금기가 되어버린 한 음을 되찾아 연주한 것과 같았다. 그후 지훈은 미치고 만다. 

'나'는 글을 못 쓰는 것 외에도 여자친구 은경과 이별 일로에 있었고, 술주정을 하다 끝내 세상을 뜬 형님의 권속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위장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 때때로 '단식'을 생각하고 있으며, 전쟁통에 잃어버린 외종사촌형을 꼭 찾아야하리라는 강박도 갖고 있다. 

은경과의 관계가 끝내 파국을 맞고, 형수님이 아이들 중 하나를 '나'에게 맡긴 후 재가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힌다. '나'는 엉뚱하게도 부산으로 외종사촌형을 찾으러 떠난다. 하지만 형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되돌아온 서울에는 형님의 맏아들 신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45일간의 단식에 들어간다. 단식에 들어가 점차 음식물을 줄여갈 때 느끼는 고통이 '죽음'을 의사체험하는 과정이고, 15일간의 단식 후 다시 음식물을 섭취하기 시작할 때 찾아오는 고통은 '환생'의 과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 팔기는 단식조차도 조율의 한 방편이 아닌지 의문을 나타낸다. '나'는 단식 과정 중 사실은 우리 모두가 출구가 없는 조율실 안에 갖혀 죽어가는 악몽을 꾸게 된다. 

 

1973년에 발표된 <조율사>는 이청준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구조가 산만하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평론가 정과리는 이러한 산만함이 어쩌면 의도된(혹은 필연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조율사>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설이 아니라, 삶의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는 소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문제에 대한 대답은 거짓 대답이니 작품의 골격이 곁 이야기들의 변주에 따라 꺽이고 휘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정과리는 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은 붕괴시킨 후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의 이념이 퇴색되고 참여자들 중 다수가 혁명의 외양적 승리에 자족할 때에 '자기 정립에 실패한 시민의 소시민 의식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작가 이청준은 작품 속에 '민중청부업'이란 제재 하에 우화를 하나 마련해 놓았는데 내용은 이렇다. (1) 민중청부업자들(지식인)들은 민중의 호응을 얻어 민권 옹호를 위해 싸운다. (2)권력은 위장과 변신을 거듭하고, 민중은 청부업자들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만다(혁명 이념의 승리) (3)편한 잠에 빠져든 민중들 위에 권력이 새로운 지배를 시작한다(혁명의 붕괴) (4) 이제 잠이든 민중에게 화살을 돌려 그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게끔 해야 한다(지식인의 배반)

 

<조율사>는 '나'의 개인적 사건들을 병치, 나열하며 두서 없이 전개되고 있는 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4.19 이후 지식인 사회에 만연해 있던 침묵의 분위기와 이를 탈피하고자 하는 작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든파티 (반양장) 펭귄클래식 79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한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맨스필드는 1988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 않아 할머니가 육아를 전담한 것으로 보인다. 1903년에 두 언니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퀸스칼리지에서 배운다. 이때 평생을 함께할 아이다 베이커(Ida Baker)를 만난다. 아이다 베이커와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일종의 대자매, 혹은 결혼 관계로 보는 사람도 있다. 아이다 베이커는 맨스필드의 동료이자 간호사, 하녀 등 여러 역할을 수했하였고 후에 레슬리 무어(Lesley Moore)라는 필명으로 개명한다. 

어쨌든 1906년 12월 뉴질랜드로 돌아온 맨스필드는 자신이 영국적으로 변모했음을 깨닫고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에 욕구 불만을 느낀다. 이 시기에 두 건의 동성애 사건이 일어난다. 소녀시절 알고 지내던 마아타(Maata)와 화가이자 삽화가였던 20대 여인 이디스 벤돌(Edith Bendall)이 상대였다. 

1908년 18개월만에 런던으로 돌아간 맨스필드는 그 뒤로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더니즘적'이며 '우연적'인 삶을 산다. 영국에 도착한 맨스필드는 자신을 양녀로 입양한 트로웰(Trowell)부부의 아들 가넷(Garnet)과 연애관계를 일으킨 후 트로웰 부부와 관계가 소원해지자 충동적으로 조지 보든(George Bowden)이라는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신랑을 버리고 가과 재결합하는 돌출 행동을 벌인다. 그녀는 당시 임신중이었고 이를 알게 된 어머니는 유언장에서 맨스필드를 제외시키기까지 한다.

얼마 후 맨스필드는 폴란드 작가이자 번역가인 플로리안 소비에니옵스키(Floryan Sobieniowski)를 통해 체호프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동성애 관계로 발전하는데 이 관계에서 맨스필드는 임질에 옮는다. 하지만 병에 걸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않았고 이로 인해 류머티즘으로 고통 받았고 불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봄에 맨스필드는 보든과 이혼하고 존 미들턴 머리와 결혼한다. 

한편 맨스필드는 남동생 레실리 '처미' 보샹은 1915년 프랑스 전선에서 사망하는데 남동생에 대한 맨스필드의 감정은 조금 기묘했던 것으로 보인다. 맨스필드는 남동생을 자신의 뮤즈로 생각하였고 그의 죽음을 통해 자신에게 작가라는 소명이 요구되었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1917년 결핵에 걸려 치료를 위해 애쓰던 맨스필드는 자의식 강한 모더니즘 작가로 창작과 인생 모두에서 실험적인 면모를 드러냈고 D.H.로렌스, 버지니아 울프 등 당대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상호 영향을 주었다. <가든파티와 그 외 단편들>을 완성한 후 병세가 악화된 맨스필드는 러시아의 도사 구르지에프(Grudjieff)가 프랑스 퐁텐블로에 운영하던 수상한 공동체에 합류하여 지내다가 사망한다.

(이상은 로나 세이지의 서문을 발췌한 것이다)

 

3월 9일부터 닷새간 잠들기 전 조금씩 읽었는데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몽롱하고 희미한 인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소설은 일정한 형식을 결여한 채 의식의 몽롱한 상태를 기술하기도 하고 모처럼 이야기라 할만한 것이 전개되다가도 말줄임표와 같은 애매한 결말로 끝나버리기도 한다.

사실 한 권의 소설을 읽고 희미하고 몽롱한 인상만 받은 데에는 모더니즘 작가들에 대한 나의 이해가 저열한 탓도 있겠지만 맨스필드가 쓰는 이야기들이 전연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탓도 있다. 맨스필드가 써내려가는 중언부언의 안개 속에서 감지되는 것은 분열의 징후와 퇴폐적인 경향을 가리려는 허위의식 들이다. 

 

수록된 단편들


<만에서(1922년 1월)>

<죽은 대령의 딸들(1921년 5월)>

<낯선 사람(1921년 1월)>

<어린 소녀(1920년 10월 29일)>

<브릴 양(1920년 11월 26일)>

<마 파커의 일생(1921년 2월 26일)>

<하녀(1920년 12월 24일)>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1921년 8월 13일)>

<현대식 결혼(1921년 12월 31일)>

<항해(1921년 12월 24일)>

<첫 번째 무도회(1921년 11월 28일)>

<이상적인 가족(1921년 8월 20일)>

<가든파티(1922년 2월)>

<노래 수업>

<은행 휴일>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91995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재유는 1903년 함경북도 삼수군 별동면 선소리에서 이각범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각범은 일제에 순응해 그럭저럭 밥벌이를 하는 면서기였는데 동네에서는 어느 정도 인심을 얻고 살았던 듯 하다. 삼수의 보통학교에 잠시 다니던 이재유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자퇴한다. 1919년 이재유가 열 다섯 되는 해에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한 동리에 살던 사회주의자 박기춘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두 사건은 이재유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든다.

더 배우고 싶은 욕심에 무작정 서울로 향한 이재유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한편 도서관에서 독학을 시작한다. 이 당시 접한 책이 일본의 사회주의자 가와카미 하지메가 번역한 <유물사관>이었다.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이재유는 이후로 사회주의 서적을 집중적으로 탐독하였고 열여덟 살 생일날 아침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보성고보 입학시험에 붙었으나 돈이 없어 몇 달 다니다 그만둔 이재유는 중병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간청에 따라 고향 이웃 마을의 나이 많은 처녀와 반강제로 결혼식을 올린다. 1924년의 일이다.

이듬해에 개성의 송도고보에 입학하지만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어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1926년 11월에 퇴학당한다. 이재유는 인천을 거쳐 동경으로 떠난다. 

 

일본에서 노동을 하는 한편 공부를 한 이재유는 두 번 낙방한 끝에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역시 석 달 만에 학비가 없어 그만둔 후에 동경대학교 신인회가 주최하는 노동 야학에 다닌다. 사토 마나부, 후쿠모토 가쓰오 같은 유명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직접 사회주의 강연을 듣는 한편 '전국무산자평의회' 같은 일본인 노동조합에도 가입해 집회와 교육에 참석하여 활동한다. 이러한 활동이 인정되어 얼마 뒤에는 좌우익 진보 지식인의 총집결체인 '신간회' 동경지회 위원으로 피선되고, '동경조선노동조합' 같은 몇 단체의 중요한 핵심 인물로 추대된다. 이때부터 이재유는 경찰서를 내 집 처럼 드나드는 인물이 되었는데 삼 년 동안 일본 경찰에 일흔 번이나 연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그가 송도고보에 들어간 1926년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와해와 재건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1928년 네 번째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그 하부 조직으로 일본총국이 세워졌을 때 이재유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의 선전부장을 맡게 된다. 이 일로 검거가 반복되다가 급기야 경성으로 압송되기에 이른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재유는 그곳에서 김삼룡과 이현상을 만나 사귀게 된다. 이재유는 이들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한다. 

 

김삼룡은 소탈한 성품을 가진 대중조직가 스타일로 해방 후에는 남로당의 실질적 남한 총책임자로 일하였다. 전향한 남로당원의 제보로 은신처가 발각되어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함경도 지역의 전설적인 운동가 이주하와 함께 전쟁 발발 직후 처형 당한다. 

이현상은 고지식한 성격에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는데 혁명에 관계되지 않으면 농담조차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해방 후 지리산 빨치산 총대장으로 활약했는데 그가 이끈 부대가 바로 '남부군'이다. 북한은 남한과 휴전협상에 들어가면서 이현상의 '남부군'을 매우 껄끄러워했고 그런 이유로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국군의 매복에 걸려 총에 맞아 죽는다.

 

한편 동덕여고 출신의 자생적 운동가들이 이재유를 찾아오는데 이관술, 이순금, 박진홍, 이효정이 그들이다.이관술은 동덕여고 교사로 원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에 순응하고 변절하는 과정을 지켜본 후 한계를 느껴 사회주의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사심없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선택하는 성향이었기 때문에 화려한 면은 없었다. 그래서 일본경찰들은 이관술이 마지못해 이재유에 동조한다고 보았으나 이재유 검거 후에도 이관술은 '경성꼼그룹'을 결성해 '경성트로이카'의 활동을 계승한다. 후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조작에 휘말려 달러를 위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다.

이순금은 이재유의 이복동생으로 활달하고 의리있는 성격이다. 감옥에서 운동을 하려면 이재유에게 가라는 말을 듣고 친구들을 이재유에게 소개시킨다. 한때 이재유의 아지트키퍼를 하는 짧은 기간 동안 이재유와 동거를 하는데 이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순금과 박진홍, 이재유를 삼각관계라 보도하며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한다. 김삼룡에게 연정을 느껴 그와 동거하기도 했고 경성꼼그룹이 해체된 후에는 박헌영과 함께 광주로 잠적해 그의 연락책을 맡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월북 후에 박헌영이 미제국주의 첩자로 몰려 사형을 당하는데 그 증인으로 이순금이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순금이 정확히 어떤 증언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순금이 살아남아서 요직을 꿰찬 것으로 보아 박헌영에 불리한 진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진홍은 좌우익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는 재원이었다. 문학에 소질이 있었으나 조국의 현실 앞에서 한가롭게 문학을 할 수는 없다며 사회주의 활동에 투신했는데 후에 이재유와 사랑에 빠져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박진홍은 임신한 상태에서 검거되어 고문을 받다가 감옥에서 아이를 출산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이는 일찍 죽고 만다. 이재유를 끝까지 지키다가 그가 옥사하자 김태준과 함께 연안으로 떠나 항일무장독립투쟁을 준비한다. 해방 후 남한에 들어온 뒤 김태준이 검거되자 월북하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이재유는 일본인 공산주의자로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미야케와도 교분을 쌓는다. 경찰에 쫓겨 그의 집에 은신하게 되었을 때 미야케는 자신의 집에 지하 토굴을 파고 이재유를 숨겨 주었고, 경찰에 검거된 뒤에는 하루 동안 은신처를 발설하지 않고 고문을 버틴다. 

 

이재유의 '경성 트로이카'는 대중적인 토대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전위를 조직하려는 분파와는 종종 충돌이 있었다. 또한 국제선과도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정태식은 이재유를 '분파주의자'로 낙인 찍고 그가 제안하는 '투쟁을 통한 자연스러운 통합'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경성 트로이카' 맴버들이 저마다의 강인한 의지와 활동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일정하게 펼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갖은 검거와 구속으로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이 함께 활동한 시기는 거의 없었고, 이관술과 이순금, 박진홍 등도 감옥과 바깥을 교대로 드나드는 식이었기 때문에 정세를 분석하고 통일된 강령 하에 행동하기란 상당히 어려웠다. 이재유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고무받아 NPN의 발간을 지향하며 팸플릿을 유포하고 이를 통해 조직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발간은 3회에 그치고 말았다. 

 

1936년 12월 4일 체포된 이재유는 6년의 형량을 언도받고 복역하였으나 예비검속제도 때문에 출소하지 못하고 1944년에 옥사한다. 폐결핵과 각기병 때문이었다. 

 

이재유는 해외에서 학습받은 사회주의 사상으로 국내에 돌아와 학자연하는 활동가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들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정세가 불리하고 탄압이 거세진다고 해서 해외로 망명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의 대중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는 국제선과의 연대도 형식적인 통합이어서는 안되고 '투쟁을 통한 연대'의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경성 트로이카>는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안재성이 우연히 이효정과 끝이 닿아 시작된 소설로 <일제하노동운동사>, <이재유 연구> 등의 저서를 집필한 김경일 교수의 도움을 받아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를 중심으로 한 혁명가들의 운동과 사랑을 소설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비전과 전망을 내려놓은 작가는 어쩐지 흔들린다. 흔들리는 작가는 이재유를 부여잡고 집요하게 파고들기를 저어한다. 그래서 이재유는 소설 속에서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되, 그의 사상의 요체는 무엇이고 활동 양상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 점에서는 김삼룡과 이현상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활동은 권두에 사진에 부연된 설명이 거의 전부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88519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