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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마르시아스 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0월
평점 :
품절
<떨림>은 마르시아스 심으로 창씨개명한 심상대가 섹스를 소재로 엮어낸 여덟 편의 연작 소설집이다. 마르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로 아테네가 버린 피리를 얻어 일가를 이룬 후 아폴로에게 도전했다가 패하여 가죽이 벗겨진다. 심상대가 마르시아스라는 이름을 취한 후 공공연히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을 미(美)와 예술의 담지자로 자처하는 사뭇 도도한 행태라 하겠다.
연작소설 <떨림>은 작가가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될 화자를 내세우는데 사드에 비견될만한 이 난봉꾼이 화장실 벽 낙서 수준의 개연성으로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아름다움이라든가 떨림, 또는 젊은 날에 느꼈던 까닭 모를 울증에 대해 '썰'을 푸는 것이다. 그 '썰'이 꽤나 독자의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바가 있어 소설은 술술 읽히고 심미주의자를 자처하는 작가의 탐미적 성향이 사춘기적 감수성에 어필하는 바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탐미적 성향은 오스카 와일드 이래 새로운 것이 아니다. 거칠고 순발력 있는 입담 속에 숨겨진 이야기가 사실은 화장실 낙서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 발현된 그저그런 '코사지'에 불과하다는 혐의는 못내 지울 수가 없는 것은 어찌된 이유인가.
소설의 화자는 심상대의 분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강원도에서 반항기 어린 학창 생활을 보내며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주인공이 상황에 떠밀려 일시 화류계에 몸담다가 군대에 다녀와, 중간 생략, 그리하여 소설가가 된 주인공은 결혼을 하는데 결혼의 그 폭력적인 속성을 견디지 못하여 다섯살 난 아이가 있지만 이혼하였고, 때때로 대학강의나 문화원 창작강의를 나가기도 하며 목하 여자를 '따먹거나 따먹히거나' 하고 있다.
그가 '따먹거나 따먹히거나' 하는 상대는 미성년자 자매일 때도 있고 육십세가 넘는 고상한 유부녀일 때도 있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그가 '따먹거나 따먹힌' 여자들과의 관계를 나름의 진정성으로 꾸려 나간다는 사실과 그 속에서 미추의 전연 새로운 기준을 발견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절름발이 여자와 관계를 맺거나 매독에 걸려 머리가 모두 빠져버린 친구 어머니의 눈을 보다가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느끼는 것이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여성과 관계 맺는 것과 동일한 층위에서 다루어진다.
이 대목에서 이제 심상대가 엮어낸 <떨림>이 사실 화장실 낙서와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적절히 리믹스한 '독자적' 상부구조로서의 도색소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심상대가 추구하는 미(美)와 예술관은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런 매력 없이 타락한 인물이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아름다운 사물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이 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아름다운 사물을 오직 '아름다움'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은 잘 썼든지, 잘못 썼든지 둘 중 하나다. 단지 그 뿐이다.
심상대는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모름지기 남녀간의 성애에서 찾아야 한다. 여덟 편의 성애 이야기 속에서 관계 맺기의 개연성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아름다움이 나에게는 마광수 식의 '나는 OOO가 좋다'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발문에서 심상대를 우리 시대의 귀한 재능이라고 전제한 뒤, 광주의 처절한 기억과 그 피비린내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던 사람들(항상 더 급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만 마음을 내주었던)에 밀려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환상과 현실 사이의 얇은 막을 회칼로 저미는 것처럼 파고 들어가는 문체와 체험과 기억과 문학이 맺는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탁월한 탐구를 풀어내는 업적을 추켜세운다. 과연 온당한 한탄인가.
심상대는 미성년자를 '따먹기' 전에 여자에게 남자 성기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라고 부르게 한다. 장정일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시위 도중 운동권이 여자와 관계를 맺는 상황을 설정한 후 운동권의 입에서 파쇼 타토를 외치도록 한다. 자신들이 참여하지 못한 진보의 흐름에 침을 뱉고 비아냥 거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독학자들의 패거리짓기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과 비겁한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나는 '여전히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라고 외치는 리얼리즘 지상론자는 아니다. 그러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며 현실에 환상을 덧칠하고 마침내 매니큐어 칠한 여자의 손톱에서 미를 찾는 부류와는 아직까지도 타협할 수가 없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양심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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