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귀도 살인사건
전건우 지음 / 북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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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귀도는 조선시대 귀양지로 이렇다 할 물산이 나지 않는 척박한 섬이었다. 이 섬에 선비 하나가 역모죄로 귀양을 왔다. 선비는 뜻밖에도 섬에 애정을 갖고 생활했다. 그는 섬의 부를 늘리고 백성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산에서 물길을 끌어오는 한편, 염전을 일구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비에게 감읍하며 고마와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의금부 도사가 들이닥쳤다. 도사는 선비가 또 다시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도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직접 선비를 처형하여 역모와 관계 없음을 증명하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주저했지만 박가라는 자가 나섰다. 선비는 박가의 도끼질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리고 "불귀도에 발을 들여놓은 자 피를 토하고 죽으리라!"는 저주를 남긴다.

그 불귀도에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 외지인들이 방문한다. 동생 유현이 섬노예로 끌려갔을 거라 짐작하여 찾으러 나선 유선, 섬 생활을 취재한다고 했지만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 보이는 PD 정우와 리포터 현정, 낚시꾼이라고 자처하는 사내 셋, 그리고 열혈순경 동주와 세상에 닳고 닳은 그의 상관 만철.

태풍이 거세져 섬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직후부터 시체가 발견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발견된 여성의 시체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어쩐지 쉬쉬하는 태도를 보인다. 순경인 동주는 사건을 정식으로 처리하려 하지만 이장을 위시한 마을 사람들과 상급자 만철은 사건을 덮으려 한다.

하지만 이후 마을 원로 두만의 석연치 않은 자살, 제초제 메소밀에 의한 대량 살해 시도와 일부 주민의 사망, 동네 건달 강두의 죽음 등 사건이 잇따르자 마을 사람들은 그 옛날 불귀도에서 한을 품고 죽어간 선비가 산발귀가 되어 모든 마을 주민을 몰살하려는 것이라며 패닉에 빠진다.

고립된 섬에서 여전히 계급사회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섬 사람들의 비밀은 무엇일까? 사람이 죽어갈 때마다 옛날 그 양반의 죽음과 산발귀를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25년 전 마을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권가 가족의 이야기가 수면에 떠오르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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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건우는 2008년 <선잠>으로 데뷔한 후 공포, 미스터리 장르 소설을 쉴 새 없이 생산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익숙하지만 너무 재미있어 끝까지 읽게 되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집중" 하고 있다고 밝히는데, 장르 소설가로서 자림매김이 확고하다.

<불귀도 살인사건> 역시 요코미조 세이시의 아류작이라 해도 할 말 없을 정도의 익숙한 컨셉과 전개를 보여준다.

범인은 25년 전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던 전가의 아들로 현재는 PD가 된 정우이다. 마을 사람들이 대마초를 재배하는 것에 반대하다 부모가 비참하게 살해당한 데 대한 복수극인데, 소소한 반전이라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유선의 동생을 사주하여 물에 메소밀을 타게 했다는 점 정도다.

오디오북으로 장거리 운전할 때 시간 떼우기에 괜찮을 법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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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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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마쓰 에이스케는 문학평론가로 1969년생이다. 게이오대학 불문학과를 졸했고, <오키 야스오와 그 시대, 구도의 문학>으로 제14회 미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는 2015년 1월 8일부터 6월 25일까지 매주 목요일 니혼게이자신문 석간에 25회에 걸쳐 게재된 글들이다.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과 소회, 시와 소설로 부터 건져낸 슬픔에 관한 상념 등을 따뜻한 필치로 써내려간 이 에세이는 <무소유>, 이승우의 <생의 이면> 등을 일본에 소개한 김순희가 번역했다.

우리가 말을 하려는 것은 전하고 싶은 뭔가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온몸에 충만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말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9p)

인생에는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그러므로 슬퍼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12p)

인생의 기로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강렬했다 하더라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나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19p)

무언가에 대해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마음속에 무지의 방을 만들어야 한다.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탐구를 계속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29p)

진정으로 타인과 공감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혼자라고 느꼈을 때 비로소 타인이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38p)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답변에 안주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진정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47p)

태연한 듯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헤아릴 수 없는 비통함이 숨겨져 있다..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오히려 눈물을 흘리면서 울지 않을지도 모른다...슬픔을 겪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58p)

인생의 의미는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소박한 말이지만 우리는 매번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머리로만 생각하기에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65p)

읽는다는 것은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글로된 말은 언제나 읽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생명을 부여받기 때문이다...읽는다는 것은 말을 탄생시키는 일이다.(94p)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헤어지는 내 영혼보다

나 없이 침상에서 잠들어야 할 그대가 더 슬프다(106p, 고금와카집 中)

* 병이 든 아내가 남편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죽는 자신보다, 남겨질 남편의 슬픔을 걱정한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게 아니다. 반대로 글을 쓰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발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글자로 옮기는 행위라기보다 쓰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인생의 참뜻'을 인식하게 되는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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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점의 집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5
엘러리 퀸 지음, 현재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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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필라델피아 중간지점에 있는 트렌턴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한 사나이가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의 이름은 조셉 윌슨, 직업은 외판원이었다. 남자의 아내는 루시 윌슨이었고, 그녀의 오빠 윌리엄 에인절은 변호사이자 엘러리 퀸의 친구였다.

그런데 실의에 빠진 이들 앞에 뉴욕에서 날아온 일단의 무리들이 뜻밖의 주장을 펼친다. 살해된 남자의 이름은 조셉 켄트 김볼이고, 제시카 보든 김볼의 남편이라는 것이다. 보든 가문은 대단히 부유한 집안이었고, 상원의원 등 유력한 사람들과 친밀했다.

결혼증명서를 따져보니 남자는 루시 윌슨과 먼저 결혼했고, 나중에야 제시카 보든과 결혼한 것으로 밝혀졌다. 첫 번째 결혼은 사랑에 의해서, 두 번째 결혼은 야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결국 살해된 사나이는 필라델피아에서는 조셉 윌슨이라는 이름으로 허름한 외판원의 삶을 살고, 뉴욕에서는 조셉 켄트 김볼이라는 이름으로 부유한 상류층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필라델피아와 뉴욕의 중간지점인 트렌턴의 집은 각각의 삶으로 변신하기 위한 일종의 아지트였던 셈.

현장 검증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밝혀진다.

  1. 조셉 윌슨(=조셉 켄트 김볼)은 최근 100만 달러의 생명보험 수익자를 뉴욕의 아내 제시카 보든에서 필라델피아의 아내 루시 윌슨으로 변경했다.

  2. 보험수익자를 변경한 사실은 내셔널생명보험회사의 중역이자 제시카 보든을 짝사랑하는 그로브너 핀치라는 사람만 알고 있다.(그로브너 핀치의 주장)

  3. 보험 수익자 변경 후 조셉 윌슨(=조셉 켄트 김볼)은 자신의 중혼 사실을 필라델피아쪽 처남인 윌리엄 에인절과 뉴욕쪽 의붓딸인 앤드레 김볼에게 고백하려고 마음 먹었다. 이에 전보를 보내 트렌턴의 오두막으로 21시에 와달라고 요청한다.

  4. 먼저 도착한 것은 앤드레 김볼이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 드라이브를 갔다가 다시 오두막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때 쓰러져 있는 조셉 윌슨(=조셉 켄트 김볼)을 발견하고 사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했다가 깨어난 뒤 부랴부랴 차를 타고 현장을 빠져나간다.

  5. 앤드레 김볼이 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순간 윌리엄 에인절이 오두막에 도착한다. 그 역시 쓰러져 있는 조셉 윌슨(=조셉 켄트 김볼)을 발견하는데 그는 거의 숨이 끊어지려는 상태였다. 그는 범인이 베일을 쓴 여자라고 말한다.

  6. 범행에 사용한 흉기는 페이퍼나이프였는데, 이 페이퍼 나이프 끝에는 불에 탄 코르크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펜이 없어 글씨를 쓰기 위함으로 추정. 나중에 앤드레를 협박한 쪽지에 글씨를 썼던 것으로 밝혀짐) 아울러, 페이퍼 나이프에서는 뉴욕의 아내 루시 윌슨의 지문이 묻어 있었다. 루시 윌슨은 그 페이퍼 나이프는 남편과 자신이 함께 고른 선물로 오빠 윌리엄의 생일 날 주기로 했다고 주장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7. 재떨이에는 성냥 스무개가 남아있었는데, 담배꽁초나 담배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중에 앤드레가 밝힌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6개, 두번째는 20개였다고 함.

  8. 이런저런 목격자 진술과 조사 끝에 범인이 탔던 것으로 여겨지는 자동차는 루시 윌슨의 것이었고, 그녀는 알리바이를 댈 수가 없었다. 루시는 자동차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 역시 받아들여 지지 않음.

이상의 사실을 바탕으로 재판이 이뤄지는데 윌리엄 에인절이 혼신의 힘을 다해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루시 윌슨으로 확정되고 만다. 윌리엄 에인절은 앤드레 김볼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그녀가 무언가 숨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녀 역시 범인일 수 있다는 뉘앙스까지 담아 증인 신문을 진행한다. 하지만 배심원 중 두어 명이 뉴욕쪽에 매수된 것인지 그들의 강력한 주장과 설득으로 판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과연 엘러리 퀸은 루시 윌슨을 가리키고 있는 이 모든 증거들을 뒤집고 진범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다음은 엘러리 퀸은 이 사건에서 누가 살해되었는가? 다시 말해 범인은 뉴욕의 조셉 켄트 김볼을 살해한 것인가, 아니면 필라델피아의 조셉 윌슨을 살해한 것인가가 사건해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성냥개비가 6개였다가 20개가 된 사실 등 핵심 단서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추리를 내놓는다.

  1. 범인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다. (루즈를 펜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음에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함)

  2. 범인은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성냥을 6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꽁초가 없음)

  3. 범인은 성냥갑을 챙긴 것으로 보아 거기에 범인을 특정하는 사항이 담겨 있었을 것.(20개를 사용했으므로 성냥갑은 비어있어서 챙길 필요가 없음)

  4. 범인은 김볼과 윌슨 부인 두 사람 모두에게 범죄 동기를 가지고 있는 자(중간지점에서 살해했다는 점에 비춰볼 때)

  5. 범인은 필기구가 없었거나, 필기구가 자신과 연관될 특징이 있었을 것(굳이 힘들여 코르크를 때워 글씨를 썼음)

  6. 범인은 뉴욕쪽에 속할 것(루시를 모함했으므로)

  7. 범인은 앤드레에게 호의를 갖고 있음(그녀를 위협하기만 함)

8. 범인은 오른손잡이

9. 범인은 김볼이 보험금 수익자를 바꾼 사실을 알고 있음(범인의 중혼 사실을 눈치챘다는 사실도 중요)

이상의 논리적 귀결로 진범은 그로브너 핀치였음.

엘러리 퀸은 이웃사촌 이었던 프레드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의 공동 필명이고, 소설 속 탐정의 이름이기도 하다. 독자에의 도전(막간의 도전)을 자주 활용하는 등 공정한 게임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도전'이 삽인된 마지막 작품이다.

본작의 원제는 Halfway House(1936)이며, 중간의 집(시그마 북스), 도중의 집(자유추리문고)으로도 번역되었다. 동서문화사판은 1977년 초판 발행되었는데 이 판본에는 J.J.맥의 서문이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원제가 '스웨덴 성냥의 비밀'과 같은 국명 시리즈가 될 수도 있었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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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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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법철학>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고 했다. 15년 남짓이 흐른 뒤 <닥치고 정치>를 읽고 있으니, 충분히 황혼이라 할 만하다.

김어준 자신은 '무학(無學)', '절독(絶讀)'이라 하지만, 사실 그의 의견은 수준 높은 공부에 기반하고 있다. 그의 거침없는 발언들은 전혀 근본 없는 이야기가 아닐 뿐더러, 매우 예리하고 날카롭기 까지 하다.

읽으면서 몇 가지 인상 깊었던 구절들.

공포에 대처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바로 좌, 우다. 우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이해한다.(36p) 그래서 우의 엔진은 공포(38p) 우는 지가 다 먹고 남은 것들, 그 찌꺼기, 자투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놓고, 거기서부터 경제라고 얘기(41p) 그런 우를 유일하게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자존심... 우파가 자존심이 없으면... 겁먹은 동물.(42p) 친일도, 친미도, 결국 자존심 없는 우가, 동물 주제에, 인간 우파인 척하는 거(43p)

좌는 그 공포를 잘게 나눠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공포의 몫을 줄여서 해결하려 하는 거라고. 문제는 밀림 그 자체에 있는 거니까. 우가 본능적 반응이라면, 좌는 노리적 대처야... 이 대목에서 평등이 아주 중요한 가치로 등장... 평등이 깨지면 기본적인 결속 자체가 안 되는 거니까. 우가 쎈 놈은 더 가져가도 된다는, 질서와 위계를 당연시하는 수직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좌는 누구나 같은 조건에선 같은 정도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44p)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는 인간의 태도과 가치관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인데, 김어준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우생론'으로 읽힐 위험마저 있는 위와 같은 주장을 한다. 직관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다.

또 하나의 작전이 바로 여론조사 선전전이지. 실제 투표 결과와 여론조사 결과의 격차가 어마어마했잖아... 보수의 작전이야 큰 격차를 기정사실로 확대재생산해 진보적 유권자들이 아예 투표장에 나오지도 않게 만들려고 한 거지만, 그 수작에 여론조사 기관들이 최소한 수동적 공범이 되었다.(175p)

'황혼녘'에 읽는 이 문구는 얼마나 통찰력 있는 분석인가.

진보 정당의 방식은... 처음 만난 상대 앞에 재무 계획서와 신혼방 설계도를 딱 꺼내놔...그런 다음 건조한 표정으로 바로 결혼하재. 만약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속물이라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에 넘어간 방증...그걸 당한 상대는, 떠나버려. 남겨진 진보 군은 자기 프로포즈가 실패한 요인을... 입지 조건과 대출 조건의 우수성을 다른 경쟁자들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

더 슬픈건, 보수군이...진보 군 계획서와 설계도를 집어 와서 표지만 엄청 화려하게 바꿔 국민 양을 찾아가 계획서를 다시 내놓는다는 거지. 그 내용은 읽어주지도 않아. 장미 한 송이 안겨주고 스테이크를 시키지. 그렇게 연애 시작. 그런데 레스토랑에서 나올 때에야 국민 양은 알게 되지. 그 장미는 플라스틱이고 그 밥값은 자기가 내는 거였다는 걸.(222-223p)

진보정당의 선명성 경쟁에 관한 콩트가 촌철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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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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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전날 헤르만 괴링의 손톱과 발톱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의 손발톱은 진통제 디히드로코데인 중독 때문에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작가는 이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하는 식으로 하인리히 뵐의 페르비틴(메스암페타민) 중독을 걸터듬더니, 히틀러가 애견 블론디에게 시안화칼륨 약효를 시험한 뒤 자신도 한입에 털어넣고 자살한 사건을 들먹인다.

그렇다면 나치가 강제 수용소에서 사용한, 독가스의 전신인 치클론A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가스들이 아우슈비츠의 벽돌을 파란색으로 물들인 이유도 따져봐야한다. 시안화물은 1782년에 최초의 현대적 합성 안료 프러시안블루에서 분리된 부산물이라서 그렇다.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이 천사의 로브와 성모 마리아의 장옷을 묘사할 때 쓴 파란색 안료는 울트라마린이었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 코츠카강 계곡의 동굴에서 캐낸 청금석을 갈아 만들었기에 무척이나 비쌌다. 그러다 18세기에 스위스 안료·염료 제조업자 요한 야코프 디스바흐가 코치닐깍지벌레 암컷 수백만 마리를 빻아 만들던 루비레드를 재현하려는 과정에서 우연히 코발트블루가 발견되어 이를 대체했다. 그의 조수인 젊은 연금술사 요한 콘라드 디펠이 이에 관여했다.

디펠은 생명의 영약을 제조하려 했으나 그 약의 효과는 살충제로 유효했을 뿐이고, 독일군이 패튼 부대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우물에 들이부어 그 쓰임새가 적확히 증명되었다. 디펠의 영약에 들어있던 성분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파도 아래>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군의 제복에서도 빛나게 된 것이다.

마침내 1782년 칼 빌헬름 셸리는 프러시안블루를 휘저어 현대의 가장 강력한 독약을 만들어 냈고, 이 새로운 화합물을 '프러시안산'으로 명명한다. 비소와 달리 시안화물은 효과가 썩 좋았고, 수많은 암살자에게 그 속효성이 사랑 받았다.

앨런 튜링 역시 시안화물을 애호했는데, 동성애 죄목으로 영국 정부에 의해 강제로 화학적 거세를 당해 가슴이 커지는 부작용을 겪은 뒤 시안화물을 주입한 사과를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튜링은 생전에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종종 가스 마스크를 썼다. 그런데 이 가스 마스크는 독일군이 영국에 독가스탄을 떨어드릴 것을 우려해 제작된 것이었다. 각국의 사린 가스, 겨자 가스, 염소 가스에 대한 공포는 2차세계대전 때 가스 공격 금지 조치를 모두가 받아들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상 최초의 가스 공격은 벨기에 소도시 이프르 근처에서 벌어졌다. 1915년 4월 22일 거대한 초록빛 구름이 쓸고 지나가자 5,000명이 몰살 당했다. 이 공격을 감독한 인물이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이 공격 직후 그의 아내는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한다. 그리고 1918년 휴전 이후 연합군은 프리츠 하버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했다. 그는 전쟁 전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함으로서 세계 대기근을 간접적으로 막은 공로가 있었다. 당시 언론 표현을 빌리자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버는 후에 치클론의 발견에도 관여했는데 자신의 활약으로 탄생한 살충제를 가지고서 나치가 몇 년 뒤 자신의 이복 여동생, 매부, 조카들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할 것임은 알지 못했다.

후에 그가 죽은 뒤 발견된 소지품에는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서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에 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기 중에서 질소를 뽑아내는 자신의 방법이 지구의 자연적 평형을 교란하는 바람에 식물이 세계를 차지할까봐 두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작가는 <프러시안 블루>에 이어 예의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를 계속한다. 카를 슈바르츠실트, 모치즈키 신이치, 그로텐디크, 에르빈 슈뢰딩거,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등 현대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중요 발견과 그 발견들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따위를 검증된 역사와 그럴법한 추측을 섞어가며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들이 꽤나 기이하면서도 중독적이라 처음엔 '에이 정말일까?' 하면서 머뭇머뭇 하다 어느 순간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하는 식으로 빨려들게 된다.

이 작품은 1980년 네델란드 출신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세 번째 작품으로, 발표된 이듬해인 2021년 부커상 최종심에 올랐다.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한 외로운 수학 천재 이야기>와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에 이어 과학에 관한 소설 추천 리스트에 올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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