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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소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전날 헤르만 괴링의 손톱과 발톱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의 손발톱은 진통제 디히드로코데인 중독 때문에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작가는 이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하는 식으로 하인리히 뵐의 페르비틴(메스암페타민) 중독을 걸터듬더니, 히틀러가 애견 블론디에게 시안화칼륨 약효를 시험한 뒤 자신도 한입에 털어넣고 자살한 사건을 들먹인다.
그렇다면 나치가 강제 수용소에서 사용한, 독가스의 전신인 치클론A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가스들이 아우슈비츠의 벽돌을 파란색으로 물들인 이유도 따져봐야한다. 시안화물은 1782년에 최초의 현대적 합성 안료 프러시안블루에서 분리된 부산물이라서 그렇다.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이 천사의 로브와 성모 마리아의 장옷을 묘사할 때 쓴 파란색 안료는 울트라마린이었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 코츠카강 계곡의 동굴에서 캐낸 청금석을 갈아 만들었기에 무척이나 비쌌다. 그러다 18세기에 스위스 안료·염료 제조업자 요한 야코프 디스바흐가 코치닐깍지벌레 암컷 수백만 마리를 빻아 만들던 루비레드를 재현하려는 과정에서 우연히 코발트블루가 발견되어 이를 대체했다. 그의 조수인 젊은 연금술사 요한 콘라드 디펠이 이에 관여했다.
디펠은 생명의 영약을 제조하려 했으나 그 약의 효과는 살충제로 유효했을 뿐이고, 독일군이 패튼 부대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우물에 들이부어 그 쓰임새가 적확히 증명되었다. 디펠의 영약에 들어있던 성분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파도 아래>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군의 제복에서도 빛나게 된 것이다.
마침내 1782년 칼 빌헬름 셸리는 프러시안블루를 휘저어 현대의 가장 강력한 독약을 만들어 냈고, 이 새로운 화합물을 '프러시안산'으로 명명한다. 비소와 달리 시안화물은 효과가 썩 좋았고, 수많은 암살자에게 그 속효성이 사랑 받았다.
앨런 튜링 역시 시안화물을 애호했는데, 동성애 죄목으로 영국 정부에 의해 강제로 화학적 거세를 당해 가슴이 커지는 부작용을 겪은 뒤 시안화물을 주입한 사과를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튜링은 생전에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종종 가스 마스크를 썼다. 그런데 이 가스 마스크는 독일군이 영국에 독가스탄을 떨어드릴 것을 우려해 제작된 것이었다. 각국의 사린 가스, 겨자 가스, 염소 가스에 대한 공포는 2차세계대전 때 가스 공격 금지 조치를 모두가 받아들인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상 최초의 가스 공격은 벨기에 소도시 이프르 근처에서 벌어졌다. 1915년 4월 22일 거대한 초록빛 구름이 쓸고 지나가자 5,000명이 몰살 당했다. 이 공격을 감독한 인물이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이 공격 직후 그의 아내는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한다. 그리고 1918년 휴전 이후 연합군은 프리츠 하버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했다. 그는 전쟁 전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는데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함으로서 세계 대기근을 간접적으로 막은 공로가 있었다. 당시 언론 표현을 빌리자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버는 후에 치클론의 발견에도 관여했는데 자신의 활약으로 탄생한 살충제를 가지고서 나치가 몇 년 뒤 자신의 이복 여동생, 매부, 조카들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할 것임은 알지 못했다.
후에 그가 죽은 뒤 발견된 소지품에는 아내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서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에 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기 중에서 질소를 뽑아내는 자신의 방법이 지구의 자연적 평형을 교란하는 바람에 식물이 세계를 차지할까봐 두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작가는 <프러시안 블루>에 이어 예의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를 계속한다. 카를 슈바르츠실트, 모치즈키 신이치, 그로텐디크, 에르빈 슈뢰딩거,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등 현대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중요 발견과 그 발견들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따위를 검증된 역사와 그럴법한 추측을 섞어가며 떠들어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들이 꽤나 기이하면서도 중독적이라 처음엔 '에이 정말일까?' 하면서 머뭇머뭇 하다 어느 순간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하는 식으로 빨려들게 된다.
이 작품은 1980년 네델란드 출신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세 번째 작품으로, 발표된 이듬해인 2021년 부커상 최종심에 올랐다.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한 외로운 수학 천재 이야기>와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에 이어 과학에 관한 소설 추천 리스트에 올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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