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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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공기와 물이 오염되고, 온난화가 가속화 되어 쓰나미가 발생한 지구. 한번에 수백만명을 죽일 수 있는 원자폭탄이 언제 발사될 지 모르는 상태였고, 광신적인 종교 지도자는 '누군가를 죽이면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해 지구 곳곳에서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지구는 자정작용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이런 시기에 발명가이자 과학자인 이브 크라메르가 화학 연료 대신 빛 에너지를 사용하는 태양 범선 프로젝트를 생각해 낸다. 억만장자 가브리엘 맥 나마라가 돈을 대고, 세계 단독 요트 일주 경기 2회 연속 우승자 엘리자베트 말로리가 키를 잡는다.

프로젝트 이름은 <마지막 희망 Dernier Espoir>으로 명명되었는데, 약 2광년(약 20조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14만 4천명의 사람을 태우고 천년 동안 여행해 이주하는 계획이었다.

비폭력적인 사람들을 선발해 지구를 탈출하는 계획은 각국의 반대를 불러 온다. 급기야 군대가 급파되어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려던 순간, 프로젝트 발기인인 이브와 멕나마라 등은 부족한 대로 출발을 결정한다.

우주선을 회전시켜 인공 중력을 만들고 지구와 최대한 유사한 환경을 만든 '파피용(나비, 나방)'호는 처음엔 순조로운 항해를 이어갔으나 유성의 충돌로 인한 돛의 손상,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병에 걸린 자들의 반란, 치정살인과 같은 범죄의 발생과 처리를 둘러싼 이견, 광신적인 지도자의 발생 등 지구에서와 거의 유사한 폐단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등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예정된 시간보다 200년 이상 지연된 시점에 살아남은 사람은 여성 1명과 남성 5명에 불과했다.

새로운 행성이 발견되었지만 모두 비행선에 탈 수는 없었다. 공간과 산소가 한정되었기에 엘리자베트-15(동명이인인 경우 숫자를 붙임)와 아드리엥-18이 착륙하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행성에 내린 둘은 그곳에 공룡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공룡들은 둘이 가지고 있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차츰 멸종의 길로 접어든다.

둘은 가지고 온 식물과 동물 표본을 옮겨심거나 부화시켜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고, 인류의 번식을 위해서도 노력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2년간 임신이 되지 않았고 사소한 다툼 끝에 엘리자베트가 집을 나가 동굴로 가버린다. 3개월 뒤 아드리엥-18이 엘리자베트-15를 찾아가 화해를 청하려 했으나 그녀는 뱀에 물려 죽은 상태였다.

외로움에 넋을 놓고 있던 아드리엥-18이 수정란이 있었음을 생각해낸다. 하지만 신선한 골수가 부족해 세포분열이 되지 않자 자신의 갈비뼈 일부를 절개해 마침내 에야라는 여성을 탄생시킨다.

에야는 청력에 문제가 있어 이름들을 헤깔렸는데 반란을 일으킨 사틴을 '사탄'으로, 아드리엥-18을 '아담'으로, 자신의 이름 에아를 '이브'로 발음하곤 했다.

어찌보면 파피용 호는 이 거대한 우주에서 정자의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새로운 행성이 난자의 역할을 한 것이고. 둘의 이야기가 어쩌면 새로운 창세기 이야기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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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과학적 설정에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하지만 작가의 순진한 세계관과 정세 인식 탓에 소설의 기본 전제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잘 안된다.

천재 과학자, 억만장자, 스포츠 스타가 모여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과정도 억지스럽지만, '탈출만이 희망'이라는 논리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 설정, 즉 한 행성에서 출발한 우주선(정자)가 행성(난자)와 만나 우주적 의미의 수정이 이루어지고, 거기서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역사가 시작한다는 설정을 거꾸로 짜맞춰가다 보니 그렇게 된 듯 하다. 소설이 결말부의 아담과 이브, 뱀, 갈비뼈로 여성을 만드는 대목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나긴 중언부언 같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류츠신의 <삼체> 3부 역시 <파피용>과 같은 우주여행과 우주사회학의 공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데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70783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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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산장 1
고룡 / 뫼(뫼야컴)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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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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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추적(慕容秋荻)은 무림의 사대 세력 가운데 하나인 강남 칠성당의 여식이었다. 그녀는 외모가 아름다웠고, 효성이 깊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탈명십삼검(奪命十三劍) 연십삼(燕十三)을 만나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그 남자는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남자는 모용추적에게 십년을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그것은 허언이었다. 모용추적은 남자의 사생아를 낳아 기르며 원한을 키워갔다.

남자의 정체는 취운봉 옆 녹수호에 있는 신검산장(神劍山莊)의 사효봉이었다. 신검산장의 대청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오래 전 강호의 검객들이 화산논검(華山論劍)을 한 결과 그 명칭을 신검산장에 주었고, 그 후손인 사효봉이 그 이름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정체를 알게된 연십삼은 자신이 그를 당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모용추적은 사효봉의 검법에 있는 단 한 점의 빈틈을 연십삼에게 알려준다.

연십삼은 그 빈틈을 자신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검에 생을 건 사나이로서 그와 대결하고 싶었다.

얼마 후 연십삼이 대결을 위해 신검산장에 이르렀을 때 연십삼은 대결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검산장에는 사효봉의 아버지가 아들의 관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젊은 나이에 급사한 사효봉의 관 앞에서 연십삼은 허탈함을 느꼈고, 더 이상 검을 잡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돌아가는 뱃머리에 열 십자를 새겨 표식을 남긴 뒤 검을 호수에 버린다.(刻舟求劍)

세월이 흐른 뒤... 한가항의 기생집 한대내내의 집에 '쓸모없는 아길'이라는 자가 무전취식 후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멀쩡한 허우대 덕에 한대내내, 소려 같은 갈보에게 유혹받았으나 아길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지 성을 낼 뿐이었다. 기생집에서 얼마간 일하던 아길은 똥을 푸는 일을 하게 된다. 별 것 아닌 일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건달패들은 돈을 뜯어갔다.

아길은 묘족 출신인 노묘자(老苗子)라는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끼니를 이을 수 있었다. 노묘자에게는 아리따운 동생이 있었는데 왜왜(娃娃)라 했다. 왜왜는 며칠 뒤 고기를 사가지고 집에 왔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는 소려였다. 몸을 팔아 겨우 생계를 잇는 이들 가난한 집에서 우애와 슬픔을 느끼던 아길은 건달패 대노판과 그의 수하 죽엽청, 철호 등을 해치우기 위해 다시 검을 잡는다. 그의 정체는 사망한 것으로 위장하고 강호를 떠난 사효봉이었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모용추적, 사효봉과 모용추적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소제, 그리고 검을 버리고 의술을 익혀 단십삼이 된 연십삼이 사효봉의 등장과 함께 천하제일검이 누구인지 가리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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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소야적검>은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삼소야의 검' 인데, 여기서 삼소야는 사효봉이 신검산장의 세번째 아들이라서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작품의 주인공 사효봉은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검을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존재론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기에 검을 버린다.

하지만 묘족 출신의 소박한 사람들인 노묘자와 왜왜에게서 인간적인 정을 느끼고, 그들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오자 다시 검을 집어든다.

결국 검이라는 것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고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깨달음 덕분이었다.

하지만 사효봉의 이런 단순한 깨달음이 자족으로 끝날 수 없었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가만 두지 않는 법. 결국 사효봉은 연십삼과 천하제일검의 칭호를 두고 결전을 하게 된다.

연십삼은 탈명십삼검에서 변화를 주어 십사검을 완성하지만 사효봉은 그의 십사검에서 한번 더 변화한 십오검이 있음을 깨닫는다. 연십삼 역시 대결 직전 십오검의 변화를 깨우치지만 그 십오검은 자신의 목을 찌르고 만다. 연십삼은 의사 단십삼의 신분이었을 때 사효봉을 치료하여 그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에, 이제 십오검으로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십오검은 검의 주인조차 제어할 수 없었고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 했기에 연십삼은 자신의 목을 찌른 것이다.

<절대쌍교>, <초류향>으로 유명한 대만 작가 고룡의 작품이다. 고룡은 무협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유명세에 비해 정식판으로 나온 작품이 드물다. 이 작품도 <신검산장>이라는 이름의 해적판으로 소개된 바 있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다.

<삼소야적검>은 스토리와 대사 위주라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장점이 있지만 입체적인 인물 구성이라든가 배경의 충실한 안배가 부족해 전반적으로 영화 대사집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이유인지 두 번 영화화 되었는데 1977년 작품은 초원이, 2016년 작품은 서극이 감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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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맨
찰스 브랜트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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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디 아이리시맨' 시런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411일 동안 적군을 사살하며 비정한 성격을 갖게 된다. 그는 제대 후 우연히 이탈리아 마피아 러셀 '맥기' 버팔리노를 만나 그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게 된다.

버팔리노는 시런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 그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자신보다 권위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훌륭했기 때문이다. 버팔리노는 시런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고 싶었기에 그를 전미트럭노조 팀스터즈의 위원장 지미 호파에게 소개한다.

'I heard you paint houses'

시런을 소개 받은 지미 호파가 건낸 말이다. '페인트칠을 하는 사람'은 히트맨, 특 살인청부업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부터 시런은 버팔리노의 사람이면서도 지미 호파의 이익을 위해 페인트칠을 시작한다.

호파가 팀스터즈 위원장으로 승승장구하는 시기가 끝이 난다. 그가 재임기간 저질렀던 범죄로 인해 수감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버팔리노와 호파 사이가 틀어진다. 호파는 팀스터즈에 계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지만 이탈리아 마피아들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팔리노는 호파와 마피아들을 중재하고 싶어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버팔리노는 시런에게 페인트칠할 것을 명하고, 시런은 호파를 만나러 간다. 호파를 좋아했고 그의 안전을 바랐음에도, 버팔리노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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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호파는 20세인 1933년에 트럭 노동자 파업을 시작으로 노동조합 관련 일을 시작한 뒤 1957년 전미트럭운송노조인 팀스터즈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71년 까지 14년 동안 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다. 팀스터즈 조합원이 230만명이었고 연금 규모가 왠만한 소국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였으므로 정치권에서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1975년 7월 30일 실종되어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7년 뒤 사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소설은 지미 호파를 살해한 것으로 의심되는 프랭크 '디 아이리시맨' 시런을 인터뷰하고 이야기를 짜맞춰나가는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미 호파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공헌한 것은 바로 기본화물협정을 성사시킨 것이다.

"조합원 모두가 동일한 시급을 받고 동일한 복지혜택과 동일한 연금을 받게 된 거지. 그런데 이 협정의 가장 큰 장점은 딱 한 건의 계약만 협상하면 됐다는 걸 거야."(220p)

단일계약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트럭회사들은 노조를 더 이상 분할 통치할 수 없었고, 레이먼드 코헨 같은 도둑놈들은 결탁 임금 협정을 체결한 대가로 뒷돈을 챙길 수가 없었지.(221p)

산별노조를 만들고 협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한 셈이니 꽤나 진보적인 정책이었음에 틀림 없다. 하지만 이것이 팀스터즈 노조의 관료화를 가속화 시키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전쟁과 폭력은 노동계와 경영진 사이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노동자를 자기들 조합에 끌어들이려고 경쟁하는 라이벌 조합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은 자주 벌어졌다. 서글프게도, 자신들이 속한 조합의 민주적 개혁을 촉구하는 일반 노조원들에게 폭력이 자행되는 일이 잦았다.(132-133p)

강화된 협상력은 강력한 권력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그 권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조합원들의 연금과, 그 연금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대출이었다. 일종의 금융권력이 노동조합 권력과 결합하자 그 양태는 마피아의 그것도 다를 바 없게 된다. 마피아와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역사적 진실의 행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마피아들이 카스트로와 존 F.케네디 암살, 법무부장관 인선, 유력 정치인의 지원을 통한 영향력 확대 등에 관여한 정황을 파고든다.

CIA는 피그스만 침공에 조폭이 개입됐고, 자신들이 작전을 지원했으며,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조폭·CIA 음모가 존재했었다고 처치위원회에 인정하는 충격적인 행보를 취했다. 이 음모의 작전명은 '몽구스 작전'이었다.(190p)

지미는 감옥에서 이미 닉슨을 지지하면서 미첼과 닉슨 선거운동에 현금이 전달되도록 일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야.(278p)

그들은 이 작전 덕에 조 바이든 상원의원이 당선된 거라고 말하지. 공화당원들은 보그스 측이 제작한 삽지들이 신문에 삽입돼 배달됐다면 조 바이든의 평판이 무척 나빠졌을 거라고 특히 더 열을 올려 얘기하고는 해.(317p)

나는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말이야, 그게 댈러스에서 케네디를 저격할 때 쓴 고성능 라이플이라는 걸 알게 됐어.(339p)

아이리시맨은 끝내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는문제 소지가 있는 인터뷰는 일절 응하지 않았고 오로지 르포르타주 형식의 소설 소재 제공 차원에서만 입을 열었다.

조 바이든은 후에 미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팀스터즈 노조 연금 지원을 위해 47조 원을 지원한다. 이것이 과거 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밝혀진 바는 없다.

이 작품은 후에 마틴 스코세이지가 영화로 만드는데 출연진이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로 화려하다. 그들의 젊은 시절은 CG 처리 되어 있고 꽤 그럴싸하지만 굽은 어깨와 허리를 완벽하게 숨기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63859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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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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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생(來生)은 수녀원 앞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부속 고아원에서 4살 까지 살다가 너구리 영감에게 입양되었는데, 그는 도서관을 운영하는 설계자였다.

너구리 영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학교 따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믿음으로 래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지만, 래생은 스스로 글을 깨우친 뒤 독서를 했다. 너구리 영감은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 이라고 했다.

20년간 일류 암살자의 삶을 살았던 추가 한순간의 실수로 일회용 건전지 처럼 버려진다. 추는 암살 의뢰받은 콜걸을 정해진 방법으로 살해하지 않았다. 트래커들이 추를 찾아내 살해할 때까지 2년이 걸렸다. 래생은 많은 것들을 추로부터 배웠기에, 그의 죽음이 못내 섭섭했다.

래생도 비슷한 실수를 한다. 한자는 너구리 영감에 필적할 만한, 아니 이제는 세가 더 큰 신진 설계자다. 그는 권장군이라는 자를 AK소총에나 쓰이는 실탄으로 살해한 뒤 선거 전 북풍 공작에 이용하려했다. 하지만 래생이 권장군 살해 전 그와 인간적 교감을 나눈 탓이었을까, 그를 화장해버렸다. 시체가 없는 상태에서 뉴스에 활용하기란 어려운 법이었고, 한자는 이 사건으로 분노한다.

얼마 뒤 래생의 화장실에서 변기폭탄이 발견된다. 트래커 정안을 통해 추적한 결과 벨기에에서 유행한 캡슐폭탄이었음이 밝혀진다. 래생은 크롬공장 인부가 되어 잠수를 탄다. 8개월간 동거를 하는 동안 래생은 잠깐이나마 보통사람의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설계자들의 세계로 불려나올 수 밖에 없었던 래생은 추를 살해한 암살자가 한자의 밑에 있는 이발사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발사에게 찾아간 래생은 복수는 커녕 호되게 당한 뒤 미토, 미사 자매와 인연을 맺게 된다. 미토는 국과수 출신 설계자 강지경 박사와 관련된 인물이었고, 변기폭탄을 설치한 장본인이었다. 자매의 간호를 받아 회복한 래생은 이발사, 그리고 한자와의 묵은 빚을 정산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다. 도서관에서 오래 보관해 온 '장부'를 미끼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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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미토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 줄 알아? 너구리 영감과 한자 같은 악인 때문에? 그들에게 청부 일거리를 주는 권력의 배후 때문에? 아니야. 악인 몇 명이 세상을 어찌할 순 없어.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우리가 너무 얌전하기 때문이야. 무엇을 하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당신 같은 체념주의자들 때문이지... 결국 제 밥그릇 챙길 걱정밖에 못하는 당신 같은 인간이 술자리에선 뭘 다 안다는 듯 욕하고 투덜거리기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거야. 당신은 한자보다 더 역겨운 인간이야. 당신은 한자를 너무나 유명한 악인으로 만들면서 자기는 여전히 한자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믿고 싶은 거지. 결국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당신보다는 차라리 한자가 더 나아. 적어도 한자는 욕이라도 실컷 얻어먹고 있으니까"

한자와 같은 부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 욕망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건, 없건, 그는 최소한 자기 욕망에는 솔직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 채 알리바이 찾기에만 급급하다. 한자와 대다수의 우리가 싸웠을 때 패배하는 이유이다.

1940년대 하드보일드 소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설계자들>은 깔끔한 문체와 비정한 분위기를 만드는 작가의 비범한 역량 덕에 다소 유치하게 흐를 수 있는 소재와 주제를 훌륭하게 요리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6211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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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 블랙 쇼맨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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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쇼맨 시리즈는 건축사 사무실에 다니는 가미요(통칭 미요)와, 전직 마술사 현직 바의 마스터인 다케시 콤비 이야기다. 보통 가미요가 곤경에 처하거나 사건을 물어오면 삼촌인 다케시가 처리하는 방식이다.

첫번 째 이야는 <천사의 선물>이다. 아들이 살던 집을 리모델링 하려던 노부부가 미요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한다. 사정을 들으니 얼마 전 사망한 아들과 이혼한 전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다며 유산 상속자 지위를 요구한 것이다. 법원은 이 경우 '친생자 추정'을 해주므로 상속자 권리 주장은 당연한 듯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뱃속의 아이가 여러가지 사정을 따져볼 때 다른 남자의 아이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두번 째 이야기는 <피지 않는 나팔꽃>. 요양원에 사는 스에나가 히사코라는 노부인은 얼마 전 장례식까지 치른 딸이 사실은 사망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주변에서는 히사코씨가 약간의 치매 증세를 보인다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그녀에게 과거 지인이 '얼마 전 딸을 우연히 봤다'는 편지까지 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요양원 직원 이시자키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도쿄에 갔다가 미요와 다케시 콤비를 만나게 된다.

세번 째 이야기의 제목은 <마지막 행운>. 신데렐라가 될 꿈에 빠져있는 고급 가구회사 지점 사원 미나의 이야기다. 그녀 앞에 구리쓰카 마사아키라는 조건에 딱 맞는 남자가 나타났다. 다케시의 날카로운 눈도 통과하고 구리쓰카의 청혼도 이어졌으나 강도사건이 일어나면서 미나의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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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1,000편에 가까운 글을 발표한 탓에 글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도 참 다작하는 작가다.

<블랙 쇼맨과 운명의 바퀴>는 세 편의 단편을 편집의 묘를 살려 한 권으로 뻥튀기한 뒤 하드커버 장정까지 입혀 19,800원에 모시고 있다. 그래서 사무실 직원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다시 빌려 읽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천사의 선물>은 뱃속의 아이가 무뇌아로 사산이 확실한데도 전남편과 이어준 시누이 아들에게 장기 기증을 해주기 위해 '친생자 추정'을 주장한다는 내용이다.

<피지 않는 나팔꽃>은 엄격했던 어머니와 연을 끊기 위해 신분을 바꾼 딸이 어머니를 찾아간다는 얘기이고, <마지막 행운>은 연극배우로 캐스팅 하기 적당한 사람인지 판단하기 위해 그럴싸한 신랑감을 등장 시키고 가짜 강도사건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어느 이야기 하나 억지스럽지 않은 얘기가 없다. 미스터리 작가의 한계가 드러나는 순간은 트릭에 의존하는 순간이다. 트릭에 의존하여 작품을 거꾸로 써나가는 순간, 인물들은 활기를 잃고 사건은 현실로부터 멀어진다. 작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고 이야기는 작가의 의도대로만 흘러간다. 이야기가 스스로 힘을 받지 못하므로 생기 없는 작품이 되고 만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60967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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