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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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생(來生)은 수녀원 앞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부속 고아원에서 4살 까지 살다가 너구리 영감에게 입양되었는데, 그는 도서관을 운영하는 설계자였다.

너구리 영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학교 따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믿음으로 래생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지만, 래생은 스스로 글을 깨우친 뒤 독서를 했다. 너구리 영감은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 이라고 했다.

20년간 일류 암살자의 삶을 살았던 추가 한순간의 실수로 일회용 건전지 처럼 버려진다. 추는 암살 의뢰받은 콜걸을 정해진 방법으로 살해하지 않았다. 트래커들이 추를 찾아내 살해할 때까지 2년이 걸렸다. 래생은 많은 것들을 추로부터 배웠기에, 그의 죽음이 못내 섭섭했다.

래생도 비슷한 실수를 한다. 한자는 너구리 영감에 필적할 만한, 아니 이제는 세가 더 큰 신진 설계자다. 그는 권장군이라는 자를 AK소총에나 쓰이는 실탄으로 살해한 뒤 선거 전 북풍 공작에 이용하려했다. 하지만 래생이 권장군 살해 전 그와 인간적 교감을 나눈 탓이었을까, 그를 화장해버렸다. 시체가 없는 상태에서 뉴스에 활용하기란 어려운 법이었고, 한자는 이 사건으로 분노한다.

얼마 뒤 래생의 화장실에서 변기폭탄이 발견된다. 트래커 정안을 통해 추적한 결과 벨기에에서 유행한 캡슐폭탄이었음이 밝혀진다. 래생은 크롬공장 인부가 되어 잠수를 탄다. 8개월간 동거를 하는 동안 래생은 잠깐이나마 보통사람의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설계자들의 세계로 불려나올 수 밖에 없었던 래생은 추를 살해한 암살자가 한자의 밑에 있는 이발사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발사에게 찾아간 래생은 복수는 커녕 호되게 당한 뒤 미토, 미사 자매와 인연을 맺게 된다. 미토는 국과수 출신 설계자 강지경 박사와 관련된 인물이었고, 변기폭탄을 설치한 장본인이었다. 자매의 간호를 받아 회복한 래생은 이발사, 그리고 한자와의 묵은 빚을 정산하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다. 도서관에서 오래 보관해 온 '장부'를 미끼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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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미토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 줄 알아? 너구리 영감과 한자 같은 악인 때문에? 그들에게 청부 일거리를 주는 권력의 배후 때문에? 아니야. 악인 몇 명이 세상을 어찌할 순 없어.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우리가 너무 얌전하기 때문이야. 무엇을 하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당신 같은 체념주의자들 때문이지... 결국 제 밥그릇 챙길 걱정밖에 못하는 당신 같은 인간이 술자리에선 뭘 다 안다는 듯 욕하고 투덜거리기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거야. 당신은 한자보다 더 역겨운 인간이야. 당신은 한자를 너무나 유명한 악인으로 만들면서 자기는 여전히 한자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믿고 싶은 거지. 결국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당신보다는 차라리 한자가 더 나아. 적어도 한자는 욕이라도 실컷 얻어먹고 있으니까"

한자와 같은 부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 욕망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건, 없건, 그는 최소한 자기 욕망에는 솔직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 채 알리바이 찾기에만 급급하다. 한자와 대다수의 우리가 싸웠을 때 패배하는 이유이다.

1940년대 하드보일드 소설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설계자들>은 깔끔한 문체와 비정한 분위기를 만드는 작가의 비범한 역량 덕에 다소 유치하게 흐를 수 있는 소재와 주제를 훌륭하게 요리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6211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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