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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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수록된 열 여덟 편의 단편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들을 비틀어 보거나, 익숙해진 일상을 다르게 보도록 권유한다. 이야기 자체로도 재미있고, 그 이야기들을 신화나 종교적인 우의로 해석해보는 것도 흥미롭니다.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조리도구, 가구, TV 등이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공감하는 세계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그런 현실에 염증을 느껴 과거로 회귀를 꿈꾸지만, 자신 역시 인공심장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구상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유기체가 없어진 근미래의 풍경.

<바캉스>는 타임머신 테마를 주조로 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루이 14세 시대로 바캉스를 떠나는데 시간여행 보험은 경제적 이유로 생략한다. 과거로 떠난 주인공은 강도를 당한 뒤 마법사로 몰려 사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는데, 그때 보험을 권유하는 또 다른 시간여행자를 만나게 된다.

<투명피부>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피부를 투명하게 만든 뒤 곤란에 처한 사나이가 등장한다. 구경거리로 전락한 그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데 그녀는 '변화는 두렵지 않아요. 정체와 거짓이 훨씬 더 나쁘죠'라며 사나이를 포용한다.

<냄새>는 작가의 다른 작품 <파피용>과 같이 별과 별 사이의 이야기다. 어느 날 뤽상부르 공원에 별똥돌이 하나 떨어진다. 그런데 이 별똥돌은 너무 악취가 심해서 사람들은 시멘트를 부어 냄새를 막고자 했다. 하지만 다공질 구조였기 때문에 냄새가 가라앉지 않자 유리를 부어 굳힌다. 꽤 그럴싸한 모양이 되자 우주의 또 다른 차원에서 보석 장사를 하고 있는 외계인 글라프나우에트가 별똥돌을 회수해간다. 그는 진주를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황혼의 반란>은 P.D.제임스의 <콰이터스>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버전이다.경제적 이유로 노인들이 잉여 생명체 취급을 받아 사회로부터 제거된다.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은하계 차원에서는 애완동물로 취급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풀어놓은 이야기다.

<조종>은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를 모티브로 쓰여진 소설 같다. 어느 날 부터 왼손이 뇌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가능성의 나무>는 인간 역사의 긍정적인 방향성 제시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경우를 계산할 수 있는 일종의 생체 컴퓨터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고, <수의 신비>는 20까지 밖에 샐 수 없는 사람들이 지식을 독점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 속에 사람들을 가둬놓는 이야기다.

<완전한 은둔자>는 은둔이라는 것에 매료된 한 사내가 뇌만 남기고 모든 신체를 포기함으로서 완전한 은둔 상태에 돌입하는 이야기이다. 나중엔 자손들이 뇌에 포도당을 주입해 가면서 일종의 수조 같은 곳에 넣어 보존하다가 결국 장난감처럼 취급하는데 다소 엽기적이다.

<취급주의: 부서지기 쉬움>를 읽노라면 <삼체> 1부에 나오는 칠면조 얘기가 생각난다. 농장주가 칠면조에게 매일 오전 11시에 먹이를 주자 칠면조 과학자는 '매일 오전 11시에는 먹이가 있다'는 위대한 법칙을 발견한다. 추수감사절 새벽에 이 법칙이 발표되고, 그들은 요리되기 위해 살해된다.

<달착지근한 전체주의>에는 자식의 클론을 만드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까? 한 시대를 유행하는 가치관에 모두가 몰려다니는 아이러니에 관한 이야기.

<허깨비의 세계>의 주인공 가브리엘 넴로드는 어느 날부터인가 사물들 대신 괄호와 낱말을 보게 된다. 언어를 통해 사고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짧은 단상.

<사람을 찾습니다>는 조건의 집합체를 곧 사람으로 오인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누트라는 여인은 구인광고를 내는데 3천cc 이상의 차와 넉넉한 은행잔고가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부차적라고 말한다.

<암흑>의 주인공은 원자폭탄으로 인해 태양이 파괴되어버린 암흑의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안과 의사와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련한다.

<그 주인에 그 사자>는 유전자를 조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완용으로 기르기에 적절하지 않은 사자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 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당히 값 싸고, 치명적 독으로 사자도 해치울 수 있는 애완용 전갈을 키우게 된다

<말 없는 친구>는 식물 역시 일정한 조건 하에서 의사소통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살인을 목격한 나무가 범인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어린 신들의 학교>는 천사들이 인간 세계를 건설하고 흥망성쇠를 지켜보는 내용인데, 마치 <삼국지>나 <문명>같은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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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 범우문고 67
헤르만 헤세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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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

주인공 '나'는 어릴 적 우정을 나누었던 이웃 소년 부로지가 병으로 사망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꽃들이 만발하고 화초가 싱그러운 생명력을 피워 올리는 소년 시절의 밝은 이미지와 친구의 죽음이라는 우울한 이미지가 겹쳐진 짧은 이야기. 어딘지 모르게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라틴어 학교 선생>

주인공 카알은 우연히 어여쁜 하녀 티네에게 반하게 된다. 카알은 티네에게 구애하지만 티네는 카알과 자신의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티네는 목수 청년과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카알은 그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지만 차츰 상처를 극복한다. 그리고 그 즈음, 티네의 약혼자가 사고로 크게 다쳐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카알은 티네와 청년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대리석 공장>

대학생인 주인공이 사촌의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가 대리석 공장을 운영하는 람파르트의 딸 헬레네에게 반한다. 하지만 헬레네는 아버지가 정해준 구스타프 베커라는 약혼자가 있었고, 이를 거역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나'는 헬레네에게 끈질기게 구애한다.

아버지의 지배적인 태도와 사회적 인습을 거역하지 못한 헬레네는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한 그 날 자살하고 만다.

<폭풍우>

소설은 '내'가 1890년대 중반에 고향을 영원히 등지게 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시작한다. 그해는 그가 살던 도시에 전무후무한 규모의 폭풍이 불어온 해였다. '나'는 열 여덟 살로 청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 시기에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베르타에게 사랑을 고백받게 된다. 베르타는 '나'의 친구도 남몰래 사모하는 여자였고, 꽤나 예뻤기에 '나' 역시 그녀를 다소간 열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을이 폭풍우에 완전히 파괴된 모습을 본 뒤 고향을 떠난다.

헤르만 헤세가 1907년에 발표한 <이 세상 풍경(Diesseits)>에 수록된 작품 <소년 시절>, <라틴어 학교 학생>, <대리석 공장>과 1916년에 발표한 <폭풍우>가 수록된 단편소설 선집이다.

헤르만 헤세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옮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 수록된 소설들도 그가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느꼈던 혼란과 방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헤세 작품의 정수를 드러내는 작품이라기 보다 <수레바퀴 아레서> 시절의 전, 또는 후에 일어난 에피소드 정도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첫사랑이 불러 일으키는 엄청난 감정의 폭풍에 대한 주인공들의 치기어린 행동과, 그런 첫사랑이 깨어졌을 때 느꼈을 법한 고통과 우울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높은 세계로의 열망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헤세의 삶과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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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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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는 한 때 잘나가는 유군기자(일정 부서에 속하지 않고 특집 기사를 쓰는 베테랑 기자)였다. 하지만 아내가 사망한 뒤 의욕을 잃고 현재는 <월간 여성의 친구>라는 잡지의 계약직 기자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1994년 겨울을 앞두고 편집장 이자와가 마쓰다에게 심령담 특집 기사를 써보라며 투고 편지 사진 자료를 몇 개를 건넨다. 마쓰다는 의욕 넘치는 젊은 청년 사진기자 요시무라와 짝을 맞춰 열심히 현장을 돌아보았지만 태반이 오해거나 과장에 근거한 경험담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시모키타자와 역 직전에 있는 3호 건널목의 심령 사진 투고만은 느낌이 달랐다. 컴팩트 카메라와 8mm 카메라에 담긴 여성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느낌을 주었고, 투고자들 역시 과장이나 허위의 느낌이 없었다.

기차역 관계자를 통해 탐문해본 결과 그곳 건널목에서 최근 열차에 치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열차의 급정거가 잦은 구역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설명이 되는 이유였다.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마쓰다가 과거 유군기자 시절 인맥을 활용해 경찰에 문의하니 뜻밖에도 1년 전 한 여성이 칼에 찔려 숨진 장소라는 정보가 튀어나왔다. 광역폭력조직 반도파의 조직원이 강간을 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살해한 것으로 결론이 난 사건인데, 특이한 점이라면 그 조직원이 그 사건 이후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쓰다는 살해된 여인이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얘기와, 새벽 1시 3분 걸려오는 의문의 전화, 그리고 죽은 아내가 유령의 형태로나마 곁에 있었으면 하는 복합적인 이유들로 사건을 좀 더 깊게 파고 들기 시작한다.

여성지의 가십 기사를 다루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유군기자 시절 사회부 기자의 면모를 풍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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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된 여성은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에 등장하는 도코전력 OL을 연상시킨다. 그녀는 친부에 의해 초등학교 때부터 성을 팔도록 강요 받았고, 그 결과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중의원 노구치 스스무의 성적 취향에 맞아 떨어졌기에 광역폭력단체인 반도파가 그녀를 픽업해 뇌물로 바친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뒷사정도 모르고 정부 역할을 했다. 후에 노구치 스스무의 비리가 문제되자 반도파는 유일한 증거인 여성을 살해한다. 여성은 강한 원념을 품고 사망했기에 건널목에 출몰한다.

미스터리 소설이 금기하는 장치가 몇 가지 있는데 해커, 원령, 무당 따위가 그렇다. 만능열쇠가 등장하는 순간 미스터리의 전제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때로 원령이나 무당의 존재가 등장하더라도 미스터리 작가는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과학적 설명을 하게 마련인데, <건널목의 유령>은 '비합리적인 관념으로만 감지되는 세계'를 남겨둔다.

비리 중의원 노구치 스스무가 법에 의한 처벌을 받거나 탐사보도에 의해 위상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원령에 의해 심정지로 사망하는데, 이는 작가가 그동안 사회파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보였던 것에 비춰보면 다소 의아한 결말이다.

2001년 <13계단>을 발표해 에도가와 란포상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다카노 가즈아키가 <제노사이드> 이후 11년간 침묵하다 발표한 소설인데, 줄곧 내리막이다.

조지프 헬러가 <캐치 22> 발표 이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수준의 작품을 써내지 못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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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 - 그리폰 북스 006 그리폰 북스 6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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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301년, 지구.

벤 라이히는 '얼굴 없는 사나이'가 나타나 은행을 터는 꿈을 꾼다. 매번 악몽에 등장하는 그 사나이의 비밀을 알고 싶어 벤 라이히는 M.D.(의학박사 학위)를 가진 2급 Esper(Extra Sensory Perception)를 찾아간다.

의사는 전의식(前意識) 단계를 살펴보기 위해 연상 단어를 읊어보라고 하는데, 벤 라이히는 dort, air 등의 단어와 '천상의 나라로 여러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따위의 모토를 무심결에 내뱉는다. 의사는 벤 라이히가 97번의 악몽을 꾸는 동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와 단어를 종합할 때, 벤 라이히가 운영하는 모나크사(社)의 경쟁사 드 코트니(D' courtney)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진단을 내린다. 벤 라이히는 의사의 진단이 맞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을 뿐이라면 자신의 내면을 한 층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1급 Esper를 고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벤 라이히는 태양계 경제 전체를 독점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모나크사와 드 코트니사 합병을 제안한다. 드 코트니사는 합병제안에 대해 수락(WWHG) 한다는 암호를 회신하나, 라이히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에 거부의사로 오인한다. 이에 벤 라이히는 드 코트니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 79년 간 단 한 건의 모살(謨殺)도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에스퍼들의 존재가 살인 이전에 그 의도를 미리 감지해 냈고, 설령 살인에 성공했다 해도 에스퍼들이 범인을 찾아냈다. 에스퍼의 사전 감시, 사후 조사, <파괴> 형벌. 이 세 가지 단계에 의해 살인은 이제 없어진 범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에 벤 라이히는 에스퍼 의학박사 1급인 어거스터스 테이트를 찾아간다. 그는 에스퍼 길드에 대항해 <에스퍼 애국 연맹>을 이끄는 자였고, 그 조직의 유지를 위해 쉽게 유혹당할 수 있는 처지였다.

1급 에스퍼가 살인 계획을 돕고, 다른 에스퍼로부터 전의식 읽히는 것을 방어하는 정신 차폐법을 시행해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드 코트니가 보몬트 저택의 파티에 참석할 것이라는 여행 정보를 입수한 라이히는 골동품 상점에 가서 <파티를 즐깁시다>라는 책을 한 권 산다. 그 책에는 고대인들이 즐길 여러가지 게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라이히는 어둠 속에서 하는 <정어리>라는 이름의 술래 잡기 게임 부분만 제외하고 책을 낡아 보이도록 꾸몄다. 그런 다음 책을 잘 포장해서 마리아 보몬트의 저택으로 보냈다. 그녀는 보몬트 저택으로 라이히를 초대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다음으로 극장가에 있는 '멜로디 레인'으로 가서 '심리 음악 주식회사'를 방문했다. 그리고 더피라는 이름의 사장을 만나 '한 번 들으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노래'를 주문한다. 더피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계속되는 노래(징글) 하나를 제시한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Eight, sir, seven, sir.

Six, sir, five sir,

Four, sir, three, sir,

Two, sir, one!

Tenser, said the Tensor.

Tenser, said the Tensor.

Tension, apprehension,

And dissension have begun.

그 노래는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들의 나열과 반복적인 선율로 인해 한 번 들으면 머리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라이히는 에스퍼들이 자신의 생각을 읽으려 할 때 이 노래를 떠올리면 훌륭한 자기방어 수단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라이히는 살인 도구를 구하기 위해 추방된 에스퍼 제리 처치를 찾아 전당포로 갔다. 제리 처치로부터 20세기제의 나이프 피스톨을 구한 라이히는 마리아 보몬트의 저택으로 간다. 경호원들은 망막에 작용하는 로돕신 이온화제를 사용해 무력화 시킨 후, 나이프 피스톨에 젤라틴 캡슐을 장착한 뒤 물을 발사하면 증거는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문제는 보몬트의 저택에 갤렌 처빌이라는 젊은 2급 에스퍼가 파티에 잠입하는 내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테이트는 자신이 3급 에스퍼 다수와 2급 에스퍼까지 모두 차폐해 주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살인을 멈춰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라이히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려 마음을 숨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불을 끄고 사람을 찾아내는 <정어리> 게임이 시작되자 즉시 드 코트니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간다.

드 코트니는 무척 쇠약한 상태였다. 그는 라이히의 힐난에 대해 라이히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 자신은 합병에 찬성했다는 것 등을 다소 무기력하게 항변했다. 그는 자신이 벤 라이히의 적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라이히는 그의 입 속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그 과정에서 드 코트니의 딸이 뛰어 들어와 약간의 드잡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드 코트니는 사망했다. 현장에서 도망친 드 코트니의 딸 바바라가

새로운 변수가 되었지만 어쨌든 라이히의 1차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살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 1급 에스퍼 링컨 파웰 총경이 투입된다. 링컨 파웰은 여러가지 사정을 종합해 볼 때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라이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이히의 재력과 그를 방어하는 변호사 쿼터 메인, 1급 에스퍼 테이트, 그리고 물증과 증인이 없다는 점, 그의 뇌 속을 떠다니는 정체불명의 반복적인 노래 때문에 애를 먹었다. 동기, 방법, 기회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모자익 멀티플렉스 기소 담당 컴퓨터가 불기소할 것이 뻔했다.

파웰은 <무능 & 민완> 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100명의 무능한 경찰이 엉뚱한 조사를 해서 라이히의 경계를 무너뜨린 뒤 민완 형사들을 투입해 그를 무너뜨린다는 계획이었다. 아울러 바바라를 찾는 경찰에게 5계급 특진을 시켜주겠다는 공고도 내걸었다. 한편, 라이히 역시 바바라를 찾기 위해 키노 퀴자드에게 소브린 금화 10만을 뿌렸다.

라이히는 에스퍼들을 동원해 경찰들의 동태를 살폈는데 '무능팀'의 헛발질이 고스란히 라이히에게 감지되었다. 라이히는 차츰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무능팀'은 엉뚱하게도 마리아 보몬트가 범인은 아닌지 의심했고, 라이히의 알리바이 등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이상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편, 라이히도 부지런히 자신을 방어했는데 경비원들의 시각과 기억을 상실시킨 로돕신 이온화제를 제공한 생리학자 윌슨 조던을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테이트의 조언을 받아 모나크에 잠입한 경찰 끄나풀을 솎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파웰은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바바라를 먼저 확보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대신 테이트를 대동하고 제리 처치의 전당포에 찾아가 살인에 사용된 흉기를 사간 사람이 테이트가 아니냐는 방식으로 압박해 테이트로부터 제한적인 자백을 받는다. 하지만 그 때 키노 퀴자드가 보낸 킬러에 의한 하모닉건의 공격을 받게되고 전당포는 완파된다.

또 다시 실점한 파웰이었지만 라이히의 암호 통신 책임자 하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모나크와 드 코트니 사이에 오간 통신문 내용을 통해 동기를 입증할 수 있을 터였다. 아울러 시체에서 발견한 젤라틴 조각에서 추리를 재구성해 라이히가 발사한 것이 탄환이 아니라 물이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서 살해 방법도 알아낸다.

파웰은 드디어 모즈 옹(모자익 멀티플렉스 기소 담당 컴퓨터)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솝 심문 과정에서 드 코트니가 WWHG(합병에 승낙)로 회신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파웰의 가정은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드 코트니가 합병에 승낙했다면 라이히는 경제적인 이유로 그를 죽일 이유, 즉 살해 동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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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베스터는 1913년 뉴욕 맨해튼 태생으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심리학과 화학을,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1939년 SF 전문지에 <부서진 공리 The Broken Axiom>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한다.

본작 <파괴된 사나이 The Demolished Man>은 1952년 <갤럭시 Galaxy>지에 게제된 뒤 1953년에 출간, 제 1회 휴고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구성,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는 기법, 스타일리시한 등장인물 등 SF 소설을 신화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작가의 솜씨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파웰은 라이히를 정상적인 방법, 즉 동기, 방법, 기회를 입증하여 기소하는 방법으로는 그를 단죄할 수 없게 되자 에스퍼의 평의회를 설득해 집중된 에너지의 집단 카텍시스(프로이드의 용어로 어떤 표상에 충당된 심적 에너지가 다른 표상으로 이동하는 현상)를 실시한다.

이 과정을 통해 라이히의 악몽에 반복적으로 등장한 '얼굴없는 자'가 라이히 자신이자 드 코트니임이 밝혀진다. 드 코트니는 라이히의 생부였고 바바라는 이복동생이었다. 라이히는 <파괴 Demolition> 형벌을 받게 된다.

칼 세이건, 윌리엄 깁슨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진 알프레드 베스터는 올드 웨이브(40년대)와 뉴 웨이브(60년대)를 잇는 문학적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며, 80년대 사이버펑크 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371p)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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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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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윤재는 태어날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감정 표현을 잘 못했다. 유치원생이던 여섯 살 때, 윤재는 우연히 중학생의 집단 폭행을 목격한다. 윤재는 가까운 슈퍼에 들어가 아저씨에게 심상한 말투로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한다. 폭행당한 아이는 죽었고, 아이의 아버지는 슈퍼 아저씨였다. 이 사건으로 윤재 엄마는 아이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는다. 검사 결과는 알렉시티미아, 감정 표현 불능증이었다. 편도체가 비정상적으로 작아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며, 감정의 이름들을 헷갈린다고 했다. 다행스러 것은 윤재의 경우 지능 저하나 편집증적인 성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정도였다.

엄마는 아버지와의 결혼을 반대할 당시 절연하다시피 한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할머니는 윤재를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괴물' 이라고 부르더니 함께 살기로 한다. 셋은 중고책방을 운영하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초등학교에 가서도 윤재는 주변 사람과 상황들에 공감하지 못한다. 엄마와 할머니는 '희로애락오욕' 게임 같은 것을 하며 상황에 따라 취해야 할 답변과 행동들을 주입식으로 교육한다. 윤재는 '조금 이상하긴 해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생활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상태가 된다.

윤재가 생일을 맞은 날, 셋은 평양냉면을 먹으러 간다. 냉면집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 사건이 일어난다. 세상에 불만을 품은 사람의 묻지마 칼부림에 할머니가 사망하고 엄마가 식물인간이 되버린 것이다. 윤재는 눈 앞에서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슬프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2층 빵집 아저씨이자 전직 의사였던 심박사의 도움과 보험금 덕택에 윤재는 중고책방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박사의 친구이자 경영학과 교수인 윤권호가 윤재 앞에 나타난다. 그는 다소 생뚱맞은 부탁을 하는 데 사경을 헤매는 아내를 만나 아들인 척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렸을 적 아들을 놀이공원에서 잃어버렸는데 죽기 전에 아내와 아들을 상봉시켜주고 싶다 했다. 윤교수의 아내는 윤재를 죽기 전에 아들이라 생각하고 꼭 안아준 뒤 사망한다.

얼마 뒤 윤재네 반에 윤교수의 진짜 아들이 전학온다. 이름은 윤이수였지만 부모와 덜어져서 소년원에서 불리던 '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다. 곤이는 윤재가 자기 대신 아들 노릇을 했다는 것에 심통이 났는지 윤재를 폭행하고 괴롭히는 등 위악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윤재의 '감정 표현 불능증'에 위악이 기대하던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자신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태도 때문에 차츰 윤재의 주변을 맴돌며 친해지려고 한다.

한편, 사춘기에 접어든 윤재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아이가 도라였다. 도라는 달리기를 좋아하고, 무슨 일에든 솔직담백하게 감정 표현을 하는 아이였다. 윤재나, 곤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도라에게 윤재는 차츰 어떤 '감정 비슷한 것'을 느낀다.

수학여행에서 곤이가 도둑으로 억울하게 몰린 뒤 곤이는 집을 뛰쳐나가 과거 소년원 시절 알고 지내던 선배 '철사'를 찾아간다.

윤재는 곤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철사를 찾아간다. 호락호락하게 곤이를 놔주지 않으려는 철사와 윤재, 곤이의 다툼 과정에서 윤재가 철사의 칼에 찔린다.

윤재는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그 사건 뒤로 윤재는 약간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심박사는 '어쩌면 넌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란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곤이는 철사를 찔렀지만 정당방위로 인정될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가 병상에서 일어나 휠체어를 타고 문병 온다. 윤재는 자기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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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를 보면 연쇄살인범들은 하나 같이 정신적인 흠결을 갖고 있다. 어렸을 적에 학대를 당했든, 뇌에 선천적인 문제가 있든, 그들은 살인을 통해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종(種)'이다. 이들은 교정이 전혀 불가능하다. 물론 이미 살인이 일어난 이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이제와서 교정하는 것도 의미가 없긴 하다.

그런데 아직 성장기였을 경우, 또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소설읽기를 통한 고민'을 하고 싶다면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나 필립 K.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더해 <아몬드>가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청소년 소설다운 전개와 결말, 다소 억지스러운 사건들이 튀는 느낌을 주지만 작가의 따뜻한 시선 덕에 큰 흠결로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나 작품 속에 나오는 어떤 상황이 나의 그것과 유사해 꽤 몰입해서 읽었다.

제10회 창비청소년문학상과 제17회 일본서점대상(번역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https://blog.naver.com/rainsky94/22357165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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