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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쓰다는 한 때 잘나가는 유군기자(일정 부서에 속하지 않고 특집 기사를 쓰는 베테랑 기자)였다. 하지만 아내가 사망한 뒤 의욕을 잃고 현재는 <월간 여성의 친구>라는 잡지의 계약직 기자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1994년 겨울을 앞두고 편집장 이자와가 마쓰다에게 심령담 특집 기사를 써보라며 투고 편지 사진 자료를 몇 개를 건넨다. 마쓰다는 의욕 넘치는 젊은 청년 사진기자 요시무라와 짝을 맞춰 열심히 현장을 돌아보았지만 태반이 오해거나 과장에 근거한 경험담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시모키타자와 역 직전에 있는 3호 건널목의 심령 사진 투고만은 느낌이 달랐다. 컴팩트 카메라와 8mm 카메라에 담긴 여성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느낌을 주었고, 투고자들 역시 과장이나 허위의 느낌이 없었다.
기차역 관계자를 통해 탐문해본 결과 그곳 건널목에서 최근 열차에 치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열차의 급정거가 잦은 구역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설명이 되는 이유였다.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마쓰다가 과거 유군기자 시절 인맥을 활용해 경찰에 문의하니 뜻밖에도 1년 전 한 여성이 칼에 찔려 숨진 장소라는 정보가 튀어나왔다. 광역폭력조직 반도파의 조직원이 강간을 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살해한 것으로 결론이 난 사건인데, 특이한 점이라면 그 조직원이 그 사건 이후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쓰다는 살해된 여인이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얘기와, 새벽 1시 3분 걸려오는 의문의 전화, 그리고 죽은 아내가 유령의 형태로나마 곁에 있었으면 하는 복합적인 이유들로 사건을 좀 더 깊게 파고 들기 시작한다.
여성지의 가십 기사를 다루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유군기자 시절 사회부 기자의 면모를 풍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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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된 여성은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에 등장하는 도코전력 OL을 연상시킨다. 그녀는 친부에 의해 초등학교 때부터 성을 팔도록 강요 받았고, 그 결과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중의원 노구치 스스무의 성적 취향에 맞아 떨어졌기에 광역폭력단체인 반도파가 그녀를 픽업해 뇌물로 바친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뒷사정도 모르고 정부 역할을 했다. 후에 노구치 스스무의 비리가 문제되자 반도파는 유일한 증거인 여성을 살해한다. 여성은 강한 원념을 품고 사망했기에 건널목에 출몰한다.
미스터리 소설이 금기하는 장치가 몇 가지 있는데 해커, 원령, 무당 따위가 그렇다. 만능열쇠가 등장하는 순간 미스터리의 전제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때로 원령이나 무당의 존재가 등장하더라도 미스터리 작가는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과학적 설명을 하게 마련인데, <건널목의 유령>은 '비합리적인 관념으로만 감지되는 세계'를 남겨둔다.
비리 중의원 노구치 스스무가 법에 의한 처벌을 받거나 탐사보도에 의해 위상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원령에 의해 심정지로 사망하는데, 이는 작가가 그동안 사회파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보였던 것에 비춰보면 다소 의아한 결말이다.
2001년 <13계단>을 발표해 에도가와 란포상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다카노 가즈아키가 <제노사이드> 이후 11년간 침묵하다 발표한 소설인데, 줄곧 내리막이다.
조지프 헬러가 <캐치 22> 발표 이후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수준의 작품을 써내지 못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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